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신을 원합니다. 편안한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시와 현실적인 위험과 자유를 원하고, 선과 죄악을 원합니다.”(멋진 신세계(올더스 헉슬리))
사람이 사는 집에 몰래 숨어들어 음식을 훔쳐서 하루하루를 먹고사는 새앙쥐는 어느 날 태엽쥐를 만나게 된다. 태엽쥐는 윤택이 나고, 편안해 보였으며 본인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새앙쥐는 사람에게 쫓기는 일은 당연히 없을뿐더러 사랑까지 받는 태엽쥐가 부러웠다. 그래서 새앙쥐도 태엽쥐가 되기 위해 소원을 들어주는 도마뱀을 찾아간다. 도마뱀은 그런 새앙쥐에게 보라색 조약돌을 찾아오면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말하고 새앙쥐는 소원을 이루기 위해 조약돌을 찾기 시작한다. 새앙쥐는 도마뱀이 원하는 물건을 찾다가 바구니에 버려진 태엽쥐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버려진 물건들이 있는 바구니에서 보라색 조약돌도 함께 발견하게 된다. 새앙쥐는 마침내 찾아온 기회를 태엽쥐를 위해 사용한다. 새앙쥐는 도마뱀에게 버려진 태엽쥐 친구가 자신처럼 생쥐가 되게 해달라고 소원을 빈다.
고백하자면 나는 자유로운 새양쥐보다는 태엽쥐에, 멋진 신세계에서는 존 보다는 존의 엄마에 가깝다. 나는 존이나 새앙쥐처럼 편안하지 않은 자유보다는 태엽쥐나 존의 엄마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편안함을 원했던 적이 더 많다. 처음 '멋진신세계'를 읽을 때 나는 당연히 존처럼 해야 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머리로는 생각했지만, 존의 엄마처럼 사는 일이 참으로 편할 텐데 라며 심정적으로는 존의 엄마 편이었다. 존 같은 사람이 세상을 바꿔준다면 손뼉 쳐주며 편승할 순 있겠지만 “옳지 않다,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맞서야겠다.”라고는 감히 생각을 못했었다. 처음 '멋진신세계'를 읽을 때는 일단 불의를 잘 못 찾고, 어쩌다 찾았다고 해도 웬만하면 꾹~ 참는 나를 보며 내 성격이 둥글둥글하고 소심하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났고 이번에 새앙쥐와 태엽쥐를 읽으며 내 안의 작은 변화를 느꼈다. 예전에 나는 성격이 모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무지했었던 것이다. 책을 읽지 않는 멋진 신세계의 사람들이나, 아이의 장난감방을 한 번도 나가보지 않은 태엽쥐처럼 말이다. 그 안에서 주어지는 편안과 안정 정도로 만족하며 세상의 어둡고 불합리한 부분을 몰랐고, 알아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최근의 나는 자꾸 거슬린다. 그러면소리로, 글로 부족하나마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리고 행동으로 한 발짝 옮긴다.(물론 늘 그렇지는 않다) 40년의 시간이 축적되어 드디어 나도 의견이라는 것을 갖게 된 것 같다. 마치 씨간장이 숙성되듯 오랜 시간이 걸렸다. 불합리함을 인지하고 표현하고 행동하는 일은 시간 만으로 해결되는 일이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안다. 공부를 하고 아는 것이 생기고 생각을 해야 가능한 일임을 조금씩 느끼고 있다. 거기에 불편함과 두려움을 감수하는 약간의 용기도 필요하다. 존이나 새앙쥐처럼 살아가는 일은 그만큼 자신의 안에 지식을 쌓고 가치관을 정립하기 위해 부단히 도 생각을 해야 가능했던 것이다. 나는 여전히 존이나 새앙쥐처럼 아주 큰 용기까지는 낼 수 없을지라도 태엽쥐의 마음에서 새로운 창으로 한 발을 올렸구나 느낀다.
존은 결국 체제를 바꾸거나 부수지 못한다. 어머니는 이전 체제로 회귀하여 삶을 마감하고, 원래 상태로 돌아가고 싶어 했던 존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러나, '새앙쥐와 태엽쥐'에 등장하는 새앙쥐는 어느 쪽이 옳은 것인지 판단하고, 친구를 자기가 살고 있는 '편안하지는 않지만 자유가 있는 세계'로 데리고 나왔다. 나는 왜 존의 어머니의 자리에서 새앙쥐의 자리로 옮겨 오고 싶은 사람이 되었을까? 우선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새앙쥐들의 이야기를 듣고 행동을 보면 내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행복해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전의 알지 못할 때 느끼는 안일함 속의 행복이나 슬픔과는 조금 결이 다른 감정의 진폭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실상 그렇게 발을 디디면 이전으로 돌아가기는 좀 어렵다. 두 번째는 세상 모든 사람의 건강과 미술학원 선생님을 꿈으로 가진 둘째 아이와, 여유롭게 엄마의 고향집에서 사는 꿈을 꾸는 첫째 아이가 그들의 꿈을 이루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앞으로 두 아이의 꿈은 바뀔 수도 있다. 어떤 꿈이든 그들이 꾸는 꿈이 조금은 비현실 적이었으면 좋겠고, 그래서 더 현실이 되기를 바란다. 자라나는 두 아이를 보면서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그렇게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으며 삶을 평화롭게 꾸려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나는 존의 인생이 조금 더 현실적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새앙쥐들의 힘이 거대한 구조를 바꿀 수 있을까에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레오 니오니의 '새앙쥐와 태엽쥐'를 읽고 있으면 함께 한다면 어찌 되든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새앙쥐도 결국 세상을 바꾸지는 못했다. 개인의 작은 힘이 세상을 바꾸지 못할 것이라는 현타가 지금도 종종 온다. 그러나, 새앙쥐들이 이렇게 조금씩 태엽쥐의 손을 잡아 밖으로 이끌어 낸다면. 그래서 보라색 돌을 주워 친구를 위해 소원을 비는 새앙쥐들이 세상에 발을 디디고 산다면. 세상은 점점 더 좋은 쪽으로 변화하지 않을까 기대하게 된다. 이제껏 수많은 역사에 남겨진 새앙쥐들의 발자취를 보면서 말이다. 내 눈에 보이는 새앙쥐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으므로 지속 가능한 공정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는 믿음으로 나도 힘을 내서 달려 보련다. 그렇게 더 찾아보고 공부하고 행동하면서 태엽쥐도 존도 아닌 새앙쥐가 되고 싶다. 더 나아가 태엽쥐가 보이면 어여쁜 보라색 돌을 건네며 한 발짝 나오는 걸음에 손을 잡아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