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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ly Feb 16. 2024

스모크 (1995)



재개발 붐이 일기 전 1990년 뉴욕의 브루클린, 음료와 잡화와 신문, 담배 등을 파는 가게에서 허름한 차림의 손님들이 야구, 정치, 여자 같은 시시콜콜한 주제로 잠담을 나누고 있었다. 소설가 폴 벤자민은 담배를 사고 값을 치르면서 담배 연기의 무게를 재는 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롤리 경이란 사람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나? (…) 월터 롤리는 영국에 담배를 처음 가져온 사람이었지. 여왕을 베스라고 부를 만큼 여왕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었어. 흡연은 궁중에서 유행처럼 급속도로 퍼져나갔다네. 여왕도 월터와 담배를 피며 몇 번이나 황홀경을 맛보았을 걸. 한 번은 여왕이 내기를 건 적이 있어. 담배 연기의 무게를 재는 것에 대해서 말이지. 그건 사람의 영혼을 재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 같았지만 월터 경은 영리한 사람이었어. 우선, 피우지 않은 시가를 저울에 올려 무게를 쟀어. 불을 붙인 뒤 시가를 피우면서 저울 위에 재를 조심스럽게 떨구었지. 다 피우고 남은 꽁초도 저울 위에 재와 같이 놓고 무게를 달았어. 그런 다음 피우지 않은 시가의 무게에서 그 무게를 뺀 거야. 남은 값이 연기의 무게가 되는 거지.'     


폴 벤자민이 나가고 난 뒤 가게에 남아 있던 손님들은 점원에게 폴이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점원인 오기는 폴이 한때 잘 나가는 작가였지만 아내가 총에 맞아 죽은 뒤로는 거의 폐인처럼 살고 있다고 대답했다. 강도들이 길거리에서 총격전을 벌였을 때 길을 걷던 폴의 아내도 총에 맞았다. 그녀는 임신중이었는데 남편을 위해 오기의 가게에 담배를 사러 왔었다고 했다.     


'난 가끔 이런 생각을 해. 그 여자가 큰돈을 내서 내가 거스름돈을 주거나 시간을 끌었거나 이 가게에 손님이 좀 더 많았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더라면 몇 초 늦게 가게를 나갔을 거고 총알받이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 여자는 아직 살아 있을 거고 아기가 태어났을 거고 폴은 지금처럼 숙취에 시달리며 거리를 헤매는 대신 집에 앉아서 또 다른 책을 쓰고 있을 거야.'     


담뱃가게를 나와 길을 걷던 폴 벤자민은 하마터면 달려오던 차에 치일 뻔했다. 반대쪽에서 걸어오던 십대 소년 라시드가 재빨리 그를 밀치지 않았더라면 아마 죽었을 것이다. 부모 없이 친척집에서 살고 있던 라시드는 우연히 친아버지의 주소를 알아내게 되었다. 라시드는 친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친척에게는 말도 없이 집을 나온 참이었다. 폴은 라시드가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며칠간 자기 집에서 묵는 것을 허락한다. 그런데 라시드는 근처 갱단이 추격전을 벌일 때 흘리고 간 돈다발을 몰래 주워 보관하고 있었다. 폴에게는 그 사실을 비밀로 한 채, 라시드는 폴의 서재에 그 돈다발을 숨겼다.     


늦은 저녁 담배 가게에 들른 폴은 카운터에서 고풍스러워보이는 카메라를 발견했다. 그 카메라는 오기의 것이었다. 이날 폴은 처음으로 오기가 찍은 사진들을 보게 되었다. 12년 동안 매일 아침 7시, 애틀랜틱 애브뉴와 클린턴 스트리트가 만나는 모퉁이에서 정확하게 같은 앵글로 한 장씩 찍은 사진들이었다. 한 해 분량이 앨범 한 권이었고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순서대로 정리되어 있었다. 사진 밑에는 날짜가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모든 사진들이 다 똑같았다. 똑같은 거리와 똑같은 빌딩들의 반복이 나를 멍하게 만들었고, 지나치게 많은 이미지들이 무자비하게 밀고 들어와서 착란 상태가 될 지경이었다.'      


'너무 빨리 보고 있어. 천천히 봐야 이해가 된다고.'     


오기의 조언을 듣고, 폴은 다 같아 보이는 사진 속 날씨의 변화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계절이 변함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는 빛의 각도를 주시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기적처럼, 조금씩 달라지는 거리의 흐름 속에서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 폴은 전율을 느꼈다. 그러다 어떤 사진 속에 죽은 아내의 모습이 찍혀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아내는 어느 날 아침 7시에 애틀랜틱 애브뉴와 클린턴 스트리트가 만나는 모퉁이를 지난 적이 있었던 것이다. 사진을 보는 순간 폴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매일 비슷한 삶을 사는 것 같지만 삶은 하루하루 다 다르다. 오기의 사진은 그 비슷비슷한 일상을 천천히, 주의 깊게, 애정 어린 시선으로 음미하는 사람만이 발견할 수 있는 보물 같은 것이었다. 오기는 담뱃가게 점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진정한 예술가이기도 했다.     


오기는 사실 한몫 잡기 위해 남몰래 시가 밀수꾼과 거래하고 있었다. 최고급 쿠바산 시가를 들여왔을 무렵 젊은 시절 애인이었던 루비라는 여자가 그를 찾아왔다. 루비는 오래전에 오기의 딸을 낳았었다는 엄청난 사실을 털어놓았다. 펠러시티(행복이라는 뜻)라는 이름의 그 딸은 약물중독으로 폐인이 된 데다 가출해서 임신까지 한 상태라고 했다. 딸이 자기에게 너무도 적대적이어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며 루비는 눈물을 흘렸다. 오기는 펠러시티가 자기 딸이라는 루비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한 번만 만나달라는 그녀의 요청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펠러시티는 가구조차 없는 낡은 아파트에서 똑같이 구제불능인 어떤 젊은 남자와 동거중이었다. 그녀는 자기 엄마와 오기에게 거친 욕설과 조롱을 늘어놓으며 마음을 열기를 거부한다.     


라시드는 친아버지 사일러스가 운영하는 주유소를 찾아가 아들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한 동안 그의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잠깐 동안의 아르바이트가 끝이 나자 폴은 오기에게 라시드를 소개시켜 주었다. 그렇게 해서 라시드는 오기가 일하는 담뱃가게에서 일하게 되었다. 오기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라시드가 빈둥거리며 잡지를 읽는 동안 오기가 밀수해온 최고급 시가가 물에 젖어 못 쓰게 되어버렸다. 시가는 오기가 거의 전재산을 털어서 산 것이었다. 오기에게 돌이킬 수 없는 손해를 입힌 라시드는 낙담한 나머지 다시 가출해서 친아버지가 있는 주유소로 돌아간다.     


라시드가 가출한 사이 갱들이 폴의 아파트로 들이닥쳤다. 갱들은 폴을 마구 두들겨패면서 돈의 행방을 추궁했지만 폴은 모른다고 잡아뗀다. 아파트로 돌아온 라시드에게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폴은 그 돈으로 오기에게 입힌 손해를 보상하라고 말한다. 오기와 폴과 라시드, 세 사람은 테이블 위에 돈을 올려놓고 인생의 아이러니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린다. 오기는 기적처럼 되찾은 그 돈을  펠러시티가 자기 딸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루비에게 줘버린다. 


라시드가 주유소에서 일하는 동안 오기와 폴이 주유소를 찾아왔다. 라시드가 자기 아들임을 깨달은 사일러스는 충격을 받고 라시드에게 주먹질을 하다가 주저앉아 오열하기 시작한다.     


이런 일련의 에피소드들이 이어진 뒤, 오기는 자기가 어쩌다 사진을 찍게 되었는지를 폴에게 들려주었다. 오기는 오래전 어느 크리스마스에 우연히 카메라를 손에 넣게 되었다. 사실 이 소설은 작가인 폴 오스터가 크리스마스 우화를 써줄 것을 청탁받아 집필한 것이다. 영화에서는 오기가 과거를 회상하는 이 마지막 장면들을 흑백으로 압축해서 보여준다. 배경음악으로는 탐 웨이츠의 ‘Innocent when you dream’이 흘러나온다. 담뱃가게에서 물건을 훔친 좀도둑을 쫓던 오기는 좀도둑이 떨어뜨리고 간 지갑을 주웠다. 지갑 속 신분증에 적힌 주소는 브루클린의 어떤 낡은 임대아파트였다. 오기가 그 집을 찾아갔더니 크리스마스인데도 집에는 눈먼 노파 한 사람밖에 없었다. 노파는 현관문 앞에 서 있는 오기에게 크리스마스에는 네가 돌아올 줄 알았다며 맛있는 요리를 해놨으니 들어오라고 말한다. 할머니는 오기가 손자가 아닌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일종의 연기를 하고 있었고 얼떨결에 오기도 진짜 손자인 것처럼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건 할머니와 나 사이의 일종의 게임이었지.'   


둘은 포도주와 치킨과 감자샐러드, 야채수프 등 따뜻한 저녁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할머니는 곧 소파 위에서 잠이 들었다. 지갑을 도로 놓고 돌아오려던 오기는 화장실에 갔다가 선반에서 장물일 게 분명한 카메라들을 보게 되었다. 그는 왜인지도 알지 못한 채 지갑을 거기 올려놓고 35㎜ 카메라 하나를 들고 나왔다. 그 뒤로 날마다 사진을 찍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가 다시 그 아파트를 방문했을 때 할머니는 거기 없었고 새로운 사람들이 이사 와서 살고 있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흘러나오는 배경음악 ‘Innocent when you dream’은 ‘꿈을 꿀 때 당신은 순수하다’는 뜻이다. 어쩌면 이 노래는 ‘꿈을 꿀 때, 즉, 당신이 몽상가적인 어떤 행동을 할 때 그 행동이 어떻든 사실 당신은 순수하다’는 의미로 선택한 곡인지도 모른다. 오기는 카메라를 훔쳤지만 그의 좀도둑질은 사소한 것이다. '종탑 안엔 박쥐들이 있고, 황무지엔 이슬이 맺히는데, 나를 붙들고 그녀의 사랑을 맹세하던 그 팔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이냐. 지금 내가 훔쳐내는 것들은 옛 추억들….' 과거를 회상하며 꿈이 남아 있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절규하는 듯한 목소리로 노래한 곡이다. 탐 웨이츠는 듣기만 해도 담배와 위스키에 찌든 듯한 허스키한 목소리의 소유자이다.     


탐 웨이츠의 목소리, 자욱한 담배 연기와 아직 옛 분위기가 남아 있는 뉴욕의 낡았지만 운치 있는 브루클린의 거리들, 흑백 필름과 낡은 카메라,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이야기들. 주인공들은 각자의 삶을 사는 동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 여자가 큰돈을 내서 내가 거스름돈을 주거나 시간을 끌었거나 이 가게에 손님이 좀 더 많았더라면 (…) 몇 초 늦게 가게를 나갔을 거고 총알받이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 여자는 아직 살아 있을 거고 아기가 태어났을 거고 폴은 지금처럼 숙취에 시달리며 거리를 헤매는 대신 집에 앉아서 또 다른 책을 쓰고 있을 거야’라는 오기의 말처럼 이 소설 속에는 거듭되는 우연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만약 오기가 사진을 찍지 않았더라면 그의 사진 속에 폴의 아내가 찍히지도 않았을 것이고 폴이 라시드를 집으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담배가 물에 젖지도 않았을 것이고 라시드가 담배 젖은 값을 보상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오기가 그 돈을 루비에게 주지도 않았을 것이며 이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탄생하지도 않앗을 것이다. 그것은 담배 연기처럼 정해져 있지 않은, 유기적인 사람들 사이의 운명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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