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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안 May 05. 2021

흔한 자매

요안나 에스트렐라

    내가 기대했던 자매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건 제목이 잘못되었다. 흔한 언니 이야기다. 많은 그림책에는 동생이 생겨서 상처 받고 질투하는 첫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첫째에게 동생이 얼마나 귀여우며, 사랑스러운 존재인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너와 비슷한  같은 부모에게서 나온 아이라는 걸 알리는 책들이다. 그리고 부모가 여전히 너를 아주 많이 사랑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 집 첫째는 늘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엄마 “나랑 동생 중에 누구를 더 사랑해? “라는 질문을 자주 하고, 어렸을 때는 동생의 유모차를 첫째가 항상 타고 다녔다. 지금도 글을 못 읽는 동생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고 있으면 나도 읽어달라고 말한다. 동생이 가지고 있는 건 항상 부러워서 처음에 자기가 가지고 있던 물건보다 동생 물건이 좋으면  동생을 구슬려서 그걸 받아낸다. 길거리에서도 손잡고 걷는 것보다 혼자 걷는 걸 더 좋아하면서도, 어린 동생이 엄마 손을 잡고 있으면 자기도 손을 잡아야 한다고 우긴다.


‘흔한 자매‘는 제목은 흔한 자매이지만 언니의 입장에서 쓰인  이야기였다. 동생을 불러주는 어른들의 모습은 부럽고, 내가 아끼는 책이나 스티커를 망가뜨리는 건 너무나 속상하다. 속상한 일을 금방 잊어버리고 또 잘해주면 동생은 또 나를 속상하게 한다. 그리고 동생이 먼저 시작한 싸움인데 항상 동생이 울어서 엄마에게 혼나는 건 나다. (우리 집 첫째도 아마 항상 느끼는 걸 거다.) “그렇지만 동생은 친구와 다른 나와 닮은 공유하는 가족이다. “라는 결론으로 책은 끝이 난다. 나는 3녀 1남 중 첫째였는데, 동생들이 청소를 하지 않으면 늘 혼나는 건 나였고, 동생이 숙제를 찢어도 동생이 몰라서 그랬을 거니 이해하라는 엄마의 말이 속상했던 기억이 있다. 엄마, 아빠가 일하러 가면 어린 동생들을 돌보는 건 내 몫이었다. 나보다 한참 어린 동생이 나에게 대들어서 자주 짜증 나고 속상했던 기억들이 있다. 그런데 이건 그냥 언니인 나의 입장일 뿐이다. 동생들의 입장은 어떨까?


많은 유아서적은 부모에게 말한다. 둘째가 생기면 첫째를 많이 신경 써주라고 말이다. 신생아인 둘째는 아직 잘 모르니 엄마의 사랑의 뺏긴 첫째를 많이 안아주고 항상 첫째의 편을 들어주라고 말이다. 많은 그림책들도 동생이 생겨 힘들어하는 첫째를 설득하기 위한 책들이다. 말 안 듣고 엄마의 보살핌을 많이 받는 동생이 미워 할머니에게 팔았다가 동생의 소중함을 알고 데리고 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 왜 동생의 입장에서 쓰인 이야기는 없을까? 진짜 억울한 건 동생이 아닐까? 엄마 배속에 있을 때부터 한 번도 온전한 사랑을 독차지해본 적이 없는 동생. 첫째는 배에 있을 때부터 동생이 생기기 전까지 온 가족의 애정을 듬뿍 받았다. 태교 때부터 신경 써야 한다고 태교가 절반이라고 전문가들은 이야기하면서 막상 둘째의 태교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태어난 둘째보다는 첫째의 마음을 보살펴주라고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경쟁자가 떡하니 있는 둘째는 억울함을 느끼지 않을까?


둘째는 나에게 “엄마 내가 더 좋아, 언니가 더 좋아.”를 묻지 않는다. “똑같이 좋아하지”라고 스스로 말한다. 첫째는 귓속말로라도 둘 중 누가 더 좋은지 정답을 이야기해 달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말이다. 둘째의 마음을 다룬 책들도 나왔으면 좋겠다. 그림책에서 첫째에 대한 책이 많은 건 어쩌면 둘째는 순응하고 살지만 자꾸 반항하는 첫째 때문에 힘든 엄마들을 고려한 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조금 더 귀엽고 연약한 둘째만을 부모가 챙길까 봐 미연에 방지하려고 생긴 말일까? 또는, 단지 어른들이 편하려고 만들 걸지도 모른다는 음모론적인 느낌도 든다. 큰애에게 많은 권력을 주면 자연스럽게 집안이 돌아가니까 말이다. 그렇게 첫째에게 권력과 책임을 많이 주고, 둘째는 권력이 조금 없는 대신 자유를 주는 것이 통상적인 가정 체제이다. 나는 거기에 여기에 순응하며 사는 일이 싫다.


어떤 체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순응’이라는 단어는 정말 무서운 단어라고 생각한다. 첫째에겐 둘째가 태어나면서 세상이 완전히 변하는 충격을 받고 반항도 하고 변혁도 꿈꾼다. 하지만 둘째는 그 세상이 당연하여 받아들이고 산다.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이 체제는 당연한 것이니 받아들이라고 말할 때가 있다. 세상도 사람도 점점 변화하고 있다. 하늘 아래 자연스럽게 그대로인 건 하나도 없다. 그러니 체제에 대한 적절한 순응과 변화를 인한 시도는 항상 있어야 한다.


이 이야기는 요즘 내가 가장 고민하는 부분이다. 두 아이를 대할 때 세상의 규칙에 대해 적절한 순응과 약간의 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육아서적과 선배 엄마들의 조언에 따라 첫째를 더 많이 챙기려 노력했지만 지금은 공정하게 둘을 대하기 위한 조율에 힘쓰고 있다. 둘째가 처음부터 경쟁자가 있는 세상에서 나보다 키도 크고, 달리기도 빠르고, 말도 잘하고, 글씨도 쓸 줄 알아서 쉽게 이길 수 없는 언니에게 좌절과 순응을 배우지 않았으면 한다. 자신의 나이에 딱 맞는 정도의 성취감과 즐거움, 책임을 느끼며 살았으면 좋겠다.  아들이 누구의 언니라서, 누구의 동생이라서 라는 역할이 아니라 각자의 나이와 상황에 맞는 적절한 보호와 책임, 권력, 자유를 원하는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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