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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안 Apr 08. 2021

사자와 세 마리 물소

몽세프 두이브

옛날 어느 산꼴 자기에 평생 함께 하기로 약속한 사이좋은 물소 세 마리가 살았어. 한 마리는 달님처럼 하얀 물소, 다른 한 마리는 어두운 밤처럼 검은 물소, 나머지 한 마리는 땅처럼 노란 물소였어. 셋이 함께라면 무엇도 무서울 게 없었어. 그리고 배가 몹시 고픈 사자도 있었어.

-옛날 아랍 우화에서


말모이라는 영화가 있다. 조선어학회가 만든 우리말 사전을 만들고 지켜낸 이야기이다. 영화는 주시경 선생이 돌아가시고 류정환이라는 사람이 조선어학회를 맡아 전국의 조선말을 모으는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일제강점기에 사전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조선어학회에 김판수라는 시정잡배 같은 사람이 합류한다. 김판수는 영화관에서 표 파는 일을 하며 두 아이를 홀로 키우고 있다. 김판수가 이런저런 인연으로 조선어학회에서 심부름을 시작하면서 말모이 영화는 본격적인 흐름을 탄다.


김판수는 한글을 읽고, 쓸 줄 모른다. 읽고 쓸 줄 모르는 일은 그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일제강점기의 상황은 차별과 불편함을 유발하긴 하지만 그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다. 그런 것보다는 두 자식과 자신이 먹고, 입고, 살아가는 일이 더 급하다. 그런 그가 조선어학회에서 심부름을 하며 한글을 익히고 글씨를 아는 즐거움에 조금씩 빠져들기 시작한다. 그렇게 글을 익힌 김판수에게 조금씩 눈에 들어오는 다른 것들이 있다. 사라져 가는 아름다운 우리말이라던가, 그런 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일하는 사람들이라던가, 곳곳에서 일본인들에게 핍박받는 사람들이라던가 그런 것들 말이다.


류정환주시경 선생이 돌아가시고 난 뒤 조선어학회의 수장이 된 사람이며 지식인이다. 그는 김판수가 조금씩 깨닫기 시작한 것들을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자신과 동료들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려 애쓰는 사람으로 나온다. 그는 옳은 것을 위해 싸우는 사람이다. 그런 류정환에게는 변절자 아버지가 있다.


“저한테 한글을 가르치신 게 아버지 아니십니까.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걸음이 더 큰 걸음이라고, 조선사람 모두가 지식을 키우고 힘을 키우면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아버지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땐 조선이 독립될 줄 알았다. 내가 어리석었어.”

“아버지”

“30년이다 30년이 지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류정환이 조선어학회가 발각되어 대표로 잡혀가게 되었을 때,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게 해 준 변절한 아버지를 찾아가서 나눈 대화의 한 부분이다. “30년이다 30년 30년이 지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라는 말을 보는 순간, 포기해버리고 일본의 옆에서 함께했다고 알려지는 역사 속 사람들이 떠올랐다. 변절자 아버지의 저 말은 개인적인 이익과 살기 위한 변절을 정당화하기 위한 변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30년의 세월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처음 조국을 빼앗겼을 때 일어나서 싸우면 되찾을 줄 알았던 젊은 그들이 세 번의 강산이 변하고도 그대로인 세상을 보며 포기하고 싶지 않았을까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젊은 아들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어섰다. 그러나, 나이 든 아버지는 조국을 포기하고 안위를 위해 움직이고 있는 상황이 이율배반적이면서도, 충분히 있을법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의 말들을 모아 사전을 마무리하던 중 드디어 꼬리를 잡은 일본군들이 들이닥친다. 그 순간 조선어학회 사람들은 몸을 바쳐 사전을 보호한다. 그 순간 김판수는 아들 덕분에 살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하지만 한글을 익힌 김판수는 이미 예전의 김판수가 아니다. 안온 삶  되신 사전을 지키는 길을 선택한다. 그 순간 그가 다른 길을 선택했다면?


'사자와 세 마리 물소'는 아랍의 우화를 그림책으로 만든 것이다. 그림책 등장하는 사자와 물소는 사실적이며, 배경은 어둡다. 그런데 한 장 한 장 그림은 절절하게 아름답다. 그래서 물소들의 죽음은 더 서글프다. 배고픈 사자는 물소 한 마리를 사냥해서 먹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크지만, 물소 세 마리와 싸워서 이길 수는 없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물소 세 마리를 이간질하기 시작한다. 세 마리 물소는 함께하기로 약속했지만 사자의 이간질과 사자에 대한 두려움으로 서로를 한 명씩 사자의 식량으로 떠나보내게 된다. 마지막 남은 검은 물소가 드디어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날.


“난 너무 비겁했어요.”

“날 잡아먹어요. 당신이 하얀 물소를 삼키던 날, 그때 나도 이미 죽은 것과 같아요.”

  

독립을 꿈꾸지 않게 된 아버지는 일본에 기대는 순간 이간질에 넘어간 검은 물소처럼 이미 살아도 살아 있지 않은 삶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반면 한글을 알게 되며 지킬 것이 생기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한 김판수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닐까?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도 죽음과 고통의 공포, 독립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늘 있었을 것이다. 럼에도 불구하고 연대하여 함께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한 발자국씩 걸어 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세상은 살만하지 않은가 생각해 본다.


“해방 후 사라진 줄 알았던 말모이 원고가 서울역 창고에서 발견됨으로써 ‘조선말 큰사전’이 탄생한다. 한국어는 현존하는 3천 개 언어 중 고유의 사전을 가지고 있는 단 20여 개의 언어 중 하나이며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독립한 식민지 국가들 중 거의 유일하게 자국의 언어를 온전히 회복한 나라이다.”

  

말모이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말이다. '거의 유일하게 자국의 언어'를 온전히 회복하는데 흘린 그분들의  희생의 발자국을 잊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그리하여  알아가는 것을 멈추지 않고, 시련과 좌절에도 한 발자국 잘 디디고 무너지지 않는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다. 또한 사악한 거대한 힘에 이간질당하지 않기를, 그래서 작은 우리들이 서로를 미워하지 않는 세상을 꿈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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