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치고도 꽤 큰 크기의 이 책의 표지는 하얀색이다. 커버에 꾀 공을 들였는지 머메이드지보다 조금 더 두껍고 단단한 종이이다. 표지의 앞면에는 “적”이라는 큰 제목과 그 아래 아주 덩치가 크고, 훈장을 많이 가진 높은 계급으로 보이는 군인이 선글라스를 쓰고 웃으며 격례를 하고 있다. 그리고 표지의 뒷면에는 두 개의 구멍이 있다. 이 구멍은 종이를 찢어서 만든 것처럼 엉성하다. 두 구멍 사이에는 쓰레기 같은 것들이 있고 나에게 조금 가까운 쪽의 구멍에는 남루하고 어리숙해 보이는 군인 같은 남자가 슬픈 표정으로 반대편 구멍을 보고 있다.
두 구멍 사이에 “두 병사, 그리고 평화에 대한 이야기”라고 적혀있다. 그리고 책을 펼치면 제일 먼저 까만 색상의 종이에 하얀색으로 쓴 ‘전쟁이다’라는 큰 글자가 나타난다. ‘그들은 적이다’라는 문장이 끝나면 다시 ‘적’이라는 속지 제목이 나타난다. 그림책의 표지부터 ‘그들은 적이다’까지 읽은 데만도 한참이 걸렸다. 페이지마다 나를 압도하는 외로움과 두려움에 서글퍼져서 다음 페이지를 넘기기가 힘들었다. 어찌 보면 누구나 알고 있는 전쟁을 하고 있는 병사들의 슬픈 이야기라 식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아둔하고 외로운 병사들의 고통과 그리움, 두려움을 종이 한 장 한 장에 갈아서 새겨 넣은 느낌이 드는 그림책이다. 그림책을 넘기는 것이 고통스러워 ‘읽지 말까’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병사는 참호를 지키고 있다. 이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리면 만날 가족을 생각하면서, 너무나 고요한 속에 전쟁이 끝났나 싶을 때도 있지만 여기서 나갈 순 없다. 적이 참호를 지키고 있어 내가 나가면 나를 죽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적은 잔인한 괴물 같은 존재라고 배웠다. 그는 아이와 여자를 쉽게 죽이는 무서운 인간이라 내가 상대하기 벅차다. 그래서 참호 속의 병사는 이도 저도 못하고 웅크리고 있다. 그렇지만 먹을 것은 떨어져 가고, 참호 속에 내리는 비를 계속 맞으며 버틸 수는 없다. 드디어 그는 결심한다. 달도 별도 없는 깜깜한 밤 적의 참호로 가서 적을 죽이기로. 엉금엉금 기어서 도착한 적의 참호에는 아무도 없다. 나와 똑같은 아주 조금 남은 비상식량과 가족의 사진이 있을 뿐이다. 그도 아이와 부인이 있고 그 사람들을 그리워하며 참호를 지키고 있는 나와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아주 지쳐 있습니다. 이제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에게 그를 기다리는 가족이 있다는 것도요.
이 전쟁이 끝나면 우리는 각자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요.
전쟁이 끝나기만 한다면요.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 겁니다.
그가 내게 이런 메시지를 보내오지 않을까요?
‘이 순간부터 전쟁은 끝낸다.’
이런 메시지를 받는다면 나는 당장 수락할 겁니다.
대체 그는 무엇을 기다리는 걸까요?
....
나는 손수건에 메시지를 적어 플라스틱 병에 넣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병을 밀봉했습니다.
나는 온 마음을 다해 겨냥을 하고 병을 힘껏 던졌습니다.
부디 나의 병이 그의 참호 안에 떨어지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종이를 대충 뜯어 만든 듯한 참호. 겨우 한 명이 눕지도 못하고 앉아 있어야만 하는 그곳에 있는 그 사람은 끝까지 혼자이다. 마지막에 두 개의 플라스틱 병이 각각의 참호로 날아간다. 그들의 플라스틱 병이 전쟁을 끝낼 수 없음을 알기에 나는 그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전쟁의 끝을 선언할 수 있는 사람은 ‘적’의 표지에 있는 훈장을 단 어깨가 넓은 그 사람이다. 책의 간지에 등장하는 수많은 군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그들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렇다면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희망은 서서히 변화하는 공공의식에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천만 명이 기아로 사망하고, 수억 명이 만성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로,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현재는 그 주범이 살인적이고 불합리한 거대 경제질서라는 사실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낄 줄 아는 유일한 생명체인 인간의 의식 변화에 희망이 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_장 지글러의 서문 중에서
장 지글러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읽고 있으면 표지의 장군은 국가나 자본주의 거대 기업이고 그들이 만들어 내는 전쟁 같은 세상에 있는 참호 속 병사는 우리로 보인다. 무언가 잘못된 것을 알고 행동도 해 보지만 또 작고 약한 우리로 무엇이 변할 수 있을까 좌절하게 되기도 한다. 다비드 칼리는 '나의 병'이 '그의 참호'안에 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책을 마무리한다. 환경과 관련된 책을 몇 권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바뀔까? 나 한 사람이 바뀐다고 가능할까? 여전히 기업들에서는 환경을 파괴할 것들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고, 나의 소비는 거기서 벗어나기 힘들다. 내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굶주리고 있는 지역의 사람들에게 돌아갈까?라는 회의가 들었다.내가 웅크리고 있던 열심히 발버둥 치던 우리가 사는 지구의 마지막은 결국 오지 않을까라는 두려움도 들었다.
그러나 함께 독서한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다른 사람, 동물들이 겪고 있는 아픔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고 공감한다. 그리고 눈을 반짝이며 서로의 작은 실천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의 작은 실천을 칭찬해준다. 서로의 한 발 더를 위한 작은 방법들을 나눈다. 혼자서 하는 것보다는 둘이 하는 것이 좋고, 둘이 하는 것보다는 여럿이서 나누는 것이 좋다. 그렇게 나누다 보면 두배, 세배가 아니라 열 배, 백배의 힘이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장 지글러가 말하는 '서서히 변화하는 공공의식'이 결국에는 선글라스를 쓴 독불장군도 변화시킬 수 있을 거라 믿게 된다. 2007년에 쓴 그의 책에 있는 내용들이 여전히 유효함은 슬프지만, 받아들인다. 그래도 이런 이야기가 그때보다 더 많이 나오고 공감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에 희망을 걸어보련다. 작은 우리는 두려움 속에서도 변화를 위해 '병'을 던질 수 있는 존재들이니까.
그런데...
병은 맞은편 참호에 잘 도착했을까? 병 속의 편지를 적이라 불리는 그 사람은 읽고 믿어 주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