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ly Jul 16. 2023

소년 소녀를 만나다 (1984)

영화 '소년 소녀를 만나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스무 살이었다. 그때 이미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영화가 전개될수록 고통스러운 초조함이 몰려왔다. 도저히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방안을 서성거렸다. 그렇게 서서 곁눈질로 본 영화에서 알렉스가 말했다. 전쟁에 참전할 필요는 없어. 우리는 이미 베테랑이니까. 황지우의 시구절이 생각났다. 나는 사막을 건너간다, 이미 보아버렸으므로. 


 


영화의 첫 장면이 시작되자마자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여기에 우리는 아직도 홀로 있다

모든 것이 너무 느리고 너무 무겁고 너무 슬프다

곧 나도 나이를 먹겠지

그리고 결국 끝나게 될 것이다

 

내레이션은 노인처럼 지쳐 쉰 목소리로 이질적이고 금속성을 띄고 있었다. 내레이션과 더불어 무언가 까끌까끌한 것을 문지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들은 인생은 이미 끝났거나 혹은 무의미하다고, 나이를 먹어 숨이 끊어지기까지는 그저 남은 생일 뿐임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장면이 바뀌면서 터널을 가로지르는 자동차가 등장했다. 영화의 모든 장면은 흑백이다. 자동차 안에는 여자와 어린 딸이 앉아 있다. 여자의 이름은 마이떼다. 이 여자는 엑스트라로 잠시 등장한다. 차 안의 라디오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터널은 누군가와의 관계를 벗어나고 있는 마이떼를 상징하는 듯하다. 


떠난다는 말을 하러 왔어요

울어도 소용없어요

이제 행복했던 날은 가고


마이떼는 파리를 가로지르는 세느 강변에 도착한 뒤 남편인 듯한 사람에게 전화를 건다.


마이떼: 안녕, 앙리.

빵빠니엘(마이떼와 앙리의 3살 정도된 딸): 그러지 마.

마이떼: 당신이 떠나래서 떠났어. 빵빠니엘도 데려왔어. 우린 산으로 갈 거야.

빵빠니엘: 그런 말 하지 마. 하지 마!

마이떼: 여보세요, 앙리! 마이떼야. 당신이 떠나래서 떠났어. 빵빠니엘과 차는 나와 함께 있어. 우린 산을 갈 거야 하나 더... 네 엉터리 그림과 사진도 내가 가져왔어. 어디에 버릴지 알아? 물속에 버릴 거야. 강물에! 끊지 말고 듣고 있어.

 

전화를 끊고 나서 마이떼와 빵빠니엘은 차 밖으로 걸어 나왔다. 한때는 분명 거기 있었지만 이제는 소멸해버린 사랑처럼 세느 강변의 불들이 다 꺼져 있다.

 

마이떼: 봐, 빵빠니엘 불이 다 꺼졌구나.

 

마이떼는 지나가는 행인 또마에게 말을 건다.

 

마이떼: 오늘이 몇 일이죠?

또마: 1983년 5월 24일… 10시 20분입니다.

 

뒤돌아서서 걷는 마이떼의 등 뒤로 앙리의 얼굴이 떠오른다. 얼굴은 실체 없이 이미지만 남은, 이미 죽어 육신을 잃은 유령처럼 잠깐 부유하다가 사라진다.


 

또마에게 한 남자가 다가온다. 남자주인공인 알렉스다. 또마는 알렉스의 가장 친한 친구다.

 

알렉스: 난 여기가 좋아. 강과 고속도로…

또마: 그래.

알렉스: 대단한 여자야.

또마: 맞아.

알렉스: 무슨 일인지 알고 있지? 넌 알고 있을 거야. 그애는 한쪽 귀가 멀었다고 했어. 왼쪽이! 그애는 성한 귀를 베고 잠들어 있었어. 내가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했더니 깜짝 놀라 돌아보면서 어떻게 알았냐고 묻더군. (외도의 사실을) 사실 난… 그제야 알게 된 거야. 언젠간 알았겠지만. 플로랑스는 거짓말을 못 해. 그애는 ‘애인이 생겼구나’라고 알아들은 거야. 난 눈치를 챘지. 아는 놈이라 마음이 놓였어. 비록 내 가장 친한 친구였지만 말야. 이제 그애는 떠났어.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는데 전혀 나답지가 않아.

 

알렉스의 연인인 플로랑스는 그의 가장 친한 친구 또마와 사랑에 빠졌다. 알렉스는 갑자기 또마를 때려눕히고 목을 조른다. 나이프를 꺼내들고 찌르려다 마지막 순간에 정신을 차리고 나이프를 강물 속에 던져버린다.

 

알렉스: 미쳤어.

 

알렉스는 마이떼가 흘린 스카프를 주워든다.

 

알렉스: 플로랑스가 제일 좋아하던 색이야. 나쁜 년, 모든 걸 가져가 버렸어.


 

알렉스는 마이떼의 스카프를 플로랑스의 것이라고 착각한다. 스카프조차 헷갈리는 걸 보면 알렉스는 플로랑스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듯하다. 알렉스는 방심하고 있던 또마를 강으로 밀어넣는다. 플로랑스의 얼굴이 앙리의 얼굴과 똑같은 기법으로 잠깐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어떤 여자가 남자와 함께 살고 있는 집으로 장면이 바뀐다. 여자는 슬픈 표정으로 앉아 있다. 남자는 침대 위에 누워 책을 읽고 있다. 잠시 뒤 남자가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걸치고 나가려 한다.

 

여자: 어디 가?

남자: 밖에

여자: 왜 말을 안 하지?

남자: 미레이유. 미안해, 지금 여기선 말할 수 없어.

여자: 그럼 다른 데 가서 해.

 

미레이유는 마당에 나가서 담배를 피우다가 라디오 주파수를 돌린다. 거친 락음악이 흘러나온다.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자기 뺨을 한 대 때린 뒤 음악에 맞춰 목을 돌리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미레이유는 깜짝 놀라 전화를 받는다.

 

남자: 열쇠를 잊고 나왔어. 나갈 때 우편함에 넣어 줘.

미레이유: 나갈 일 없어.

 

남자가 공중전화에서 돌아서려는데 미레이유가 수화기 너머로 묻는다.

 

미레이유: 이제 날 사랑하지 않지?

 

남자는 멈춰서고 알렉스가 맞은 편에서 걸어오다 남자가 하는 말을 듣는다.

 

남자: 뭐라고?

미레이유: 내 말 들었잖아, 베르나르.

남자(베르나르): 그래, 그래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 마. 그런 말은 왜 하지? 쉽게 한 건 아니겠지만. 네겐 무관심하지만 내겐 그렇지 않아. 널 사랑하지만 혼란스러워. 동등하게 사랑하려 시간이 걸린 거야. 네가 나만큼 사랑하자 한 선율이 내 머리에 감돌기 시작했어. 우리가 키스할 땐 그 노래가 좋더니 곧 노랫말이 이렇게 바뀌었어. 이 여자 뭐 하는 거지? 웬 괴물이야? 감히 내 입을 맞추다니. 내가 좋아하는 줄 아는군! 입냄새가 고약해. 당신 냄새가 좋은 건 알아. 하지만 고약하다고 믿으려 했어. 난 너의 아름다움을 외면하고 네 움직임만 바라봤어. 서 있고, 앉고, 눕는… 그렇게 보는데 노랫말이 또 바뀌었지. 이젠 이 여자가 싫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가는 것도 싫다. 사랑하기도 싫다. 몇 번의 대화 속에서 넌 진지하지 않았어. 대화 중에 본 네 모습은 껍데기뿐이었고 난 내심 널 모욕했어. 그러자 너와 나 자신이 불쌍해지더군. 그래서 우리가 싫어. 함께가 더 외로워. 누가 우릴 사랑할 수 있겠어? 우린 너무 밀착되어 있어. 예전처럼 됐으면 좋겠어. 눈치 보는 일도 그만하고… 서로 상처 주지도 말고… 안녕, 나의 천사. 나 오늘 늦을 거야.

 

이 대화를 엿들은 알렉스는 베르나르를 미행하기 시작한다. 베르나르가 카페 안으로 들어서자 알렉스도 카페로 들어간다. 카운터로 다가가 베르나르 옆에 선다. 가게 안에는 점원과 어떤 여자와 부리아나라는 손님이 있다.

 

부리아나: 내 이름은 부리아나요.

점원: 고독한 이들의 진짜 문제는 혼자 있지 않는단 거죠.

 

고독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누군가를 찾아 나서지만 번번이 소통에 실패하고 좌절하고 만다.


 

베르나르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흘리자 알렉스는 재빨리 그것을 줍는다. 부리아나라는 남자는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하면서 계속해서 자기 이름을 말하고 있다.

 

부리아나: 그래요, 부리아나요. 부리아나! 부리아나 할 때 B 우리아나 할 때 O 유리아나 할 때 U 리아나 할 때 R 이아나 할 때 I 아나 할 때 A 나 할 때 N 알프레드 할 때 A 알프레드 부리아나요!

 

이 부리아나라는 남자는 나중에 파티에서 다시 등장한다. 파티를 주최한 여주인의 표현에 의하면 한때 사람들은 부리아나를 살아있는 시계라고 불렀다. 463-8400로 전화만 걸면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만(아마도 부리아나는 전화를 걸면 시간을 말해주는 유명한 회사나 공공기관의 직원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잊혀진 존재가 되었는지 전화교환원이 이름조차 알아듣지 못한다. 그래서 자기 이름의 스펠링까지 불러줘 가며 열을 올리고 있다. 타인에 의한 존재증명에 실패해서 화가 나 있는 것이다.

 

알렉스는 외출을 끝내고 자기 방으로 돌아온다. 옆방에서 남자의 고함 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옆방 남자: 너의 감정적 협박은… 화장실에서 섹스할 때 기분 같아. 난 안 믿어! 사랑하기에 늦었어! 속지 않을 거야.

 

이 영화에는 이 남자처럼 사랑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사람들이 자주 등장한다. 


 

알렉스는 액자 뒤를 들추어본다. 그의 이력이 조각된 글씨들이 보인다.


"1970 - 1976, 고등학교"

"F에게 배반당함 3/26/83"

"첫 번째 도둑질, 1968년"

"F에게 처음 거짓말 3/13/81 퐁네프“

"내 은행"

"룩셈부르크 공원 - 독서 1977 -1979"

"출생, 코친 병원, 1960"

"F와의 첫날 밤 파스칼 7번지, 1/2/81"

"병원 - 80년 4월, 탈장"

"F와의 첫 키스 - 1 1/22/80"

"F와의 첫 만남 - 6/2/80"

"첫 살인미수 - 5/25/83" 라고 새겨넣는 알렉스.

 

옆방 남자: 미쳤어! 세상이 이 지경인데… 어떻게 섹스를 하자는 거야? 눈이 멀었어? 놀고 있네… 그래봤자 넌 짐승이야! 포장만 그럴듯하게 해서 썩은 고기를 먹이는 거야. 맘에 들어? 난 아냐. 냄새도 못 맡아? 감기 들었군. 아니면 토했을 테니까. 우리가 왜 이렇게 됐냐고 물었지? 세상은 그런 거야! 그걸로 충분하지 않아? 맞고 싶어? 조심해, 한방 나가기 전에! 때려봐! 때려! 때린다! 맞아라!

 

남자는 외부 세계에 대한 절망을 배우자에게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해소하려 한다. 알렉스는 참다못해 주먹으로 벽을 내리친다.

 

잠시 뒤 옆방 여자가 짐을 꾸려 떠나자 옆방 남자는 힘없이 혼잣말을 한다.

 

옆방 남자: 떠나지 마 안나. 같이 살아.

 

앞서의 폭언과는 달리 남자가 두 사람의 관계에 더 집착하고 있는 듯하다. 방을 나온 알렉스는 떠나려는 옆집 여자와 마주친다. 옆집 남자가 여자를 향해 무언가 무거운 물건을 집어 던지지만 알렉스가 여자를 재빨리 밀어붙인 덕분에 여자는 위기를 모면한다.


 


장면은 다시 미레이유의 집으로 바뀐다. 미레이유는 바에 다리를 걸치고 스트레칭을 하고 있다. 텝댄스 교본을 보면서 텝댄스용 구두를 꺼내 연습을 시작한다. 알렉스는 이어폰을 끼고 데이빗 보위의 모던 러브를 들으면서 파리의 밤거리를 산책한다. 사랑에 빠져 세상을 온통 잊은 듯한 연인이 거리에서 정신없이 키스 중이었다. 알렉스는 그들에게 경멸조로 동전을 던진다. 미레이유는 텝댄스를 능숙하게 출 수 있게 된다. 두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실연의 고통을 이겨보려 노력한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알렉스는 타자기로 친 편지를 품에 집어 넣는다. 창문 블라인드에 어젯밤 베르나르에게서 훔친 메모지가 꽂혀 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베르나르에게

금요일 우리 집에서 파티가 있어. 스탕 서거 10주년 기념 파티야. 미레이유랑 같이 와.

- 엘렌. S.

 

알렉스는 음반 가게에서 레코드를 훔쳐 잽싸게 도망친다. 레코드를 들고 플로랑스가 살고 있는 스튜디오로 간다. 문 안쪽으로 플로랑스와 또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플로랑스: 네 차례야. 네 차례. 어서 해봐! 그런 다음 뒤집어서 다시 시작해.

또마: 그런 다음?

플로랑스: 뭘 하지?

또마: 모르겠어.

플로랑스: 좋지 않아?

또마: 별로! 뭔가 잘못됐어.

플로랑스: 뭐가?

또마: 모르겠어.

플로랑스: 뭐가 잘못됐는데?

또마: 난 너무 젖는 건 싫어. 넌 너무 많이 흘려.

플로랑스: 알렉스처럼 마른 걸 좋아하는군, 아픈데도… 아프지 않아.

또마: 난 젖지 않았을 때 만지는 게 좋아.

플로랑스: 젖은 게 더 낫지.

또마: 당신에겐…

플로랑스: 아직 실망하지 말아. 곧… 당신이 그걸 좋아할 줄 알았어. 내 생각이 틀렸어. 싫을 땐 싫다고 말해 그래야 헛고생을 안 하지.

또마: 내가 싫은 게 뭔데?

플로랑스: 내가 입에 넣고 젖게 할 때 당신에게 그걸 할 때 말야. 젖은 게 좋아. 나처럼 당신도 좋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또마: 아니야.

플로랑스: 손가락을 넣는 것도 그래. 알렉스와 할 땐 싫어했어. 지금은 좋아, 그런데 당신은 하지 않아. 그래서 안 되는 거야.

또마: 이유를 알잖아. 당신은 핥아 줘야만 손가락을 넣게 하잖아. 그럼 난 너무 빨리 진행돼. 당신도 불평하잖아.

플로랑스: 아니, 당신을 즐겁게 해주고 싶을 땐 불평하지 않아.

또마: 말은 그렇게 하지.

플로랑스: 난 당신 신음 소리가 좋아. 그 부드러운… 당신이 알렉스처럼 수동적이지 않다면 더 자주 해줄 텐데.

 

또마와 플로랑스의 관계 역시 시작부터 삐걱거리고 있다. 대사를 통해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품고 있던 환상이 깨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연인들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보기 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투사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상대방의 진짜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면 고통과 실망을 느낀다.

 

알렉스가 편지를 방문 아래 끼우려는데 플로랑스가 문을 열고 나온다. 알렉스는 벽에 몸을 붙이고 숨는다. 플로랑스가 사라진 걸 확인한 뒤 편지를 끼우고 문고리에 레코드를 걸어놓고 돌아선다.


 

지하철 승강장에 다다랐을 때 어떤 소년이 개찰구를 뛰어넘어 무임승차하려는 것을 역무원이 눈감아 준다. 그런데 그보다 몸집이 작은 소년이 똑같은 짓을 하려 하자 제지하고 나선다.

 

역무원들: 무임승차야.

 

몸집이 작은 소년: 난 비열한 기회주의자. 희생양이야. 내 더러운 엉덩이와 물집, 안 맞는 신발… 사람들은 신발로 우리를 평가해. 발바닥이 아플 땐 얼음을 신발에 넣었다고 했어. 나도 그렇게 해봤지. 처음엔 낫는 듯했지만 나중엔 더 아팠어. 내 발이 자라듯… 내 영혼도 자란다. 난 모든 면에서 고상해졌어.


 

알렉스는 지하철을 타고 엘렌의 집으로 간다. 그때 베르나르가 엘렌의 집에서 급히 빠져나온다. 베르나르는 분열이라도 일으킨 듯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다. 무언가에 홀린 듯이 지하철역으로 뛰어든다. 알렉스가 그 모습을 지켜본다. 미레이유뿐만 아니라 베르나르도 상당한 심리적 고통을 겪고 있는 듯하다. 여주인인 엘렌은 알렉스를 맞아 파티에 온 손님들을 소개시켜 준다.

 

엘렌: 오늘 밤엔 특별한 손님이 많이 오셨어. 저 꼬마는… 유럽 최고의 지능을 가졌어. 저 작은 남자는 살아있는 시계야. 463-8400으로 전화하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지. 요즘은 별볼일 없지만 말야. 

 

엘렌이 말하는 그 남자는 그 전날 알렉스가 카페에서 마주쳤던 부리아나다.

 

엘렌: 저분은 앙리 베스투쉬. 예술가이자 시인이셔. 몹시 아픈 상태야. 머리에 총알이 박혀있대. 저기 엘리자베스와 있는 여자가 미레이유야. 흰 스웨터를 입은 여자는 조셋 르메르시에야… 50년대 미스 유니버스였지. 옆에 있는 잘생긴 남자는 제리 브리지맨이야. 달에 착륙했던 조종사지. 넌 누구지?

알렉스: 알렉스예요.

엘렌: 난 가볼게, 알렉스.


알렉스는 어떤 노인과 여자가 앉아 있는 소파에, 그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하게 끼어 앉는다. 노인이 알렉스에게 수화로 무언가를 말하려 한다. 알렉스가 못 알아듣겠다고 말하자 옆에 있던 여자가 수화를 통역해준다.

 

여자: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조용하다셔. 말하는 법을 잊은 것 같대. 대화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

알렉스: 그렇지 않아요.

여자: 천만에! 두려운 거야. 영화를 좋아하냐고 물으시는데? 영화가 나처럼 무성일 때 난 영화 일을 했어. 이동식 촬영기를 처음 사용했지. 당시의 스타, 조나스가 기억이 나. 모든 스텝을 즐겁게 했지. 러브씬을 찍을 땐 키스 전에 다정한 말을 하라고 감독이 배우에게 지시했어. 그래야 입술이 움직이는 게 보이니까. 그래서 러브씬 중간에 조나스는 상대 여자에게 가슴이 예쁘다고도 하고 유혹의 말도 했어. 사실 조나스는 점잖고 여자에게 수줍었지만 카메라 앞에선 야수로 변하곤 했어. 그리고… 영화가 상영될 때 러브씬이 나오면 관객 중에 웃는 사람이 한두 명이 있지. 그건 귀머거리들이 조나스의 외설스런 말을 입술로 읽기 때문이야. 무성 영화가 더 좋았어. 왜냐하면… 좀 천천히 말해요 실뱅.

 

무성영화 시대에는 대사가 없었기 때문에 배우들은 표현을 위해 좀 더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말이 없어도 관객들이 배우를 보고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영화는 노인을 통해 언어의 한계성을 지적하는 듯하다. 말은 많이 하지만 소통에는 실패하고 마는 시대의 공허함에 천착하고 있는 것이다. 레오 까락스 감독의 다른 영화 속에에도 남자주인공은 항상 알렉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감독 자신의 본명이 알렉스 뒤뽕이다). 알렉스는 언제나 복화술을 하는데 입을 열지 않고 말을 하는 복화술은 언어에 대한 감독의 강한 불신을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이 영화에서도 알렉스는 미레이유에게 자기에게 아이가 생긴다면 말을 배우는 순간부터 무시할 것이라고 말한다.


 

알렉스는 미레이유가 자리를 뜨는 걸 보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피아니스트가 피아노를 연주하던 도중 미레이유에게 말을 건다.

 

피아니스트: 아가씨, 당신을 밤새 지켜보았어요. 당신을 위해 지은 곡이오. 연주해드릴게요.

 

미레이유는 대꾸 없이 망연하게, 못 들은 것처럼, 유령처럼 그 옆을 스쳐지나간다. 알렉스가 피아니스트의 옆에 서서 음악에 귀를 기울인다. 미레이유는 노부인들 옆에서 혼자 술을 마신다.

 

노부인들: 취미를 바꾸기엔 우린 너무 늙었어.

 

알렉스는 미레이유 옆으로 다가간다. 컵을 집으려다 떨어뜨리는 바람에 컵이 깨진다.

 

알렉스: 젠장!

알렉스와 미레이유 동시에: 속담에 유리잔이 깨지면…

알렉스: 치우는 게 좋겠어요.

 

미레이유는 자리를 뜬다. 알렉스는 깨진 컵을 대충 테이블 밑에 밀어 넣고 나머지는 화분 위에 올려놓는다. 그는 우주 항공사와 50년대 미스유니버스가 있는 곳으로 간다.

 

알렉스: (미스유니버스에게) 뭐라고 한 거죠?

미스유니버스: ‘C’est la vie’라고 했어요. 인생은 다 그런 것이란 뜻이죠.

알렉스: (항공사에게) 당신이 달에 갔을 때 전 9살이었어요. 수년간, 우주를 꿈꾸며 살았었죠. 지금은 아주 엉망이 됐어요, 그렇죠?

 

우주항공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으면서 알렉스를 껴안는다. 이 장면은 한유주의 <달로>라는 소설에서 재현된 적이 있다. 우주 비행을 통해 달로 간 남자(아마도 닐 암스트롱)을 만나는 주인공이 ‘그래, 달은 어떻습니까?’ 하고 묻는다. 우주비행사는 아무 말없이 자리를 뜬다. 인생의 환멸을 깨달은 사람은 말이 없다.마지 못해 이런 게 인생이라고(C‘est la vie) 짧고 똑같은 한 마디를 중얼거리는 정도다.


 

엘렌: 몇 살이지, 제니?

제니: 18살이에요, 부인은요?

엘렌: 얼마 전에 53살이 됐어

악셀: 전 8월 22일이면 28살이 돼요

부리아나: 제일 괴로운 게 뭔지 아세요? 평생 해놓은 게 없다는 거예요. 오늘은 내 37번째 생일이에요. 빌어먹을 37년! 날 돌아보게 하죠. 모짜르트는 내 나이 되기 2년 전에 죽었어요. 정말 우울해요. 하지만 방법은 있어요. 내 머리통을 박살내는 거예요.

 

알렉스: 전화 좀 써도 될까요?

엘렌: 물론이지, 따라 와

 

엘렌은 알렉스를 아기들이 잔뜩 모여있는 방으로 안내한다. 알렉스가 전화기에 음성을 녹음한다.

 

알렉스: 또마, 나야! 수영한 기분이 어때? 지금 플로랑스와 있어? 같이 놓아둔 레코드는 플로랑스에게 주는 거야. 그뿐이야, 안녕!

 

전화기 뒤에 놓여있는 사진첩에서 알렉스는 미레이유의 집 주소를 받아적는다. 한 아기에게 다가가 재미있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아기는 울음을 터뜨린다. 알렉스는 TV를 켠다.

 

TV 속 곰: 잘 자, 니꼴라! 잘 자, 빵빠니엘!

TV 속 인형: 우리 이름을 아나요, 곰 아저씨?

TV 속 곰: 물론이지.

TV 속 인형: 내일도 와서 놀아줄 거예요.

TV 속 곰: 지금, 어서 잠자리에 든다면! 잘 자라, 니꼴라, 빵빠니엘! 여러분, 모두 잘 자요. 이제 잠들 시간이에요. 부모님께 뽀뽀하고요...내일 밤 다시 만나요. 잘 자요! 안녕!

 

버튼을 누르자 화면이 지지직거리더니 가발을 벗은 채로 고통에 접질린 엘렌의 모습이 나타난다. 화면 속의 엘렌은 오빠가 보고 싶다고 울부짖는다. 

 

알렉스는 비디오를 끄고 복도의 방들을 뒤진다. 미레이유가 가위로 자살을 시도하고 있다. 알렉스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온다. 미레이유는 문닫는 소리에 깜짝 놀라 가위를 숨긴다. 


 

알렉스가 부엌에서 우유를 꺼내 마시고 있는데 엘렌이 들어온다.

 

엘렌: 닭고기값이 이렇게 올라서야. 1킬로그램에 200프랑이래. 기가 막혀서…

 

엘렌은 커다란 케이크를 꺼내 촛불을 붙인다.

 

엘렌: 베르나르와 똑같아. 그도 파티 땐 부엌에 숨지, 혼자서! 잔을 줄게! 잔이 없네. 전부 거실로 나갔어. 이 컵 밖에 안 남았어. 이건 나 혼자만 쓰는 컵이지. 이건 내 전용이야. 이 컵으론 나만 마셨지. 내 오빠인 스땅도 쓰지 않았어. 오빠가 이태리에서 사다 준 거야. 오빤 여러 곳을 여행했지. 어릴 때부터 우리가 헤어져 있을 때면 텔레파시로 밤에 만나곤 했어. 정확히 10시에… 난 열심히 오빠를 생각했고 오빠도 열심히내 생각을 했어. 그런데 3년 전, 오빠와의 텔레파시를 깜빡했어. 오빠가 독일에 출장 중이었는데 그 후론 볼 수가 없었지. 독일 고속도로에서 죽었던 거야. 차 안에서… 완전히 죽어 있었대. (잠시 침묵 뒤) 내 컵을 조심해줘 알렉산더.

 

엘렌은 겨우 하루 동안 텔레파시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빠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소통이 없는 삶은 죽음과도 같다는 비유일지도 모른다.


 

엘렌은 컵에 우유를 따라 알렉스에게 건네준다. 알렉스는 컵의 깨진 틈새로 우유를 마신다. 이때 갑자기 머리를 사내아이처럼 짧게 자른 미레이유가 선글라스를 끼고 부엌으로 들어온다. 미레이유는 의자에 걸터앉은 뒤 문고본을 펼쳐든다. 

 

엘렌: 미레이유? 머리가… 세상에! 다음에 그런 일을 하려면 내 집에선 하지 말아줘. 베르나르 몰래 그런 짓을 하다니… 그가 화낼 거다.

 

미레이유: 베르나르는 상관 않을 거예요. 걱정 마세요.

 

엘렌: (촛불을 켠 케익을 들고 나가며) 그것 봐! 깨진 틈새로 마시니까 좋지?

 

알렉스는 주전자에 물을 받아 끓이고 미레이유는 일어나 선글라스를 벗는다. 마스카라가 눈물을 타고 번져 눈 밑이 온통 새까맣다. 미레이유는 손수건으로 눈 밑을 닦는다. 알렉스는 미레이유가 읽고 있던 문고본을 펼쳐본다.

 

알렉스: 난 낙오자가 될 거야. 내게 기회는 있었어. 난 뛰어난 사람이 되고 싶었어. 비행사, 여행가, 음악가… 다시 태어날 순 없을까?

미레이유: (주전자의 물 끓는 소리 때문에 듣지 못했다) 응?

알렉스: 난 낙오자가 될 거야. 기회가 있었지. 난 뛰어난 사람이 되고 싶었어. 비행사, 여행가, 음악가… 다시 태어날 순 없을까?

 

알렉스는 레인지의 불을 끄고 주전자를 가져온다. 미레이유는 책을 읽고 있다. 알렉스는 미레이유 옆에 앉는다.

 

알렉스: 우린 처음 만났어. 내겐 처음만이 중요해.

미레이유: 그럼 오래 가지 않겠네.

알렉스: 내게 애가 있다면 말을 배운 순간부터 무시할 거야. 몇 년간 섹스를 갈망해 왔어. 그런데 실제로 해보니까 전혀 반대였어. 난 꿈을 이루려 애쓰지 않고 꿈만 꿔왔어. 차 마시겠어?

 

알렉스는 미레이유가 자살 시도하는 것을 훔쳐봤다고 털어놓는다.

 

알렉스: 난 내일 입대해야 해.

미레이유: 나라면 안 갈 거야.

알렉스: 맞아, 가서 뭐해? 우린 이미 베테랑인데? 이미 갱년기야. 난 급해! 난 정복자를 좋아해. 군대 정신과 의사들도 내 말을 인정했어. 난 타인과 함께 있으면 잠을 못 자기 때문에 군대 생활에 부적격이라고 했지. 그래도 안 된대. 군대는 잠을 자는 곳이 아니라나, 그래서 가야 해.

 

두 사람은 잠시 대화를 나눈다.


 

알렉스: 외로울 땐 강박관념에 빠지기 쉽지. 난 할 일이 많아 둘이 해도 모자랄 거야. 내 인생은 한편의 자서전 같아. 1960년 파리에서 출생 2040년 파리에서 사망. 지난주에 꿈을 꿨어. 꿈속에서 난 잠들어 있다가 깨어났는데 담요 아래 책이 있는 거야. 처음 보는 책이었어. 슬쩍 보니 그건 내 자서전이었어. 미완성의 자서전을 쓰다가 죽은 거지.

미레이유: (술을 따르며) 마실래?

알렉스: 술은 안 마셔. 플로랑스는 날 미친 듯이 사랑했어.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보다 많이.

 

초기에는 베르나르가 미레이유를 더 많이 사랑했고 동등하게 사랑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듯이 알렉스와 플로랑스 사이에도 사랑의 강도가 같지는 않았다. 미레이유가 마음을 열자 베르나르는 정복해버린 산처럼 미레이유에게 싫증을 느낀다. 플로랑스도 뜨거웠던 사랑이 식자 알렉스를 버린다.

 

알렉스: 그 사랑이 식자 날 버린 거야. 사흘 전 떠나면서 모든 짐을 갖고 갔어. 내가 보낸 편지도 가져가려 했지만 그건 내 거라고 말했어. 내가 썼으니까 내 거지. 결국 내가 졌어. 하지만 복사해 놓은 건 몰랐을 거야. 이 스카프는 그녀가 유일하게 남긴 거야. 너무나 그녀다운 거지. 정말 그럴까, 미레이유?

 

그 스카프는 플로랑스의 것이 아니다. 미레이유는 테이블에 엎드려 자고 있다. 알렉스는 미레이유를 내려다보다가 조심스럽게 머리를 쓰다듬는다.

 

미레이유: (잠에서 깨어나며) 악몽을 꿨어. 한밤중이네! 이 노래 알아?

 

당신이 떠난 후

수많은 세월이 흘렀네

마지막 이별이라 했는데

부숴진 내 마음에 마지막 고통이라 했는데

달콤한 바람이 부는

봄이 되면 돌아온다던 당신

꽃피는 초원에서 만나

파리의 거리를 휘젓고 다니자더니

난 아직도 당신을 사랑해

나홀로 언제까지나 사랑해

정녕 당신의 길을 가겠다면

난 행복했던 날의 기억만 지닌 채

웃으며 떠날 수 있어

다른 곳에서 햇빛을 맞을 거야

슬픔도 내 생명을 앗아갈 순 없어

내게 선원의 아내 같은 인내심은 없다네

 

미레이유: 그는 늦게 돌아왔어. 난 자고 있었고 그는 어두운 내 침대 곁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어. 열쇠 소리에 깼지만 난 자는 척했어. 그의 눈길이 느껴졌지 아주 집요한… 처음이 아니었어. 그리곤… 내 침대에 들어와… 내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날 사랑했어. 그는 그런 식을 좋아했어. 때론 이런 말도 했지. 우리 죽은 척해볼까? 그를 만난 건… 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였어. 너무나 편안한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내가 모르는 일까지도 그에겐 모든 게 문제야. 나의 과거, 미래, 현재 죽음까지도… 아버진 그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가끔 궁금해. 그리고 지금의 내 모습을… 난… 그냥 나야.

미레이유: 너무 늦었어.

 

알렉스는 미레이유의 팔에 얼굴을 갖다댄다.

 

알렉스: 오늘이 떠나야 할 날이야.

미레이유: 모두 가고 우리만 남았어. 가야겠어.

 

엘렌이 그들을 들여다보고 사라진다. 알렉스가 문을 닫는다.

 

알렉스: 당신과의 시간이 꿈같이 느껴져. 평범하지 않은 꿈. 깊이 잠들어야 꿀 수 있는 꿈. 당신 옆에 앉아 있는 게 영원처럼 느껴져. 당신을 본 순간 운명처럼 당신을 사랑하게 됐어. 딱 한 번만 얘기할게. 사랑해, 미레이유.

 

이때 갑자기 미레이유를 향해 자세를 트는 알렉스 때문에 엘렌의 소중한 컵이 깨져 바닥에 나뒹군다. 오빠 스탕과의 소통을 이어주는 바로 그 컵이다. 깨진 컵은 소통 불가능성을 상징한다.

 

알렉스: 그 무엇보다도! 우린 사랑해야 해. 그걸 모른다면… 너무 늦는 거야. 못 들은 척해. 침묵할 때야. 20년간 떠들었으니 침묵해야지.

 

알렉스: 두고 봐, 미레이유. 후회 없는 사랑, 망설임 없는 사랑이 될 거야. 오라면 오고 웃으라면 웃을게. 원하는 만큼 함께 잠을 자고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팀을 이뤄 함께 일하고 우리의 운명이 무엇이든 뛰어들 거야. 우리의 힘을 보고 플로랑스도 합류할지 몰라. 당신과 플로랑스와 나! 난 양쪽을 오가고… 너무 멋질 거야. 왔다 갔다… 혼자선 자신의 껍질을 깰 수 없어. 함께라면 할 수 있어. 파리를, 아니 프랑스를 떠나는 거야. 나에 대한 사랑으로 당신은 더이상 자신을 파괴하지 않고 피의 따스함과 평온한 현실, 명료한 지각과 유연한 감정을 존중하고, 당신에게 존재하는 우울증은 사라질 거야. 내가 정신적 배설인 독백을 멈출 수만 있다면 내 고뇌를 음악에 담지 않고 내 연인을 언어로 매장하진 않을 거야. 하지만 내가 입을 다물면 그녀는 자살할 거야.  


알렉스의 대사들은 앞뒤가 맞지 않다.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게끔 말하려는 노력을 포기했기 때문인 듯하다. 그 때문에 그의 표정에서는 광기가 느껴진다. 알렉스의 독백은 자기중심적이고 미레이유는 마음을 열지 못한다.

 

알렉스의 독백은 계속되지만 장소는 전차 안으로 바뀌어 있다. 알렉스는 졸고 있다. 미레이유가 그 모습을 바라본다.

 

알렉스: 키스도 우리의 입술을 봉하지 못해. 내게 날개를 줘. 몸이 1톤은 되는 것 같아. 트럭도 아닌데 말야! 난 결코 다시 생을 살진 않겠어, 결코!

 

이때 뒤따라오던 버스 안에 서있던 베르나르가 미레이유와 알렉스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짓는다.

 

알렉스: (잠에서 깨어나) 미안해, 화장실에 다녀올게.

 

가게 앞에서 어떤 남자가 게임기를 작동시키고 있다. 남자가 게임을 끝내자 알렉스는 동전을 넣고 게임을 시작한다.

 

남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하죠. 2프랑이 아니라 3프랑이오. 물가는 계속 오르는데 인생은 그렇지가 않죠.

 

남자와 알렉스의 게임 릴레이가 이어진다. 성공할 때는 환희에 찬 표정을 짓기도 하고 실패할 때는 인상을 쓰기도 한다. 그러나 두 사람 다 실패한다.

 

기계: 다시 시도해 보십시오.

 

남자는 좌절해서 소리를 지르며 털썩 주저앉는다.


남자: 이거나 먹어라! 할 만큼 했어! 다신 안 한다. 다신 속지 않겠어. 끝이야! 저놈은 지치지도 않는군. 이젠 애인에게로 돌아가겠지! 실력이 없어 모든 걸 잃었지만 내일이면 또 하게 될 거야. 놈은 애인의 침대에서 그녀의 팔을 베고 자겠지! 안녕!

 

기계: 다시 시도해…

 

게임은 인생에 대한 은유와도 같다. 삶은 시지프 신화처럼 아무리 돌을 굴려 언덕 위로 올려놓아도 금방 아래로 떨어져버리고 마는 부조리함의 연속이다. 그러나 해탈은 불가능하고 또다시 소통할 사람을 찾아 헤매고 사랑에 빠지고 전보다 더 큰 상처를 입고 다시 물러선다. 그러는 동안에도 위정자들의 헤게모니는 기계음처럼 단조롭게 ‘다시 시도하라’고 말한다. 모든 사람은 다시 사랑할 것인가, 영원히 단절될 것인가의 딜레마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며 인생을 보내고 있다.


 

알렉스는 공중전화 수화기를 집어들고 미레이유의 집 전화번호를 누른다. 미레이유는 욕조에 물을 받으면서 마당의 접이식 의자에 걸터앉아 있다.

 

미레이유: 난 여기 없어, 베르나르. 절대 없어.

 

미레이유가 전화를 받지 않자 불안해진 알렉스는 그녀의 집주소로 달려간다. 미레이유는 날 선 가위를 손에 쥐고 있고 욕조에는 물이 넘쳐흐르고 있다. 알렉스는 노크를 하려다 말고 마이떼의 스카프로 얼굴을 가리고 방으로 들어간다.

 

알렉스: 미레이유, 알렉스야.

 

알렉스가 미레이유를 끌어앉는다. 자살에 실패한 미레이유가 입술에 피를 묻히고 알렉스를 돌아본다.

 

미레이유: 알렉스, 도와줘… 여기서 나가게 해줘…


 

알렉스는 마당에서 뻗어버린다. 의자에 앉아 있던 미레이유도 같이 뻗어버린다. 그들과는 상관없이, 세상을 잊은 듯 행복해 보이는 이웃집 연인들이 클로즈업된다. 머리 위로 빛나는 별이 보인다. 미레이유는 다시 방 안의 의자에 앉는다.

 

미레이유: 베르나르… 이제 난 널 떠난다.

 

알렉스가 들어오는 소리에 미레이유는 가위를 뱃속에 숨긴다. 그것도 모르고 알렉스는 미레이유를 뒤에서 꽉 끌어안는다. 가위는 미레이유의 뱃속을 파고들며 하얀 옷을 온통 피로 물들인다. 


 


이 결말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하얀 옷이 피로 물드는 장면은 알렉스가 실수로 미레이유를 살해했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어설픈 소통의 시도는 죽음에 버금갈 만큼 치명적이다. 관객들과 평론가들은 이 영화가 소통의 불가능성, 사랑의 불가능성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레오 까락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랑의 불가능함을 그리는 것은 그만큼 사랑의 간절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작가의 이전글 노르웨이 숲 -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