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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안 Apr 14. 2021

식빵유령

윤지

언제부터 반려묘라는 말을 하기 시작했을까? 궁금하여 찾다 보니 한 동물병원에서 운영하는 블로그에 반려묘가 늘어나는 이유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농림축산검역본부가 고양이를 키우는 가구가 2012년에 비해 2015년에 무려 63.7%가 증가하여 약 40만 마리가 반려묘로 키워지고 있다고 했다고 적혀있다. 이전에는 반려견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같았는데, 요즘 텔레비전에서도 반려묘와 함께 하는 연예인들이나 일반인들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EBS에서는 ‘고양이를 부탁해’는 프로그램을 통해 반려묘 행동교정에 대해 알려주기도 할 정도이다. 그 이전에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으니 고양이 프로그램이 뒤늦게 나온 것도 그만큼 반려묘를 키우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증거일 성싶다.


최근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동화책에도 '강남 사장님', '고양이 깜냥'같은 고양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책이 베스트셀러로 올라오는 일이 부쩍 늘었다. 어쩌면 내가 고양이를 키우기 때문에 더 눈에 들어오는 걸지도 모르지만 어쩐지 꼭 그래서만은 아닌 것 같다. 이전에도 있었겠지만 고양이와 함께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노출되고 점점 많아지는 이유가 자꾸 궁금해진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전래동화에서도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가 등장하긴 했다. 집주인의 구슬을 훔쳐간 사람을 찾아가서 쥐들을 호령하여 구슬을 찾고 돌아오던 중에 개의 방정맞은 질투로 구슬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다시 고양이가 물고기를 잡아서 물고기 배 속에 있는 구슬을 찾아낸다. 그 이후로 고양이는 집안에서 생활하고 개는 밖에서 생활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더랬다. 장화 신은 고양이에서도 머리 좋은 고양이가 셋째 아들을 왕의 사위로 만들어 주기도 한다.


전래동화들을 떠올려 보니 아주 오래전에는 집에 한 마리씩은 개와 함께 키워졌던 것 같은데 언제부턴가 고양이는 길거리를 배회하는 천덕꾸러기가 되어있었다. 그건 아마 고양이가 더 쥐를 잡을 필요가 없어지면서이지 않을까? 사람에게 고양이의 효용 가치가 없어진 것이 아닐까? 그러다가 최근에 1인 가구가 늘어나면서 사람들은 따스함을 나눌 반려동물로 고양이를 선호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인 가구가 아니더라도 바쁜 삶을 사는 사람에게 고양이는 개보다 조금 더  손이 덜 가는 동물이다. 거기다 고양이가 효용가치가 사라지면서 집을 잃은 길고양이들의 개체수가 많아지면서 그들의 안전과 생명에 대한 관심이 많아진 것도 한몫하리라 생각된다.


‘식빵 유령’을 읽었다. 식빵 그림 안에 있는 귀여운 유령의 모습이 호기심이 생겨서이다. 제목도 표지그림도 식빵 유령에 관한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책 속 이야기는 식빵 유령이 관찰자가 되어 길고양이를 보는 이야기이다. 빵 가게의 식빵 안에서 생활하는 식빵 유령이 모두 퇴근하고 나면 몰래 들어와 빵집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길고양이와 이런저런 투덕거림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더 고양이가 오지 않는다. 빵집을 엉망으로 만들고 말도 잘 듣지 않는 고양이였지만,  오지 않으니 유령은 고양이가 어찌 되었는지 궁금해진다. 그러던 어느 날 고양이가 온다. 유령이 되어서. 이제 식빵 유령은 고양이와 함께 식빵에 산다.  고양이는 여전히 장난꾸러기지만 식빵 유령이 딱 감당할 정도의 장난만 친다. 그리고 그들의 집인 식빵 안 풍경은 평화롭다.


한쪽 귀가 잘린 고양이이니 아마도 중성화 수술은 마친 고양이었을 것이다. 이 고양이가 밤에 빵집에 더 오지 못한 이유는 빵집에 살아있는 주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구멍을 막아서일 가능성이 크다. 아침이면 밀가루 포대에 구멍이 뚫려 있고, 빵 봉지가 뜯어져 있다면 어느 주인이라도 구멍을 막았을 것이다. 그렇게 하나둘 갈 곳을 잃은 고양이는 결국 눈 오는 날 객사한다. 이 이야기를 만든 작가님은 세 마리의 길고양이와 함께 생활한다고 적혀있다. 우리 아파트 앞에도 올해 초반까지는 고양이 밥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여름이 오기 전에 사라졌다. 고양이 밥을 쥐가 같이 먹으니 고양이 밥을 주지 말라는 팻말이 붙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아파트 주변을 배회하는 턱시도 고양이 한 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그 고양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그 유행에 편승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반려묘를 키우는 집이 되었다. 아이들이 반려동물을 원했고, 그걸 들어주고 싶었다. 가족들 중 나만 빼고 모두 알레르기 검사를 했는데 개털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 둘이나 있었고, 고양이 알레르기는 아무도 없었기에 고양이를 입양하기로 했다.(나는 우리 집에서 제일 건강한 사람이고 시골에서 자라서 알레르기라곤 없을 거라고 자신만만했다.)  이왕 고양이를 키울 거라면 이미 많은 사람이 사기 위해 줄 서 있는 고양이들보다는 돌봄이 필요한 길고양이가 좋겠다는 생각으로 입양을 결정했다. 내가 길고양이를 입양했다고 했을 때 길고양이 구조를 위해 힘쓰는 지인이 너무 잘했다고, 우리 집에 온 고양이는 묘생 역전한 거라고 칭찬해 주었었다.


나는 지금도 그걸 잘 모르겠다. 우리 집에 온 길고양이가 묘생 역전을 했다고 할 정도로 행복한 삶인가? 밖에서 파리도 쫓고, 나비도 쫓으며 흙을 파고, 자손을 보고 사는 삶이 그에게 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흙이나 진짜 모래가 아닌 두부 모래를 비벼서 용변을 보고, 중성화 수술하고, 사람이 놀아주지 않으면 놀지 못하는 삶보다. 다만 우리와 살면 밥을 굶지 않고, 깨끗한 물을 마시고, 나쁜 세균에 노출될 위험은 현저히 줄어들어 길에서 보내는 것보다 훨씬 오래 살기는 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에 둘째 고양이를 입양했다. 허피스와 결막염 앓고 있었고, 6개월밖에 안됐는데 다른 길고양이에게 교미를 당해 급하게 중성화 수술을 한 냥이였다. 처음에 데리고 와서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서 허피스와 결막염 치료를 하던 중 설사와 구토로 이어졌다. 병원에 가서 약을 처방받고 열심히 먹여서 지금은 다시 건강해졌다. 설사와 구토가 이어지던 동안 그 조그만 고양이가 죽을까 봐 걱정이 되었고, 이 냥이가 구조되어 우리 집에 오지 않았다면 어떠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길에 있는 고양이 들은 그렇게 해서 짧은 생을 살다가 죽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유기된 고양이의 길거리 생활은 더 불행하다고 한다. 사람에게 길들여진 그 냥이들은 자연에서 살아남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


식빵 유령의 길고양이는 결국 빵집 고양이가 된다. 그 삶은 행복할까? 우리 집 냥이들의 삶은 행복할까? 집안에서 반려묘로 사는 삶과, 길고양이로 사는 삶 두 가지 선택밖에 없는 것일까? 오래전 사람들이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던 시절 이 집 저 집 오가며 밥도 먹고 쥐도 잡던 시절, 자기들끼리 만나서 놀고 짝짓기를 하던 시절이 고양이에게는 가장 좋지 않을까? 이 모든 건 우리 집에 냥이 두 마리가 함께 하기 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고민이다. 냥이 두 녀석이 없는 상태에서 '식빵 유령'을 읽었다면 보다 마음 편하게 '유령이 귀엽다', '고양이 불쌍하네. 그래도 유령과 행복해져서 다행이야.'하고 잊어버렸을 것이다.


세상을 보는 눈의 넓이와 높이에 관해 생각해본다.  뒤늦게 내가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도, 불편함을 감수하고 두 냥이를 입양했기에 책임지고 함께 하는 일의 당연함. 그렇게 그들과 가족이 되어 함께 살아가며 따스함을 나누는 일. 두 냥이를 보며 동물의 권리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비록 외면하고 싶은 일이라도 알고 배워 나가며 내가, 우리 가족이 바뀌어 가는 것. 그렇게 이제는 '식빵 유령과 길고양이 유령의 따스한 빵 속 풍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내가 만들어 갈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 이렇게 한 뼘쯤 넓어진 마음을 느낀다. 사람의 마음은 계속 자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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