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냉철함을 좋아합니다. 냉철하고 명석하고 차분하고 밝고, 그러면서도 절망하고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 작품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썼습니다.
이 소설은 스쳐 지나가는 혼의 이야기입니다. 혼이 스쳐 지나가는 그 순간의 이야기.
그리고 또 곱지 못한 마음의 이야기입니다. 곱지 못한 마음이란 미련과 집착과 타성, 그런 것들로 가득한 애정.
어렸을 적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지는 순간, 그 몇 초 전부터 넘어지리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신기한 일이지만 명료하게, 아아 곧 넘어지겠구나, 하고 말이죠. 그러고는 넘어집니다. 저녁때는 그런 유의 투명한 냉철함에 젖습니다.
곱지 못한 마음의 하늘에, 조용한 저녁이 내리기를.
작가의 후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 소설은 말 그대로 혼이 스쳐 가는 순간의 이야기, 곱지 못한 마음에 대한 이야기다.
리카는 도쿄의 학원에서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녀에게는 다케오라는, 8년째 사귀고 있는 연인이 있다. 어느 날 다케오가 새 여자가 생겼다면서 갑자기 이별을 선언한다. 리카는 놀랄 정도로 담담하게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렇다고 리카가 괴롭지 않은 건 아니다.
한 번은 붙잡았다. 다케오가 없으면 안 돼, 라고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당당하게 말했다. 내가 진정으로 부탁하는 일은 다케오가 들어주지 않을 리 없었다. 지금까지는.
두 번 정도 목욕탕에서 훌쩍훌쩍 울었다. 두 번 다, 울고 나서 하느님에게 기도했다. 기도하면서, 불안에 흔들리는 공포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모순되지만 어서 빨리 그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기도 했다.
(...)
나는 다케오가 나간 후에도 울부짖지 않았다. 일도 쉬지 않았고 술도 마시지 않았다. 살이 찌지도 야위지도 않았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긴 시간 수다를 떨지도 않았다. 무서웠던 것이다. 그 중 어느 한 가지라도 해버리면 헤어짐이 현실로 정착해버린다. 앞으로의 인생을, 내내 다케오 없이 혼자 살아가야 하다니, 나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리카는 청소를 하거나 미용실에 가는 등 그날그날의 일에 집중하며 건조하고 쾌적한 나날을 보낸다. 다케오가 이사를 간 원룸을 방문했다가 리카는 다케오의 새 여자친구와 마주친다. 여자의 이름은 하나코다. ‘전체적으로 탄력 있고 자그마한 인상의 여자로, 얼굴은 예쁜데 표정은 어딘가 모르게 야만적이며, 생긋 웃는 모습은 정말이지 아름답고-청순한, 이란 형용사를 모양으로 빚은 듯한 웃음을 짓는’ 여자였다. 하나코와 마주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리카가 사는 아파트에 하나코가 불쑥 찾아온다. 하나코는 리카와 같이 살고 싶다고 말한다. 집세도 반을 부담하겠다면서. 리카는 우스우리만치 동요하지 않고 그러라고 한다. 그렇게라도 다케오의 세계와 이어지고 싶다고 생각한다.
하나코는 일하지 않았다. 외출도 하지 않는다. 짐도 거의 없다시피하다.
(...)
'언제까지 있을 건데?'
가끔 나는 물었다.
'있을 수 없을 때까지.'
하나코는 언제나 그렇게 대답했다.
하나코는 말이 없었다. 하나코는 잘 웃었다. 편식은 하지 않는 것 같은데, 아주 조금밖에 먹지 않았다.
하나코는 언제나 메모지 한 장만 달랑 남겨놓고 떠났다가 예고도 없이 훌쩍 돌아와 있곤 했다. 하나코가 없으면 집안이 적막할 정도로 고요하다고 리카는 생각한다. 하나코는 매우 우수한 동거인이었다. 바로 옆에 있는데도 그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않게 하는 사람이었다.
8월이 되자 리카가 일하는 학원에서 3박 4일로 합숙캠프를 떠나게 되었다. 캠프를 무사히 마치고 도쿄역에서 해산하려는데 아직 아이를 찾으러 오지 않은 학부형이 있었다. 나오토라는 남자아이의 아버지였다. 나오토는 어머니 없이 아버지와 둘이 살고 있었다. 그날 하나코와 시내에서 만나기로 했던 참이었으므로 리카는 나오토를 데리고 하나코와 셋이서 다코야키를 먹으러 갔다. 하나코는 나오토하고도 마음이 잘 맞았다. 신나게 다코야키를 먹고 난 뒤, 나오토의 아버지가 아이를 데리러 왔다. 그렇게 그들은 잠시 마주쳤을 뿐이었다. 며칠 뒤 나오토는 하나코 누나가 자기 집에 와있다고 말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부엌에서 사과 주스 마시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나오토의 아버지는 잠시 마주쳤을 뿐인 하나코에게 반해버린 듯했다. 리카와도 아주 잠시 마주쳤을 뿐인데 하나코는 뻔뻔하게 집까지 찾아와서 여기서 살아도 되냐고 묻지 않았던가.
리카에게는 홍콩에 살고 있는 대학 시절 친구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료코였다. 료코는 연적을 집에 들인 리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하나코가 불쑥불쑥 없어지고, 그때마다 리카가 쓸쓸함을 느낀다는 것을 알고는 더더욱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 여자가 돌아와서 네가 기쁘단 말이지.'
료코는 친구를 걱정한 나머지 홍콩으로 놀러 오라고 비행기표를 보내주기까지 한다. 하나코가 다시 리카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다케오는 옛 애인인 리카와 현재 애인인 하나코를 보러 아파트를 방문한다.
'너희 둘, 자매 같은 느낌이 들어서.'
(...)
'똑같은 차림으로, 똑같이 손 흔들고, 게다가 똑같이 미소 짓잖아.'
(...)
'리카는 아무렇지 않아?'
(...)
'나하고 하나코, 꽤 마음이 잘 맞아.'
하나코는 소파에 축 늘어져서 라디오를 듣고 있다가 리카가 돌아오면 ‘어서 와’라고 한다. 리카는 하나코의 ‘어서 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1밀리그램의 오차도 없이, 언어가 정확한 중량을 지니고 있다. 그렇게 정확한 무게의 ‘어서 와’를 오랜만에 들어본다.
(...)
하나코는 그 얇은 입술 양 끝을 치켜 올리고, 후후후, 하고 조그맣게 소리내면서 웃는다.
‘우후후’도 아니고, ‘쿠쿠쿠’도 아니고, 반드시 ‘후후후’하고 웃는다. 상냥한 눈빛에 하나코의 웃음은 늘 똑같다. 소리의 크기도 분위기도, 고개를 약간 갸웃한 그 각도까지.
'전혀 기분이 흐트러지지 않나 봐.'
'기분?'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하나코는 되물었다. 발톱에 칠한 분홍색 매니큐어를 하얀 솜으로 박박 닦아내면서.
'웃을 때는 기쁘거나 재밌거나, 그래서 기분이 흐트러지잖아? 흔들린다고 해야 하나.'
(...)
'그런 일 없어.'
딱 잘라 말하고, 하나코는 옆에 있는 캔맥주를 마셨다.
'웃을 때는 말이지, 기쁘거나 재미있어서, 그래서 웃고 싶으니까 웃는 거야.'
리카는 하나코가 도를 닦듯이 그 순간에 몰입하여 흐트러짐이 없다고 느끼는 듯하다. 타성에 이끌린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능동적으로 사는 사람. 너무도 강인해서, 리카는 하나코에 대해 ‘살아 있음의 거추장스러움이 없는 사람, 생기가 없다는 뜻에 아주 가깝다. 그러면서도 음침한 느낌은 없고, 오히려 건조하고 밝다’고 표현한다. 그런 하나코의 모습은 매 순간 각성 없이 감정에 휘둘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생생한 존재감을 갖게 만든다. 그래서 보고만 있어도 자신의 삶이 전에 없이 강렬한 색채를 띄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하나코의 이런 물성은 당연히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하나코는 얼핏 득도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런 특징은 유전자 단위에서부터 대대로 강자로 살아온 사람들이 마침내 쟁취해낸 특권이다. 이 소설은 일본인의 정신 세계 속에 담겨 있는 순응성과 보수성을 그대로 계승한다. 일본인의 정신세계에서 사회 시스템의 높은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약자들(이 소설에서는 작가의 표현에 의하면 곱지 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 하나코를 제외한 다른 등장인물들)은 보통 후려침을 당하고 시련을 겪게 된다. 다시 말해서, 하나코는 하나코라서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이다.
타인들도 그런 하나코에게 속수무책으로 이끌리는 듯하다. 8년 동안 사랑했던 애인이 있었던 다케오도, 연적인 리카도, 나오토와 그의 아버지도, 다케오의 오래된 친구이자 선배인 카츠야씨도 하나코를 사랑하게 된다. 카츠야씨는 하나코를 사랑하게 된 나머지 부인과 이혼하기까지 한다. 다케오는 종잡을 수 없는 하나코 때문에 폐인이 되어 직장도 그만둬버린다. 하나코를 스쳐 지나간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좋아하고 갈망하게 되지만 정작 하나코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안주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모두의 삶으로부터 달아나려고만 한다.
외로운 것은 아니다. 밤, 목욕을 하고 목욕 타월만 몸에 두른 채 냉장고에서 세븐업을 꺼내 그냥 서서 꿀꺽꿀꺽 마실 때, 하나코가 없어 오히려 자유로운 느낌이다. 다만 하나코가 없는 방은 모든 것이 무기물처럼 색이 바래 보인다. 따분할 정도로 조용하다. 하기야, 그런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보통 때도 그러니까 정확하게는 이렇게 표현해야 할 것이다. 하나코가 있으면, 모든 것이 살아 숨쉬는 것 같다, 고. 벽도 텔레비전도 냉장고도 화분도, 모든 것이 유유하게 생기를 뿜어낸다. 그래서 방안이 정글처럼 미열을 띤다. 기묘한 일이었다. 하나코 자신은 늘 뒹굴뒹굴 잠만 자는데, 거의 생기와는 거리가 먼 사람인데.
하나코는 리카에게 자신은 아무것도 믿는 게 없다고 털어놓는다. 그런 상태는 작가의 다른 작품 제목인 ‘울 준비는 되어 있다’와 같은 상태다. 세상이나 사랑에 대한 하나코의 인식은 아무것도 믿지 않을 만큼 매우 비관적이다. 미리 애도할 준비를 끝내 놓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담담한 상태. 그만큼 강직하고, 낭만적 환상도 없이 수도하는 스님처럼 마음의 미혹됨이 없는 상태인 것이다. 작가 후기에 쓴 것처럼 서늘한 저녁 시간에는 자전거에서 넘어지기 전에 그것을 깨닫게 되는, 그런 명료한 마음이 스며들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주제를 다룬 일본 작가의 다른 소설이 떠올랐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로 유명한 다나베 세이코의 단편 소설 중에 ‘이 정도쯤이야’라는 소설이 있다. 여자 주인공은 자기보다 나이가 훌쩍 어린 호리라는 남자 직원에게 약간의 호감을 품고 있었다. ‘호감을 품는 것쯤이야 어떻겠어?’라고 생각하면서. 주인공은 그 호리라는 남자를 볼 때마다 어디서 본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다가 ‘일본 근대 수난사’라는 사진집에서 저런 얼굴을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일본군에게 처형당하기 직전에 찍힌 중국인 청년의 사진. ‘철사줄처럼 빳빳한 머리칼과 맑은 눈, 여윈 볼. 눈은 맑고 차분했으며 마치 자신을 처형하려는 사람에게 그래도 괜찮아? 정말? 괜찮아? 하고 놀리는 듯한 의연한 자세의 눈’이었다고 기억한다. 아니면 그녀의 ‘상상과는 달리 처형을 눈앞에 두고 절망과 공포에 얼어붙어서 그냥 망연히 앞만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처형당하기 직전의 맑은 눈은 울 준비를 끝내 놓은 담담한 눈이다.
같은 소설집에 이런 정신을 극대화한 또 다른 단편 하나가 실려 있다. ‘눈이 올 때까지’라는 이 단편 속에서 여자주인공은 어떤 일을 하기 전에 늘 이번이 마지막인 것처럼 마음을 먹는 버릇이 있다.
‘자네는 연속극을 싫어하는 사람 같아. 한 편으로 완결하고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이야.
(...)
늘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오바를 만나기 때문에, 그 다음에 만났을 때는 꿈처럼 달콤하다. 오바에게는 말하지 않지만, 이와코는 마음속으로, ‘우리는 마치 동반자살을 약속한 전날 밤의 남녀 같아......’라는 생각을 하며, 온몸으로 그 시간을 즐긴다.
처형당하기 직전, 연속극이 아닌 단막극은 삶에 대한 기대치를 0으로 수렴하게 만드는 고독한 세계다. 하나코는 이러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따라서 잠시 머물다 도망칠 뿐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다. 웬만한 정신력으로는 하나코의 무시무시한 강인함을 버텨내지 못하고 날이 갈수록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 원래부터 어딘가 하나코와 비슷한 면이 있었던 리카만이 하나코의 세계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그녀의 존재를 담담하게 흘려보낸다. 리카 역시 울 준비는 끝내놓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작중 인물들이 하나코를 사랑하는 방식이 집착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버스 정거장에서 다케오를 배웅하고 있을 때 다케오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연애가 아니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어.’
보슬보슬 부슬부슬. 비가 한없이 단조롭고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내렸다.
‘연애가 아니면 뭔데?’
비에 젖어 촉촉한 아스팔트 길이 가로등 빛에 거뭇거뭇 빛나고 있었다.
‘집착.’
다케오는 마른 목소리로 힘없이 말했다. 나는 말없이 그냥 걸었다. 끝없이 내리는 비가 나와 다케오를 우산째 대지에 가둬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집착은 다케오를 마음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던 리카가, 자기 집 벽에 걸어둔 다케오의 자켓을 묘사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리카는 그 초콜릿색 재킷이 ‘나와 다케오가 나눈 사랑의 나날을 상징하는. 언제까지고 은퇴하지 못하는 약팀의 늙은 스트라이커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과거의 영예에 미련을 버릴 수 없는 약하디 약한 늙은 스트라이커.
하나코는 다시 메모지 한 장만 남기고 무작정 집을 나가버린다. 리카의 친구 료코가 보내준 홍콩행 비행기티켓을 들고. 이 이야기를 들은 료코는 하나코가 어떤 여자인지 한번 보고 싶다고 말한다. 료코는 리카에게 야우마티에 있는 죽집에서 하나코를 발견했다고 말해준다. 리카는 하나코가 어땠냐고, 좋아 보였냐고 물었다. 료코는 단박에 목소리에 힘을 주고 대답했다.
‘아니, 전혀. 불행의 밑바닥에 있는 것 같은 얼굴이었어.’
리카가 자신을 보고 싶어 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하나코는 자기도 리카가 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리카는 그럼 돌아오지 그랬냐고 하나코의 얼굴을 보지 않고 물었다. 하나코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맥 빠진 목소리로 대답한다.
‘한 번 밖으로 나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거야.’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그런 거야.’
그런데 하나코가 단순히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는, 결코 흐트러지지 않는 그런 폐쇄적이기만 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작가는 강조하고 싶었던 듯하다. 자신도 믿는 것이 있다고 하나코는 리카에게 털어놓는다. 하나코의 하나뿐인 남동생 소이치다. 리카는 하나코, 소이치와 함께 찻집에서 차를 마시고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자기도 사랑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리카에게만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카츠야와 다케오가 집에 찾아오기로 한 날, 리카는 지금은 다케오와 만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 기분을 말했더니 하나코는 그럼 ‘안 만나면 되잖아’라고 말한다. 같이 도망치자고. 하나코는 리카와 함께 카츠야와 다케오가 올 시간에 집에서 나온다. 두 여자는 찻집에서 시간을 때우는데 이때 리카는 ‘도망친다는 거, 굉장한 고통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아마도 나는 몹시 소심한 사람인가 보다. 마음이 켕겨서 안절부절못한다. 어서 빨리 이 하루가 끝나고 새로운 날이 시작됐으면 좋겠다고, 아까부터 그런 생각만 하고 있다.
하나코가 내 얼굴을 본다.
‘몰랐어?’
조그맣고 하얀, 단정한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번진다.
‘몰랐나 보구나’
(...)
‘난 늘 도망만 치는 것 같아’라고 말한다. ‘그런 인생이야. 도망만 다니는, 하지만 절대, 절대 도망칠 수 없는’
하나코는 리카에게 자신과 자신의 동생을 후원해주고 있는 나카지마라는 중년 남자의 별장으로 도망치자고 제안한다. 나카지마도 하나코에게 오래전부터 반해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나카지마의 별장 근처에는 파도가 일렁이는 검은 밤바다가 있었다. 리카는 하나코와 나란히 해변을 걸으면서 물었다.
‘계속 도망치고 있다고 했지, 무엇에서 도망치는 건데?'
묻고서 바로 후회했지만, 한 번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다.
‘그냥 도망치는 거야.’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목소리로 하나코는 대답 아닌 대답을 했다.
‘내 주위에 있는 모든 것에서, 그냥 도망치는 거야. 이 게임이 빨리 안 끝나나, 늘 그런 생각하면서 말이야.’
나카지마씨의 별장에서 자고 일어난 리카는 하나코가 골라준 하나코의 옷을 입고 기차를 타고 도쿄로 출근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하나코는 물론 집에 없었다. 리카는 담담하게 여느 때처럼 하나코가 불쑥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다음 날 나카지마씨로부터 하나코가 별장에서 자살했다는 전화가 걸려 왔다. 하나코의 장례식이 끝나고 난 뒤에도 리카는 겉으로는 전과 다를 바 없는 일상을 살아갔다. 하나코가 없다는 것만 빼고는.
집에 들어오면 늘 하나코가 있었다. 착각이나 공상이 아니다. 하나코는 내가 숨쉬는 공기에 녹아 가득가득 방을 채우고 있었다. 그 공기는 한천처럼 딱딱해서 창문을 열어도 바깥 공기의 침식을 받지 않는다. 하나코가 없어도 내가 느끼는 방의 온도와 습도는 늘 일정하다. 그래서 나는 이 집을 떠날 수 없다. 이 집에는 시간이 겹겹 쌓여 있다.
하나코의 부재를 받아들이지 못하던 리카는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하나코를 ‘보내주기로’ 결심한다. 하나코에게 집착해왔던 다케오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리카는 다케오의 집을 찾아간다. 다케오의 방에도 갇혀 있는 하나코를, 하나코가 좋아하는 하늘로 보내주기 위해 리카는 다케오와 사랑을 나눈다.
다케오 앞에서, 현실의 여자이고 싶었다. 다케오가 실재하는 여자로 나를 안아주길 바랐다. 애정 따위 없어도, 기억 따위 없어도.
어떠한 순간에도 미혹되지 않는 것, 감정에 동요되지 않고 고통을 담담하게 바라보는 것, 곱지 못한 마음으로부터 놓여나는 것에 대해 이 소설은 이야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