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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안 Jun 05. 2021

끝과 시작 사이의 어디쯤...

재개발을 위해 이전의 아파트가 사라지는 과정을 출근하며 매일 지켜보고 있다. 1985년에 지어진 아파트이다. 작년 겨울 이주를 시작했는지 조금씩 사람이 사는 흔적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봄이 오니 아마도 아파트가 지어질 때 심어 놓은 나무와 풀들이 우거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잘 심지 않는 장미덩굴이 지금은 잘 없는 울타리를 타고 열심히 올라왔다. 날씨가 따뜻해질수록 나무들은 연녹색에서 진녹색을 뗬고, 이제는 아무도 없는 아파트를 가리기 시작했다. 높아야 5층인 아파트는 오래된 나무들에 가려졌다.


지난겨울 이주가 마무리될 때쯤에 늘 추위에 옷을 껴입고 아파트 입구에 계시던 아저씨와 재개발과 이주를 기한이 적혀 있던 플래카드가 사라졌다. 대신 아파트 입구에 있던 상가들에 붉은 라커로 '철거'라는 말이 적혀있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 남아있던 아파트 건물과, 보도블록, 그리고 나무들이 있었다. 4월의 그곳은 오래된 나무들이 관리되지 않아 아파트 울타리를 벗어날 듯 넘치게 아름다웠다. 사람을 위해 시속 30킬로로 다니라고 적혀 있던 표시판 위로 자동차를 위해 제한속도가 시속 50킬로로 바뀌었다.


처음 서울에 올라왔을 때 나는 그 동네를 자주 갔었다. 회사는 서울이면서 집은 그쪽 동네인 사람들이 많았었다. 서울과 경기인데 버스를 타면 금방 가는 것도 신기할 갓 상경한 시절이었다. 잠깐 버스를 일을 하는 사람들과 빌딩이 가득한 동네와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아름드리나무가 가득 찬 아파트가 눈을 돌릴 때마다 보이는 곳이었다. 비슷비슷한 나지막한 아파트가 많았던 그곳에서 과장님은 신혼생활을 시작하고, 아이를 키우셨다.  나무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5층 아파트, 검은색에 가까운 얇은 창틀, 속이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된 유리창을 볼 때마다 과장님 집에 놀러 갔던 기억, 결혼한 직장동료의 집들이를 갔던 기억 같은 것들이 떠오른다.


5월 중순이 되자 나무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빼꼼히 아파트들이 보이더니 잘린 나무들이 보이고, 하루하루 죽어버린 나무들의 색이 누렇게 변했다. 그리고 보인다. 나지막한 아파트들이. 이제 나무들을 다 베었으니, 아파트를 허물고 짓기 위해 내 가림막을 설치할 것이다. 공사가 시작될 것이고, 조만간 새로운 구조물이 가림막 위로 보일 것이다. 그리고 3년쯤 지나면 초고층의 아파트와 최근 유행에 맞춘 조경이 꾸며진 아파트 단지로 바뀔 것이다.


35년이 된 아파트의 모양이나 조경은 20여 년 전에 내가 서울에 처음 왔을 때 곳곳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몇몇 동네만 남아있다. 나의 시작은 시골 단독주택인데, 이상하게 이런 모양의 아파트들에도 정감이 간다. 아마 지금 그곳에서 살았던 분들은 여러 가지로 불편한 부분이 많았겠고, 앞으로 지어질 새로운 주거공간을 기대로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그냥 지나가는 한 사람으로서 빠르게 사라지고 있는 오래된 것에 추억을 묻는다.


새로운 것보다 이전 것들에 마음이 쓰인다. 시작과 끝을 긴 선으로 잇고 다시 끝에서 시작으로 잇고, 또 시작에서 끝으로 이어지는 어떤 길들에 내가 서 있다. 나는 그 길의 어디쯤에 서 있는지 나무가 사라진 아파트의 화단을 보며 차 안에서 생각해본다. 지금은 어떤 줄은 끝에 가까워진 것이 아닌가 싶다. 시작해서 걸어온 이 길의 뒤를 자꾸 돌아보고 아쉬워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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