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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ly May 30. 2023

술라 - 토니 모리슨



바텀(bottom: ‘바닥’, 혹은 ‘저지대’라는 뜻)이라고 부르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그 마을이 바텀이 된 까닭은 다음과 같았다. 한 백인 농부가 흑인 노예에게 아주 힘든 일을 시켰다. 그 일을 해내면 저지대의 비옥한 땅 한 뙈기를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노예가 그 일을 정말 해내자 백인 농부는 비옥한 땅을 주기가 싫어졌다. 그래서 그는 언덕 위 높은 곳의 척박한 땅을 주겠다고 말했다. 노예가 거기는 저지대가 아니라 언덕이 아니냐고 묻자 주인이 대꾸했다. ‘하지만 하느님이 내려다보실 때는 저기가 바닥이라고. 그래서 우리가 바텀이라고 부르는 거야. 천국의 바닥이란 뜻이지. 그러니까 최고 좋은 땅이다 이 말이야.’ 그래서 노예는 주인에게 그 땅을 달라고 간청했다. 거기에 씨를 뿌리는 일은 등골이 휘는 중노동이었다. 흙이 자꾸 흘러내리고 씨앗이 씻겨나갔다. 겨울에는 내내 바람이 몰아쳤다. 백인들은 오하이오 주 그 작은 강가 타운의 비옥한 골짜기에 살고, 흑인들은 매일 그 위 언덕배기에서 문자 그대로 백인들을 내려다볼 수 있다는 사실에 작으나마 위안을 얻으며 살았다.

보텀이라고 불리던 그 마을에는 섀드랙이라는 정신이 좀 이상한 젊은이가 살았다. 1차대전에 참전했다가 마을로 돌아온 청년이었다.     


‘갓 스물이 된 젊은이 섀드랙은 1917년 12월 프랑스에서 전우들과 들판을 달리고 있었다. (...)

발에 느껴지는 통증에 움찔하면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약간 돌려보니 옆에 있던 한 군인의 얼굴이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그가 미처 충격을 제대로 느끼기도 전에 군인의 나머지 머리 부분이 뒤집힌 수프 그릇 같은 철모 아래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머리를 잃은 군인의 몸통은 뇌로부터 명령을 받지 않고서도 고집스럽게 계속 달렸다. 힘차고도 우아하게, 등으로 흘러내리는 뇌 조직 따위는 싹 무시한 채. 

그를 두렵게 하는 것은 죽음도, 죽어가는 것도 아니라 그 둘의 예측 불가능성이었다. 그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던 중 그는 일 년 중 하루를 죽음에 바친다면 모두가 죽음을 제쳐놓고 나머지 날들은 안전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 식으로 그는 전국자살일을 제정했다. 새해의 사흘째 되는 날, 그는 소 방울과 교수형 집행인의 밧줄을 든 채 사람들을 불러모으며 카펜터즈 로드를 따라 보텀을 돌아다녔다. 사람들에게 오늘이 자살을 하거나 서로를 죽일 유일한 기회라고 말하면서.‘     


섀드랙의 마을, 보텀에는 술라와 넬이라는 어린 소녀들이 살았다. 술라는 아버지 없이 외할머니,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고 넬은 아버지, 어머니가 둘 다 있었다. 넬의 어머니 헐린은 결혼으로 안정된 사회적 지위를 얻은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자기 딸 역시 사회가 관습적으로 기대하는 것 이외의 것을 꿈꾸지 않도록 길들였다.     


술라와 넬이 열두 살이 되던 해, 술라는 어머니 해나가 친구들과 나누고 있던 대화를 엿들었다. 해나의 친구는 해나에게 자기가 딸에게 느끼는 감정이 애정인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해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당연히 애정이지. 넌 그애를 사랑해, 내가 술라를 사랑하듯이. 난 술라를 좋아하지 않을 뿐이야. 그게 차이지.”

술라는 날아갈 듯이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창가에 서서 눈이 따끔거리는 것을 느끼며 커튼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다가 넬이 창 너머로 부르는 소리를 듣고 밝고 뜨거운 대낮의 햇빛 속으로 나갔다. 술라는 넬과 함께 달려 잔디밭에 드러누워 땅을 파며 놀았다. 치킨 리틀이라는 꼬마가 강둑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술라는 치킨 리틀과 장난을 치느라 그의 손을 잡고 허공에다 빙빙 돌렸다. 그러다 손을 놓치면서 치킨 리틀은 그대로 강물 속으로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술라와 넬은 아이가 깔깔거리며 다시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치킨 리틀은 그대로 물속으로 가라앉은 채 떠오르지 않았다. 누군가 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넬이 말했다. 강둑 근처에 있는 집이라고는 섀드랙의 오두막뿐이었다. 술라는 공포에 질려 섀드랙의 집으로 달려갔다. 술라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섀드랙은 마치 질문에 답하기라도 하듯 “언제나.”라고 대답했다.     


넬과 술라는 자라서 어른이 되었다. 넬은 자기 어머니처럼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렸다. 술라는 마을을 떠났다가 십 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 술라는 결혼도 하지 않았고 마을의 유부남들과 돌아가며 자는 등 기행을 일삼았다. 술라가 넬의 남편 주드하고까지 불륜을 저지르자 둘의 관계도 파탄이 났다. 주드는 이 사건 때문에 수치심을 느끼고 넬과 가정을 버리고 떠나버렸다. 혼자 세 아이를 부양하며 살아가느라 넬은 신세가 고단해졌다. 절친한 친구였던 술라의 배신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입은 넬은 회색 공이 떠다니는 것 같은 환영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볼 수가 없어도 그것이 어떤 형상인지는 정확히 알 수 있었다. 회색의 공이 바로 거기에 떠 있었다. 바로 거기. 오른쪽에. 회색의 지저분한 것이, 조용하게, 진흙투성이의 끈을 뭉쳐 만들었지만 무게가 없고 솜털로 뒤덮였지만 악의를 품은 끔찍한 공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 공을 쳐다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눈을 감고 지나쳐 욕실 밖으로 기어나와 등뒤에서 문을 닫았다. 공을 보게 되는 것, 그것이 무서운 점이었다. 공이 그녀에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절대 그러지 않았고 그녀를 덮치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보고 싶으면 보라고, 세상에, 만지고 싶으면 만지라고 그 자리에 떠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보고 싶지 않았다. 만약 보게 된다면, 정말로 그것을 건드리게 될지, 아니면 건드려보고 싶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정말로 정말로 손을 뻗어서 그것을 만져본다면 어떻게 될까?’     


술라는 인습을 벗어난 행동을 거듭한 끝에 마을 사람들에게 찍히고 배척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에이잭스라는 남자를 사랑하게 되지만 그도 떠나고 병에 걸려 혼자 비참하게 죽어간다. 넬은 술라를 미워하면서도 한때 알고 지냈던 사람이 혼자 앓고 있는 것을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일종의 도덕적 책임감 때문에 술라를 돌봐주러 간다.     


“다 네 마음대로 할 수는 없어, 술라.“ 넬은 술라의 오만함에, 죽음의 문턱에 누워 있으면서도 여전히 잘난 척하며 말하는 태도에 점점 화가 났다.

”어째서? 난 다 마음대로 할 수 있어. 왜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넌 여자고, 그것도 흑인 여자야. 남자처럼 행동할 수는 없다고. 독립적인 사람처럼 나돌아다닐 수도 없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갖고 싶다고 다 갖고, 필요 없다고 다 버릴 수 없어.“

(...)

”내가 그렇게 살지 않는다고 해서 네 삶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줄 아니? 이 나라 흑인 여자들이 어떻게 사는지는 나도 알아.“

”어떻게 사는데?“

”죽어가고 있지. 바로 너처럼 말이야. 하지만 차이가 있다면 그 여자들은 그루터기처럼 죽어간다는 거야. 나, 나는 저 미국삼나무 중 하나처럼 쓰러지고 있고. 나는 정말로 이 세상에서 살아봤어,“

(...)     


그 뒤 넬은 다시는 술라에게 가지 않았다. 머지 않아 술라는 죽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든 넬은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주드가 아니라 말이 통하는 유일한 존재였던 술라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마을의 검은 양인 술라와 달리 모범적인 삶을 살았던 넬이 술라와 어린 시절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넬도 사실은 술라와 비슷한 생각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넬은 그런 생각들을 실행에 옮길 용기가 없었다.     


술라는 누구의 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남들의 평판은 물론이고 미래를 위한 계획 같은 것도 전혀 세우지 않았다.     


그것은 완전한 방종과 무절제의 세계, 그 순간의 감정에만 충실한 세계다. 그런데 이 세계는 당연히, 완전히 고독한 세계인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계급 상승의 사다리가 끊어진 상황에서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포기하고 초식적인 삶을 택하는 것처럼 술라는 사회적인 삶을 굳이 갈망하지 않고 고독 속에 침잠한다.     


‘폭풍처럼 거칠게 휘몰아치는 그 모든 환희의 한가운데에 슬픔의 눈이 있었다. 그 침묵의 한가운데에는 영원이 아니라 시간의 죽음이 있었고, 너무나 심오해 단어 자체가 그 의미를 잃는 고독이 있었다. 고독은 다른 사람의 부재를 가정하는 것인데, 그 절망적인 영역에서 그녀가 발견한 고독은 결코 다른 사람들의 가능성을 인정한 적이 없었던 터였다. (...) ‘그녀가 스스로를 만나고, 스스로를 환영하고, 비할 데 없는 조화 속에서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되는, 관계 후의 혼자만의 상태에 빠지게 해주기를.’     


마을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고 병에 걸려 비참하게 죽어가면서 술라는 혼자 생각한다.     


‘네 개의 나무판자를 대고 그 위를 가로지르며 비스듬히 쇠막대를 댄 것을 바라보는 일이 그녀에게 있는 유일한 평화였다. 막힌 창문은 그 견고한 종국, 난공불락의 최후로 그녀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마치 처음으로 완전히, 정신을 딴 데 팔 가능성이 전혀 없이, 혼자가 된 것 같았다. 그녀가 항상 원했던 상태였다. 

(...)

언제나. 누가 그 말을 했더라? 힘겹게 생각해내려 애썼다.’      


한편 전쟁을 통해 죽음보다도 그 예측 불가능성에 압도당한 섀드랙은 인간의 삶이 본질적으로 모순됨을 깨닫고 있었다. 자신이 처음 공포에 질렸을 때를 기억하며 섀드랙은 언제나, 라고 술라에게 말했다. 피부가 벗겨져나가고, 피가 뚝뚝 떨어져 흘러내리고, 그 밑의 뼈가 드러나는 변화라도 변화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라고, 그는 그녀에게 영원성을 납득시키고, 안심시켜주려고 ‘언제나’라고 말한다.


예측 불가능성과 고독함은 처음에는 부정적이고 고통스러운 상태다. 술라는 나름대로 그와 같은 고통스러운 상황을 승화시키려고 노력한 끝에 부조리한 삶의 조건을 수동적인 실패에서 능동적인 승리로 바꾸어낸다.     

‘그녀가 자신의 몸과 보조를 맞추기를 그만두고 행위에 자신을 내세우기 시작하자, 광대한 자력의 중앙으로 끌려와 그 무엇으로도 깨뜨릴 수 없을 것 같아 보이는 단단한 무리를 형성하는 쇠부스러기들처럼, 힘의 입자들이 그녀 안에서 모여들었다. 누군가의 몸 밑에 항복하는 자세로 누운 채 자신의 변치 않는 강인함과 끝없는 힘을 느끼는 데에는 극도의 아이러니와 격분이 있었다.’     


이런 태도는 술라의 할머니 에바 피스가 자신의 남편이었던 보이보이에 대한 증오심을 삶에 대한 투지로 바꾸어버린 것과 비슷하다. 보이보이는 그들의 세 아이가 아직 꼬마일 때 가정을 버리고 도망쳤는데 에바는 아직 갓난아기였던 막내아들을 비롯하여 세 자식을 먹여 살릴 방법이 없었다. 겨울이었고, 백인들도 일자리가 부족했던 시절이었다. 에바는 궁여지책으로 기차 선로에 한쪽 다리를 집어넣어 다리를 완전히 뭉개버린다. 사고 보험금으로 세 아이를 부양할 수 있게 되자 부자가 된 남편 보이보이가 새 여자친구를 데리고 에바의 집을 찾아온다. 이때 에바는 증오심이 새록새록 싹 트는 것을 다소 관조적인 시선에서 즐겁게 바라본다. 증오심이 자신을 계속 살아가게 만들어 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들은 차마 들여다보기 힘든 심연을 감히 마주할 용기를 가졌다는 이유로, 그들처럼 나약하지 않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술라를 배척하고 미워한다. 에바는 자신의 하숙집에 여러 명의 부랑자들을 거두어들였는데 그 중에 타르 베이비라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아무도 귀찮게 하지 않고 오로지 술만 마시며 단절된 삶을 살았다. 마을 사람들 중 누구도 그에게 다시 삶을 시작해봐야 한다고 권하지 못했다. 폐인이 된 그대로의 삶을 받아들이는 관용을 베풀면서도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약간의 경멸을 느꼈다. 소설 속에 묘사된 대로 ‘그렇게 심각한 사람을 참아줄 인내심이 그들에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섀드랙은 술라가 죽은 이듬해, 바텀에 일어난 여러 가지 변화에 동요되어 다시 한 번 자살 경축일 퍼레이드에 나선다. 이때 타르 베이비도 그를 따라 나섰다가 공사 중인 터널의 지반이 무너지면서 죽음을 맞게 된다. 한때 강을 가로지르는 터널 공사에 많은 인부들이 고용되리라는 희소식이 전해졌으나 결국 백인들만 고용되고 말았던 것이다. 혁명적인 삶을 살다간 술라의 간접적인 영향 때문인지, 몇몇 마을 사람들은 자살경축일 행렬을 따라나섰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흥분과 환희에 휩싸인 사람들은 터널 공사장 입구에서 목재와 벽돌, 지보와 햇빛을 받아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얼음 아래 철사로 엉성하게 만든 문을 보았다. 처음에 그들은 그 모습에 눈이 부셔서 갑자기 조용해졌다. 눈을 반쯤 뜬 채 1927년부터 희망을 걸었던 장소를 바라보았다. 한때 존재했던 희망은 이제 말라죽은 고엽과도 같았다. 치료하지 못한 치아, 갚지 못한 석탄 외상값, 방치한 가슴 통증, 사지 못한 학생용 신발, 속을 대충 채운 매트리스, 망가진 변기, 기울어가는 포치, 고용주들의 알아듣기 힘든 말들과 믿기 어려울 만큼 유치한 악의. 그 모든 것들이 타오르는 햇빛을 받아 급속히 물로 변해가는 얼음 속에 있었다.

사람들은 영양처럼 그 작은 문을 뛰어넘었다. 철사로 엮은 바리케이드는 애초에 개와 토끼, 길 잃은 아이들 정도나 막으려던 것이었다. 거친 사람들, 분노한 이들, 젊은이들의 뒤를 따르며 그들은 긴 목재와 가느다란 지보를 집어들었고, 그들이 결코 가마에 구울 일이 없을 벽돌을 부수고, 그들이 섞어보기는커녕 끌도록 허락받아본 적도 없는 석회석 부대를 찢고, 철망을 찢고, 외바퀴 수레를 뒤집고, 널빤지를 둑 아래로 굴렸다. 그것들은 얼어붙은 강을 타고 멀리 떠내려갔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절름발이건 멀쩡하건,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힘껏 그들이 건설하는 걸 금지당했던 터널을 죽였다.’


한편 술라와는 반대로 어떠한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온 넬은, 사실 술라의 대척점에 있다기보다는 술라를 이해할 만한 지성을 가지고 있고, 비슷한 욕망을 품고 있다. 다만 오래 억눌려온 탓에 술라만큼 용기 있게 진실을 추구할 수가 없는 것이다. 넬이 또렷이 인지하고 있었던 절대고독은 회색 공의 형상을 하고 그녀의 주위를 떠돌고 있다. 넬은 오랫동안 공을 바라보기를 피해 왔었다. 술라가 주드와 바람을 피웠을 때, 넬은 울음소리를 내보려 했으나 목이 막혀 어떠한 절규도 나오지 않았다.      


‘넬은 작고 밝은 욕실에 웅크리고 앉아 기다렸다. 가장 오래된 울음을 기다렸다. 타인을 위해서가 아닌, 불타버린 아이나 죽은 아비를 동정해서가 아닌, 자기 자신만의 고통을 위한 끔찍이도 개인적인 울음을. 요란하고 귀에 거슬리는 거친 울음을. ”왜 나야?“ 그녀는 기다렸다. 진흙이 들썩이고, 이파리들이 흔들리고, 농익은 초록 것들의 냄새가 그녀를 감싸 그녀 자신만의 울부짖음이 시작될 것임을 알렸다.

그러나 울음은 나오지 않았다.

냄새가 흩어져 사라졌다. 이파리들은 그대로 있었고 진흙은 잠잠해졌다. 그녀의 목구멍에 뭔가 마르고 끔찍한 것의 조각만 남았을 뿐, 결국 아무것도 없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자신이 진정 그리워한 사람이 누구도 아닌 술라였다는 깨달았을 때에야 넬은 울부짖었다. 그리고 그 회색 공과 마주하게 된다.     


‘크고 긴, 멋진 울부짖음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바닥도 없고 꼭대기도 없고, 그저 원을 그리며 돌고 또 도는 슬픔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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