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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안 May 08. 2021

청기와주유소 씨름 기담

정세랑 글;최영훈 그림 <소설의 첫 만남 시리즈 13>

그리고 그 구멍에서 신경질이 솟구쳤다.

그냥 신경질이 아니었다. 이십몇 년어치의 신경질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한 번도 신경질을 내 본 적이 없었던 거다. 제대로 신경질을 내 본적이. 나의 무겁고 둥근 몸, 그런 몸을 가지고 신경질을 내면 모두 꼴사납다 여겼으므로, 뚱뚱하고 둔해 보이는 아이가 신경질을 내면, 부모가 키우지 않는 아이가 신경질을 내면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으므로... 내가 먼저 구기고 숨기고 모른 척했던 신경질이었다. 화를 낸 적은 있었어도 신경질을 내 적은 없었다. p.64


화를 내본 적은 있지만 신경질은 일평생 내 본 적이 없는 '나'의 인생 역전 스토리를 다룬 '청기와 주유소 씨름 기담'은 창비에서 나온 '소설의 첫 만남 13번째' 책이다.  책의 내용은 '청기와 주유소', '씨름', '기담'으로 나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인구밀도를 자랑하는 서울에서도 가장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홍대에 자리 잡은 '청기와 주유소'에 한때 '씨름'을 했지만 지금은 그냥 덩치 크고 힘이 센 아르바이트생인 '나'가 있다. 그곳에서 만난 주유소 사장님은 어쩐 일인지 '나'를 좋아하고 챙긴다. 부모님이 없고, 가난에 찌든 '나'는 그런 사장님이 좋지도 싫지도 않지만 함께 다닌다.


그러던 어느 날 사장님은 뜻밖의 제안을 한다. 도깨비와 '청기와 주유소'에서 씨름을 해달라는 제안이다. 나는 나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에 주눅 든 게 아니라 그냥 이렇게 사는 거야라고 생각하며 사는 안쓰러운 주인공의 이야기에 이제 '기담'이 얹히는 순간이다. 낯설고 무섭고, 더러운 도깨비가 나타나면서 조금 당황스러워진다.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짐작할 수 없게 된다. 삶은 언제나 예측불허이지만 이럴 땐 정말 종잡을 수 없다. '나'에게 나를 돌봐주는 할머니가 없었다면 '나'는 도깨비의 존재를 믿으며 씨름에 응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상한 말을 하는 사장님을 믿어서라기 보다는 어쩌면 이 길고 긴 삶의 질곡을 탈출하여 나를 보듬어 주었던 할머니를 더 잘 모실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도깨비와의 씨름'을 하겠다고 한다.


'신경질': 네이버 국어사전                                          

신경이 너무 예민하거나 섬약하여 사소한 일에도 자극되어 곧잘 흥분하는 성질. 또는 그런 상태.

'화'의 검색 결과 : 네이버 국어사전                     

몹시 못마땅하거나 언짢아서 나는 성.


신경질은 어디에서 어떻게 나오는 것일까? 책에서 작가가 말하고 싶은 '신경질'과 '화'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화를 내 본 적은 있지만 신경질을 내본 적은 없다고 '나'는 말한다. 사전을 찾아봐도 작가가 어떤 의도로 두 개의 말을 썼는지 명료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짧은 단편에서 비로소 도깨비를 이기게 되는 신경질이 마음에 걸린다. 그리고 이 문장이 이 이야기의 핵심 같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도깨비에게 지게 될 것 같은 그 순간 나는 신경질이 난다. 그리고, 오래 억눌러 왔던 신경질의 힘으로 도깨비를 이긴다.


예민하고 섬약하게 살 수 없었던 '나'의 삶에 관해 생각한다. 부모님이 없는 상태에서 할머니의 손에 길러진 뚱뚱하고 큰 아이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커서 씨름을 시작했지만 돈이 없어서 제대로 된 훈련을 이어나갈 수 없었고, 결국은 일찍 은퇴한다. 그는 예민하고 섬약하게 '나의 꿈이자 목표였던 씨름을 이제 더 이상 할 수 없어. 너무 마음이 힘들어.' 하면서 앉아 있을 시간이 없다. 당장 먹고살아야 한다. 그러니 자신 안에 있는 예민하고 섬약함을 내비치기보다는 무던해지고 무던해지고 끊임없이 내 안에 있는 감정들을 죽여야 했을 것이다.

 


오래된 이야기를 다시 쓰는 걸 좋아합니다.

어두운 것들은 언제나 도사리고 있겠지만 우리는 단단하고 빛나는 곳을 골라 디딜 수 있을 겁니다.

청기와 주유소 씨름 기담의 작가의 말


하수구에서 올라온 냄새나고 무서운 도깨비와 천둥번개 치는 날의 씨름 한판은 작가가 말하는 '어두운 것들'의 대표 격이다. 주인공 '나'가 업어치기 한 판으로  '단단하고 빛나는 곳'으로 한 발짝 내디딜 수 있었던 지점은 할머니를 위한 절박함, 주유소 사장 도움 그리고 나의 신경질에 있다. 이것들 중에 어느 하나라도 빠진다면 '단단하고 빛나는 곳'으로 나갈 수 없다. 나는 주인공의 신경질이 할머니와 주유소 사장님에게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주유소 사장님은 자신의 이익때문에 이런 일을 벌였을 수도 있지만 주인공에게는 하나의 빛이 되어 주었다. 그래서 나는 여유로운 삶을 살게 된 주인공이 안온한 삶의 영위를 위해 다시 '마음 깊이 신경질을 간직한 힘센 젊은 누군가'를 찾는 장면이 좋았다. 


 '나'의 할머니가 뚱뚱한 나를 귀여운 아기 다루듯 하며 키워낸 것은 '나'만을 위한 것일까? 주유소 사장님이 '나'에게 잘해주고 결국 씨름을 권한 것은 주유소 사장님 자신의 안위 위한 것이기만 했을까? '나'의 씨름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우리는 함께 살아간다. 온전히 나만을 위한 것도, 오로지 타인만을 위한 것도 없다. 내가 행하는 타인을 위한 선의는 어쩌면 결국 나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베풀어진 선의는 되돌려짐으로 올 수도 있고, 그냥 내 마음이 따뜻해지거나 편안해 짐으로 돌아올 수도 있지만 결국 나에게 어떤 좋은 지점이 있기에 행해진다.  나에게 좋은 일이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일이 되어야 '단단하고 빛나는 곳'이 많아질 것이다.  


창비에서 나온 소설 첫 만남은 문학과 멀어지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좋은 단편을 그림과 글을 함께 넣어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소설 첫 만남 시리즈는 이미 만들어진 단편을 편집해서 제작한 것도 있고, 작가에게 청탁하여 이 시리즈만을 위해 써진 것도 있다. '청기와 주유소 씨름 기담'은 소설의 첫 만남 시리즈를 위해 만들어진 새로운 단편이다. 작가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이 책에서 익히 알고 있는 도깨비와 홍대의 주유소를 결합한 기이한 이야기로 무엇을 전하고 싶었을까? 혹시 청소년들에게 신경질을 내면서 살아가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 책을 읽게 될 어른들에게는 그런 청소년들의 신경질이 잘 꽃피도록 나와 타인을 위한 선의를 베풀라고, 그리하여 청소년들이 자라서 다음에 올 청소년들의 신경질 또한 무던히 받아 주라고 말이다.  신경질을 잘 내고 무던히도 받아줄 어른이 존재하는 청소년기를 보낸 아이들은 반짝반짝 빛나는 어른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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