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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ly May 31. 2023

빌러비드 - 토니 모리슨

영화 <빌러비드> 중에서



영어로 글래머(glamour)라는 단어는 ‘화려함, 매력’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굴곡 있는 몸매를 묘사할 때 사용하기도 한다. 사실 굴곡이 뚜렷한 몸매와 화려함, 매력이라는 단어는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허리가 가늘면 가슴과 엉덩이도 작은 경우가 많고 허리에 살집이 있으면 가슴과 엉덩이도 풍만한 경향이 있다. 전자에 해당하는 몸은 신진대사가 활발한 젊은 몸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아직 어린아이이거나 미성숙한 상태일 수도 있다. 후자는 충분히 무르익었지만 나이가 들었거나 여러 가지 신체 기능이 떨어져 있을 가능성도 높다. 굴곡이 분명한 몸은 이 둘의 장점만 갖춘 상태이므로 매럭적이고, 과시적이다. 폭발적인 고음으로 노래 부르는 새들처럼, 글래머러스한 몸은 자신의 건강함과 힘을 강조하고 있다.     


흑인들의 음악과 문학, 그들 고유의 표현방식을 접할 때면 글래머라는 단어가 떠오를 때가 있다. 흑인 음악 장르 중에 하나를 소울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일본 작가 오쿠다 히데오는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었다. 군중심리에 피상적으로 휩쓸리며 로봇처럼 유전자의 노예로 살아가는 생존 기계들. 그런 와중에 노래 속에 다채로운 감정을 실어 표현하는 소울을 들으면 스스로 몸의 주체로 우뚝 올라선 ’영혼‘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흑인 여성 작가 토니 모리슨의 문체에서도 그런 힘이 느껴지는데 캐나다의 여류 작가 마거릿 앳우드는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를 읽고 서평으로 ‘승리(triumph)’라는 한 단어만을 남겼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인류의 승리라는 뜻이다. 너무 고통스러워 발설할 수 없었던 역사의 진실을 한 문장 한 문장 공을 들여 시적이고 새로운 언어로 표현해낸 영혼의 승리. 빌러비드를 처음 읽었을 때 내 머릿속에서도 승리라는 한 단어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마거릿 앳우드의 서평을 보고 전율을 느꼈었다. 책의 주제는 차치하고서라도 문체가 너무도 풍요로워서 ‘글래머’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책 제목 빌러비드는 ‘사랑받은’이라는 뜻이다. 로마서 9.25의 “내 백성이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내가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내가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에 나오는 단어로 보통은 묘비 비석에 새기는 단어다.   

   

빌러비드. 마땅히 사랑받아야 하지만 사랑받지 못했던 사람들. 이 책의 첫 페이지에는 ‘육천만 명, 그리고 그 이상’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육천만 그리고 그 이상의 억울한 죽음을 맞은 흑인들을 애도하는 문구다. 이 소설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존엄성을 짓밟히고 묘지도 없이 차디찬 땅속에 묻혀서 원혼으로 떠돌고 있을 모든 흑인들에 대한 애도의 굿판이다. 책에 나오는 흑인들의 삶은 너무도 끔찍해서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물론 토니 모리슨은 방대한 역사적 자료를 기반으로 이 소설을 집필했다고 밝혔다. 원래 현실이 영화나 소설보다 더 잔혹한 법이다. 소설의 등장인물인 베이비 석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나라에 죽은 검둥이의 한이 서까래까지 그득그득 쌓이지 않은 집은 한 채도 없다. 그나마 아기 귀신이라 다행인 게야. 난 여덟이나 낳았는데 죄다 내 곁을 떠났다. 넷은 빼앗기고, 넷은 달아났지. 아마 그것들 모두 누군가의 집에 들러붙어 생지옥을 만들고 있을 게다.”      


‘베이비 석스의 인생에서 남자와 여자는 체스판의 말처럼 이리저리 옮겨졌다. 베이비 석스가 사랑했던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그저 알고 지낸 사람까지도 죄다 도망치거나 교수형을 당하지 않으면 다른 집에서 빌려가거나 임대되거나 팔려가거나 다시 사오거나 비축되거나 저당잡히거나 상으로 주어지거나 도난 당하거나 잡혀갔다. 결국 베이비는 자식이 여덟 명이었고 아이 아버지가 여섯 명이었다.’     


당시 농장에서는 주인들이 노예들을 교미시키고 자손을 받아낸 뒤 다른 농장에 팔아버리곤 했다. 노예들은 가족을 이룰 권리가 없었다. 그러다 가너씨네 스위트홈에 팔려오고 난 뒤 베이비 석스는 처음으로 아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     


베이비 석스의 며느리인 세서는 자신의 어머니가 누구인지 몰랐다. 농장 노예들의 유모 역할을 하던 낸이라는 여자가 세서의 어머니는 들일을 하는 흑인들 중 한 명이라는 얘기를 들려주었을 뿐이었다. 들일을 하던 세서의 어머니가 어느 날 세서를 몰래 불렀다. 옷을 걷어 올리고 가슴 밑 뼈 바로 위에 있는 동그라미와 십자가 낙인을 보여주었다. “이 표시가 찍힌 사람은 이제 나밖에 없어. 나머지는 다 죽었다. 그러니 엄마한테 무슨 일이 생겼는데 엄마 얼굴을 못 알아보겠거든, 이 표시로 날 찾으렴.” 세월이 흐른 뒤 어머니는 다른 흑인들과 같이 교수형을 당했다. 사람들이 줄을 자르고 어머니를 밑으로 내리고 나서야 동그라미와 십자가 표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처녀가 된 세서는 스위트홈으로 팔려가서 세서의 아들인 핼리와 결혼하게 되었다.      


가너씨가 죽고 나서부터 스위트홈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가너 부인이 여동생의 남편인 학교 선생과 그 조카들을 새 농장주로 데려오고 난 뒤부터였다. 견딜 수 없을 만큼 가혹한 일들이 벌어지자 노예들은 농장을 탈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탈출 도중 노예 식소는 산채로 화형에 처해졌고 입에 재갈이 물려졌다. 노예 중 한 명인 폴디는 재갈이 물려진 순간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어른 남자나 남자아이들, 어린 계집애들, 여자들 할 것 없이. 입술이 뒤로 확 당겨지는 순간, 두 눈에서 사나운 빛이 솟구쳐올랐다. 재갈을 벗고 며칠이 지나도, 거위 기름을 입꼬리에 문지르며 온갖 방법을 다 써봐도 혀의 통증은 가라앉지 않았고 사나운 눈빛도 사라지지 않았다.‘ 폴디는 스위트홈에서 키우던 수탉이 재갈을 문 자신을 보고 히죽 웃는 것 같았다고 고백한다. ’저 수탉조차 자기가 타고난 대로 살아가는 게 허락되지만 나는 타고난 대로 살아가는 게 허락되지 않았‘으며 ’설령 그 수탉을 잡아먹는다 해도 그저 미스터란 이름의 수탉을 요리하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나는 죽든 살든 두 번 다시 폴디가 될 수 없다‘. 같은 인간에게 짐승처럼 재갈을 물린 경험은 사람의 영혼을 망가뜨리는 일이었다. 죽는 것보다 영혼이 망가지는 게 더 무서운 법이다. 세서 역시 자기 어머니가 재갈을 너무 많이 물어서 웃지 않을 때도 조커처럼 미소짓는 얼굴이 되어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한 번도 어머니의 진짜 미소를 볼 수가 없었다.     


한편 탈출하려던 날 세서는 채찍으로 얻어맞아서 살갗의 신경이 다 죽어버렸다. 등에는 오래된 나무 모양의 흉터가 생겼다. 만삭인 데다 얻어맞아서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걷고 또 걸어 발과 다리가 꼬이고 부었고 일 초도 더는 걸을 수가 없었다. 그때 소유주에게 쫓기고 있던 백인 소녀 에이미 덴버를 만나 그녀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세서는 시어머니가 살고 있는 집까지 와서 무사히 아이를 낳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 선생이 보안관, 조카들과 함께 들이닥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이제 막 기어다니기 시작한 딸을 날카로운 송곳으로 찔러 죽였다. 자기 자식들이 자유를 잃고 동물 취급을 받으며 노예 생활을 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뒤에 그녀도 따라 죽을 참이었으나 흑인은 인간이 아니라는 당시의 법 조항 덕분에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에게는 살인죄가 적용되지 않았고 곧바로 석방되었다. 세서는 자기가 죽인 딸을 묘지에 묻고 비석을 새겼다. 비문 새기는 사람에게 줄 돈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자기가 죽이려다 실패한 아들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비석 새기는 사람에게 몸을 팔았다. 그 대가로 ‘빌러비드-사랑받은’이라는 한 단어를 새길 수 있었다. 그녀는 십 분만 더 몸을 허락했다면 ‘사랑받은’ 앞에 ‘참으로’라는 글자라도 새길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편 폴디는 스위트홈을 도망쳤다가 수용소에 붙잡히게 되었다. 3백 미터 대지에 나무 궤짝이 딱 맞게 들어가도록 깊이 1.5미터 너비 1.5미터로 파놓은 구덩이가 그들의 감옥이었다. 모두가 지하에서 잠을 잤고 46명의 흑인이 서로 사슬에 묶인 채 오직 돌을 깨기 위해서만 햇빛 속으로 기어나오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들은 사슬에 묶인 채 오줌을 누고, 먹고, 망치를 휘둘렀다. 그들은 모두 허리를 숙이고 기다렸다. 첫 번째 죄수가 사슬 끝을 집어 들어 발목에 찬 족쇄 고리에 끼운 다음, 허리를 펴고 발을 끌어 사슬 끝을 다음 죄수에게 전달했다. 그러면 그 죄수도 똑같이 했다. 마침내 사슬이 끝까지 전달되고 모든 죄수가 옆 사람 자리에 서고 나면, 한 줄로 선 죄수들은 뒤돌아서서 자기들이 나온 궤짝을 마주보았다. 모두가 무릎을 꿇은 자세로 있으면 간수들은 죄수들에게 자기 성기를 내밀며 구강성교를 강요했다. 무릎을 꿇은 죄수들 중에는 간혹 간수의 포피를 물어뜯어 예수님께 가져가는 대가로 머리에 총알이 박히는 쪽을 선택하는 이도 있었다. 그때 폴디는 그런 일은 몰랐다. 그는 간수의 냄새를 맡으며, 비둘기 울음소리 같이 꾸르륵거리는 간수의 낮은 신음을 들으며, 자신의 떨리는 두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인생은 수치를 모른다고 노래했다.     


그들은 모두 묶여 있었기 때문에 누구 하나가 무모하게 탈옥을 시도하면 46명 전원이 함께 사슬에 묶여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어느 비 오는 날 제일 처음 일을 시작하는 하이맨이 도주를 주도했다. 마흔여섯 명이 다리가 꼬이는 법도 없이 일심 단결해서 산으로 도주했다. 그 산에는 대량 학살을 당하고도 고집을 꺾지 않은 체로키 인디언들이 오클라호마로 강제 이주를 당하는 대신 도망자로 숨어들어와 살고 있었다. 이 인디언들은 흑인들을 돌봐주고 숨겨 주었다. 이때부터 폴디는 자유가 되어 이곳저곳을 떠돌다 우연히 거리에서 세서와 다시 마주치게 되었다.      


그때 세서는 죽은 딸의 언니인 막내딸 덴버와 둘이서 쓸쓸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시어머니 베이비 석스는 노환으로 죽었고(그러나 노환으로 죽기 전에 이미 영혼이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두 아들은 조금 자라자마자 죽은 막내동생의 원혼이 온갖 장난을 쳐대는 124번지에서 멀리멀리 도망쳐버렸다. 병아리콩이 가득한 주전자가 마룻바닥에 엎어져 김이 모락모락나고 있다거나, 소다크래커가 바스러져 문지방을 따라 한 줄로 뿌려져 있다거나 하는 짓거리를 더는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쳐다보기만 했는데도 거울이 산산 조각나고 케이크에 조막 막한 손자국이 찍혀 있었다. 폴디는 그 124번지에서 그들 모녀와 같이 살게 되었다. 덴버와 세서와 셋이서 처음으로 서커스를 구경하고 온 날 집에 돌아와 보니, 계단 앞에 한 흑인 처녀가 쓰러져 있었다. 그 처녀는 자기 이름이 빌러비드라고 말했다. 그녀의 지적 상태는 백치나 다름없었고 온전한 문장을 구사하지 못하고 단어만 한두 마디 말할 수 있는 것이 어린아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때껏 폴디는 ‘전쟁 중이나 전쟁 전후에 완전히 넋이 나가고, 지독히 굶주리고, 혹은 지치고 모든 걸 빼앗겨서 무엇을 기억하고 말하는 것조차 기적인 흑인들’을 많이 보았다. ‘자신처럼 그들도 동굴 속에 숨어 지냈고 먹을 걸 두고 올빼미와 싸웠다. 자신처럼 그들도 돼지 먹이를 훔쳐 오고, 낮이면 나무 위에서 자고 밤이면 하염없이 걸었다. 그리고 자신처럼 단속반과 수색대와 순찰대, 퇴역 군인, 산골 주민, 민병대, 흥에 들떠 노는 사람들을 피해 진흙탕에 몸을 파묻고 우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한번은 숲속에서 혼자 사는 열네 살 짜리 흑인 아이를 만났는데, 그 아이는 다른 곳에서 살았던 기억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또 한 번은 정신 나간 흑인 여자가 오리를 자기 아기들이라고 믿고 훔친 죄로 감옥에 갔다가 교수형을 당하는 꼴도 보았다. 또한 세서가 본 사람들 중에도 베이비 석스의 친구, 보닛을 쓰고 음식을 만들며 눈물을 쏟던 젊은 여자처럼 영영 미쳐버린 사람, 눈을 부릅뜬 채 자던 필리스 아주머니, 침대 밑에 숨어서 자던 잭슨 틸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빌러비드 같은 완전한 백치 상태의 아가씨는 처음이었다.     


세서는 이 흑인 처녀가 자기가 죽인 어린 딸의 원혼이 되돌아온 거라는 이상한 믿음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마땅히 사랑받아야 하지만 사랑받지 못했던 이들의 청산되지 않은 과거가, 원혼이 빌러비드라는 아가씨로 되돌아온 거라고. 덴버는 빌러비드가 무한한 사랑을 갈망하는 탐욕스러운 유령이라고 말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그래서 그들은 빌러비드를 무한정 사랑해준다.     


폴디는 세서의 영아 살해 기사가 실려 있는 신문을 보고 그런 일을 저지른 사람과 같이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폴디가 떠나고 빌러비드와 세서, 덴버 세 여자는 그 집에서 과거에 매몰된 삶을 살기 시작한다. 과거에 빌러비드를 죽였던 일을 사죄하고 또 사죄하면서. 빌러비드의 뻔뻔한 요구는 끝이 없고 마침내 세서는 빌러비드를 기쁘게 해주느라 완전히 진이 빠져서 직장도 잃고 폐인이 되어간다. 빌러비드가 통통하게 살이 오르는 만큼 세서와 덴버는 음식을 빼앗겨 점점 뼈만 앙상해진다. 마침내 덴버는 이웃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외부와의 소통을 시도하게 된다. 빌러비드의 끝없는 요구, 사랑받지 못했고, 희생되었으니 이제는 네가 희생해야 한다는 요구는 현재 미국 사회에서 흑인들이 일으키는 각종 사회 문제들을 연상시킨다. 과거에 희생당했던 약자들이므로 더 많은 배려가 필요하다는 흑인들의 주장은 빌러비드의 요구를 연상시키는 면이 있다. 빌러비드는 계속해서 떼를 쓴다. 흑인들이 괴물로 변해가는 과정을 토니 모리슨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들(백인들)에게 흑인들이 사실은 얼마나 점잖고 영리하고 다정하고 인간적인지를 입증하려고 기를 쓰면 쓸수록, 흑인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백인들에게 납득시키느라 자신을 소진하면 할수록, 흑인들의 마음속에는 점점 더 깊고 빽빽한 정글이 자라났으니까. 하지만 그 정글은 흑인들이 어디 살 만한 다른 곳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었다. 백인들이 흑인들의 마음속에 심어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정글은 자라났다. 퍼져나갔다. 삶 속에, 삶을 통해, 삶 이후에도, 정글은 자라났고 그걸 만든 백인들을 침범하기에 이르렀다.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건드렸다. 변화시키고 바꿔놓았다. 심지어 그들이 원한 것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어리석고 악하게. 백인들은 자신들이 만든 정글을 무척 두려워했다. 끽끽대는 개코원숭이는 바로 그들의 새하얀 피부 밑에서 살고 있었다. 붉은 잇몸은 바로 그들의 것이었다.’     


불의가 한을 낳고 나서 사람들은 그들이 희생시킨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고 땅에 파묻었다. 그런 뒤에 영원히 사라져버렸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항생제를 먹으면 세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사람들처럼. 항생제를 퍼부은 곳은 다름 아닌 자신의 몸속임을 잊은 듯이. 세균과 함께 건강한 세포들도 죽었다. 몸의 면역은 떨어지고 세균은 진화해 점점 더 강한 항생제가 필요하게 되었다. 수십 세기에 걸쳐 부품처럼 쓰고 버린 노예들, 소작농들, 노동자들이 그들을 이루는 배경이 되었다. 흑인들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인들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더럽힌 것이다.      


내게 잘해주는 사람이 점점 더 편하게 느껴지다가 나중에는 그들에게 온갖 짜증을 부려놓게 되듯이, 간혹 자식이 엄마에게 그러듯이 어떤 백인들은 남 탓을 하기 시작한다. 주변이 더럽혀지는 게 화가 나서, 자신의 요구가 더 빠르게, 더 쾌적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게 짜증이 나서 점점 더 엄마를 학대하기 시작한다. 모든 문제를 흑인 탓으로, 이민자 탓으로, 장애인 탓으로, 여자 탓으로, 노인 탓으로 돌리기 시작한다. 가해자가 된 피해자인 빌러비드는 자기에게 호의를 베풀어주는 세서와 덴버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대응한다.     


물론 빌러비드의 진짜 정체는 원혼 따위가 아니었다. 그녀는 어린아이 때부터 어떤 백인에게 쭉 감금당한 채 지내온 처녀였다. 어릴 때부터 외부와의 접촉 없이 갇혀 지내다 보니 교육을 받지 못했고, 동물이나 마찬가지인 상태로 성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백인 남자가 시체로 발견된 뒤 이 흑인 여자는 사라졌는데 보안관이 아직 그녀를 찾으러 다니고 있다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124번지로 몰려갔다. 세서는 과거와 똑같은 일이 다시 반복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인들이 다시 자기 딸을 빼앗으러 온다고 착각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자기 딸이 아니라 자기 딸을 잡으러 온 보안관을 죽여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그녀가 린치를 가한 사람은 보안관이 아니었다. 세서가 교도소에 있을 때 그녀를 구해준 백인 민권 운동가이자 세서가 사는 집을 무상으로 빌려주기까지 한 집주인이었다. 그동안 ‘원혼’ 빌러비드는 어딘가로 영영 사라져버린다. 더 이상 피해자끼리 죽고 죽이는 게 아니라 가해자를 향해 제대로 칼을 겨누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고통스러운 기억과 마주하고 맞서 싸우겠다고 결심한 순간 과거와 원혼은 사라져버렸다.     


그러고 나서 세서 앞에 폴디가 나타났다. 전에 그렇게 세서를 떠나버린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세서는 빌러비드(죽은 흑인) 때문에 산 흑인(폴디)과 같이 미래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현재의 흑인 사회가 과거의 고통 때문에 정체되어 버린 것처럼. 그런데 이제 빌러비드가 떠나자 폴디가 돌아와서 이렇게 말한다. “당신과 나, 우리에겐 어느 누구보다 많은 어제가 있었어. 이젠 무엇이 됐든 내일이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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