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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안 Aug 10. 2021

그러니 쉽게 재단하지 말자.

죽이고 싶은 아이(이꽃님:우리 학교:2021)

진실이요? 백번 천 번도 넘게 말했습니다. 전 아니라고요. 아무도 안 믿더라고요. 그때 깨달은 게 하나 있습니다. 세상은 진실을 듣는 게 아니구나. 세상은 듣고 싶은 대로만 듣는구나. p. 142


196페이지의 짧은 이야기. 금세 읽고 나면 처음부터 안 읽은 사람으로 돌아가고 싶어지는 소설이다. 책 띄지의 '먼저 읽은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에서 '이 책을 안 읽었을 때로 돌아가 다시 한번 읽고 싶다.'라는 말이 나온다. 무언가를 추리하는 이야기를 다룬다면 이 정도의 속도감과 숨겨진 단서들이 주어져야 한다. 그리고 '어', '뭐라고?', '설마', '진짜?'라는 반응이 계속 나오게 해야 한다. 이 책은 그런 힘을 가졌다.


목차는 없다. 그런데 목차처럼 계속해서 장이 나뉜다. 나눠진 장은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17세 소녀를 본 사람의 언론 인터뷰와 주변인의 생각으로 이루어진다. 소녀의 이름은 '지주연'이다. 주연이를 본 사람이라 함은 주연이의 학교 친구, 학원 친구, 담임선생님 등이다. 주연이의 주변인은 주연이의 엄마, 아빠, 변호사 그리고 주연이 자신을 말한다. 본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억 속에 있는 주연이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주변인들도 이 상황을 이해하고 자기 합리화를 위해 끊임없이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여 생각을 정리해 나간다.


이 소설은 진실과 믿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종종 진실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진실은 사실 그대로인 것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지는 것인지. 이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작가의 말 중에서)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가 '요즘 육아 금쪽같은 내 새끼'를 보게 되었다. 엄청난 아이가 등장해서 엄마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중간중간에 오은영 박사님이 아이의 입장에서 변호해 주었지만 패널들은 냉정했다. 아이가 어떻게 저럴 수 있냐며 희생적인 엄마를 안쓰러워하고 그런 엄마를 부려먹는 아이를 보며 한탄 섞인 한숨을 내 쉬었다. 그러다가 아이 돌봄에 지친 엄마의 자살시도를 직접 목격했었다는 마지막 반전에 패널들은 깜짝 놀라며 급격하게 아이의 편으로 돌아섰다. 그 이후로 엄마가 죽을까 봐 두려워 다양한 방법으로 엄마에게 집착한다는 것으로 아이의 이야기는 끝났다. 패널들은 눈물을 훔치며 질타했던 것을 미안해했다.


나도 시청하면서 처음에는 아이의 행동에 엄마를 안쓰러워하기도 하고, 아이의 모습에 같이 화도 냈던 것 같다. 영상 시청 중 오은영 박사님의 아이에 관한 진단에 같이 맞장구를 치기도 했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이가 안쓰러웠고,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면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게 되어 마음이 놓였다.  프로그램의 말미에는 아이의 외상 후 스트레스(PTSD)를 치료하는 엄마와 아이의 모습이 나오며 모든 것이 마무리된 것처럼 프로그램이 끝났다.


그런데 나는 엄마가 자꾸 걸렸다. 앞부분에 영상을 보며 오은영 박사님과 엄마가 한 이야기들을 종합해보면 아이는 엄마의 자살시도 이전부터 이런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엄마는 힘들었다. 그런 문제들이 모여 엄마는 자살시도를 했던 것이다. 프로그램이 아이를 치료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니 아이의 문제만 흐뭇하게 마무리되면 되는 것일까?  아이에게 상처 받은 엄마가 마지막에 아이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되어버리고, 아이의 치료를 적극적으로 하며 다시 자신을 희생하고 있는 모습으로 끝나면 되는 것인가? 화장실 갔다가 마무리가 덜 된 것처럼 나는 찝찝했다.  순식간에 엄마의 힘듬이 묻혀버리는 방송의 흐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상 관찰 예능, SNS, 내가 지금 쓰고 있는 브런치에 기록하는 나의 이야기 들은 그 사람의 안과 밖에 있는 아주 작은 부분이다. 게다가 어떤 피드백이 주어지면 내가 생각했던 나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보는 사람들은 그 모습 그대로 본다. 그리고 나의 경험에 비추어 마음대로 해석하고 정리하여 머릿속에 저장한다. '금쪽같은 내 새끼'에서 내가 엄마에게 집중한 이유는 예민한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엄마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날 그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행복한 결말로 넘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책을 다 읽고 남편에게 이 책을 권했다.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남편이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큰 딸이 책의 내용을 궁금해한다.

"어느 날 아침 학교 뒤쪽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쓰레기 소각장에서 죽은 학생이 발견되었어. 그 아이를 죽인 범인으로 그 아이의 베프가 지목된 거야. 아이가 죽은 건 벽돌에 맞아서 인데 그 벽돌에는 온통 아이의 베프의 지문이 묻어 있었거든."

"엄마 그래서 범인은 누구야? 아니야 나도 이 책 읽어 볼래. 아니다 엄마 범인 알려줘 궁금해."

"이 책이 영화가 되기로 결정되었데. 영화로 나오면 그때 확인해."

"아니야 알려줘 엄마."

"음... 범인은 OOO이야. 이제 됐지. 그런데 범인 말고 이 이야기에 또 다른 반전이 있어."

"엄마 뭔데 뭔데..."

"그건 나중에 네가 직접 확인해야 해."

그리고 절대 알려주지 않았더니 너무 답답했던 아이가 책의 마지막 장을 읽었다. 그러더니 이게 무슨 반전이냐 묻는다. 그래서 말해주었다. "엄마는 이게 진짜 반전이라고 생각해. 그건 책을 처음부터 읽어야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거야."라고. 아마도 책을 읽는 사람마다 반전이 무엇인지를 다르게 바라볼 것 같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을 보고 경험할 수 없다. 설사 모든 것을 보고 경험한다고 해도 받아들이는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죽이고 싶은 아이'를 읽으며 '감기에 걸린 물고기(박정섭)', '처음엔 사소했던 일(왕슈 펀)'이 떠올랐다. '금쪽같은 내 새끼'를 보면서는 '죽이고 싶은 아이'가 떠올랐다. 이건 그냥 내가 떠올린 생각들일뿐이다.  내가 왜 이런 것들을 떠올렸냐고 하면 '죽이고 싶은 아이'가 방송, 겉으로 보이는 소문과 이야기가 과장되어 기정사실화 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지금은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몇 년 뒤에 비슷한 이야기를 물어본다면, 아니 한 달만 지나고 물어본다 해도 나는 전혀 다른 대답을 할 수도 있다. 누구도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다. 그러니 쉽게 재단하지 말자. 나 자신조차도.


하느님은 지주연이 한 말 믿으셨어요? 전 그게 진짜 궁금해요. p. 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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