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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ly Jul 04. 2023

노르웨이 숲 - 무라카미 하루키

영화 '노르웨이 숲'



<노르웨이 숲>은 퍽 유명해서 누구나 한 번쯤은 읽어보았거나 적어도 들어보았을 법한 소설이다. 이 책이 인기가 많은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애절하면서도 허무한 그 특유의 정서와 60년대 후반 도쿄의 센치하고 도시적인 분위기를 음악, 음식 같은 기호들을 통해 감각적으로 묘사한 것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붐비는 일요일의 거리는 나를 진정시켜 주었다. 나는 통근 전철처럼 혼잡한 기노쿠니야 서점에서 포크너의 <8월의 빛>을 사들고, 가급적 소리가 클 듯싶은 재즈 다방으로 찾아 들어가, 오네트 콜만이라든가 버드 파웰의 레코드를 들으면서, 뜨겁고 진하고 맛없는 커피를 마셨고, 방금 산 책을 읽었다.’     


많은 사람들이 재기발랄하고 생기 넘치는 여주인공 미도리를 이 소설의 또 다른 매력 포인트로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니까 만일 자기가 나를 갑자기 어딘가 먼 곳으로 데려다 준다면, 난 자기를 위해 소처럼 튼튼한 아기를 잔뜩 낳아 줄 거야, 그리고 모두들 즐겁게 지내는 거야. 마룻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니면서 말이지’ 같은 대사를 내뱉는 그녀는 이 소설의 마스코트와도 같다. 그 유명한 ‘봄날의 곰’이라는 표현도 남자주인공 와타나베와 미도리의 대화 속에서 나온 것이다.      


"얼마만큼 좋아?"

"봄날의 곰만큼"

"봄날의 곰? 그게 무슨 말이야, 봄날의 곰이라니?"

"봄날의 들판을 네가 혼자 거닐고 있으면 말이지, 저쪽에서 벨벳처럼 털이 부드럽고 눈이 또랑또랑한 귀여운 아기 곰이 다가오는 거야. 그리고 네게 이러는 거야. 안녕하세요, 아가씨. 나와 함께 뒹굴기 놀이 안 할래요? 하고. 그래서 너와 아기 곰은 서로 부둥켜안고 클로버가 무성한 언덕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온종일 노는 거야. 어때, 멋지지?"

"아주 멋져."

"그만큼 네가 좋아."      


그런데 나는 이 소설의 다른 여주인공 나오코를 훨씬 더 좋아한다. 또 주인공 와타나베의 기숙사 선배인 나가사와. 나가사와의 경우 능력 면에서는 일반인을 아득히 뛰어넘는 초인이지만 인성 면에서는 악인에 가깝게 묘사되어 있는데 그 사고의 깊이를 이해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아서 아쉬웠다. 나오코와 나가사와는 서로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고 그 어떠한 접점도 없지만 내게는 이 두 사람이 서로의 정신적 쌍생아로 나란히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만 현실 세계에서 두 사람이 처해 있는 상황은 정반대에 가깝다. 그래서 나오코와 나가사와 위주로, 그리고 책임과 의무와 구속이라는 관점에서 이 소설을 다시 한 번 바라보고 싶어졌다. 하루키 자신도 한국어판 서문에서 말했듯이 이 소설은 결국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을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은 자아의 무게에 맞서는 것인 동시에, 외부 사회의 무게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참 가슴 아픈 일이지만, 누구나 그 싸움에서 살아남게 되는 건 아닙니다.’     


이 말은 하루키 자신은 그 싸움에서 실패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이 소설이 자전적인 작품이라는 점에서 -나오코는 끝내 죽음을 택했다- 그것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자신을 잊지 말아 달라는 나오코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와타나베는 이십 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녀의 존재를 거의 잊어버리고 살았다. 나오코는 생전에 마음의 병을 얻어 산속의 요양 시설에 머물고 있었고 와타나베는 도쿄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나오코는 적절한 때 그에게 애인 노릇을 해줄 수 없었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밥벌이도 해야 하고 시간을 투자해서 해야 할 일들이 있다. 무엇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사회에 속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세상은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연인을 둔 사람은 필연적으로 사회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다. 도움이 필요한 존재를 곁에 둔다는 것은 때에 따라서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다. 자신만을 위한 삶의 비중은 줄어들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루키가 말한 대로 ‘사람을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은 자아의 무게에 맞서는 것인 동시에, 외부 사회의 무게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며 ‘누구나 그 싸움에서 살아남게 되는 건 아닌 것’이다.     

 

와타나베는 오랫동안 나오코를 잊고 지내다가 보잉747 비행기가 함부르크 공항에 착륙할 때 배경음악으로 비틀즈의 ‘노르웨이 숲’이 흘러나오자 불현듯 그녀를 떠올리고 현기증을 느낀다. ‘노르웨이 숲’은 나오코가 가장 좋아했던 곡이기 때문이다. 사실 나오코는 “이 곡을 들으면 난 가끔 무척 슬퍼질 때가 있어. 왜 그런지 모르지만 내가 깊은 숲속에서 길을 잃은 것 같은 감정이 들곤 해”라고 말했었다. “외롭고 춥고, 그리고 어둡고, 아무도 구해 주는 사람도 없고.” ‘노르웨이 숲’뿐만 아니라 뒤에 등장하는 우물에 대해 설명할 때도 나오코는 그와 비슷한 공포와 고립감을 호소한다.     


나오코를 생각할 때 와타나베는 1969년의 가을, 초원 속의 풀냄새와 살갗에 와닿는 바람, 새소리 등을 자연스럽게 함께 떠올린다.     


‘며칠인가 계속된 부드러운 비로, 여름 동안 쌓였던 먼지가 말끔히 씻겨 내려간 산은 깊고 선연한 푸르름을 머금고 있었고, 10월의 바람에 억새풀 이삭이 한들거리고 있었으며, 기다란 구름이 얼음장처럼 투명한 창공에 떠 있었다. 하늘이 너무나 높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으면 눈이 아파 올 지경이었다. 바람은 초원을 건너 그녀의 머리카락을 잔잔히 흔들고는 잡목 숲으로 빠져 나갔다. 

나뭇잎들이 사각거리고, 먼 곳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다른 세계의 입구로부터 들려오는 것만 같은, 희미하고 어렴풋한 울음소리였다. 그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어떤 소리도 우리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나오코는 내게 들판에 있는 우물 이야길 했다.’     


“그건 정말정말 깊단 말이야” 하고 나오코는 신중하게 어휘를 골라 가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정말 위험하잖아. 어딘가에 깊은 우물이 있다, 그런데 그게 어디에 있는진 아무도 모른다…… 그럼 거기에 빠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지?”     

“가끔 일어나지, 2년 또는 3년에 한 번쯤…… 어떤 사람이 갑자기 없어졌어, 아무리 찾아도 없는 거야, 그렇게 되면 이 근처 사람들은 말하겠지. 들판의 우물에 빠진 거라구.”     

“그냥 목뼈라도 부러져 깨끗이 죽어 버리면 좋겠지만, 어쩌다가 발을 삔 정도로 끝난다면 정말 난처하거든. 소리소리 질러 보아도 누구 하나 듣는 사람도 없고, 누군가 발견해 줄 가망도 없고. 사방엔 지네나 거미가 우글우글하고, 거기서 죽어 간 사람들의 해골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고, 어둡고 축축하고…… 그리고 저 높이 머리 위엔 빛의 동그라미가 마치 겨울 달처럼 조그맣게 떠있겠지. 그런 곳에서 혼자 서서히 죽어 가는 거야.” 


상상 속의 이 우물은 세상의 온갖 암흑을 응축해 놓은 것 같은 그런 우물이다. 그런데 이 우물은 분명 실존한다. 우물은 오래전부터 세계 각지에서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누군가를 살해할 때 자주 이용하던 구조물이었다. 영화 링에서도 여자주인공이 모진 고초를 당하다가 빈 우물에 던져져 살해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자주인공 사다코는 우물 속에서 죽지도 못하고 40년 동안이나 이끼를 먹으면서 연명한다. 어둡고 깊은 우물 속에서 혼자 40년이나 살아있고 싶지는 않았겠지만 죽음의 고통이 상상외로 너무도 처절해서 자기도 모르게 이끼를 긁어먹었는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우물 속에 혼자 갇히는 것 같은 상황이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같은 인간하고 밖에 소통할 수 없다. 동물이나 식물, 물이나 공기와는 말이 통하지 않으니 내가 여기 갇혀 있다고 누구에게 알리거나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다. 생각해 보면 인간의 삶 자체가 일종의 (소통이 부재한다는 의미에서) 단절이다.     


세계에서 공포영화를 가장 무섭게 만드는 나라는 일본, 그 다음은 한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 두 나라와 비교하면 타국의 귀신은 순한 맛이다. 일본과 한국 특유의 그 귀기 어린 정서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공포영화에는 일종의 공식이 있는데 반드시 충격적일 만큼 악랄하고 부조리한 어떤 상황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가 한을 품고 복수를 계획하거나 죽어서 남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나오코가 상상하는 그 무서운 우물은 나오코의 무의식, 혹은 유전자에 각인된 생에 대한 인식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인간의 삶과 사회가 얼마나 어둡고 무서운 것인지에 대한 본능적인 자각이다. 겉으로는 평온하지만 그 일상을 한 꺼풀만 벗겨보면 일본이 얼마나 잔혹하고 비정상적인 사회인지를 알 수 있다. 이지메를 당하면 죽어야 끝나는 무라하치부, 사소한 이득을 위해 끝없이 뒤통수 치고 배신하는 사무라이 간 권력 다툼, 악명 높은 영아 살해 관습인 마비키, 나이 든 부모를 갖다 버리는 우바스테야마 등 온갖 악습과 부조리가 가득하다. 사회 자체가 공포영화보다 더 무섭고, 그런 점에서는 한국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런 세상에서 개인이 발 한 번 잘못 삐끗하면 바로 우물과 같은 무시무시한 상황에 맞닥뜨릴 수 있다. 우물이란 곧 고립인데 위기 상황에서 편이 되어줄 사람이 없다면 우물은 실존하는 것이다. 피상적으로 사고하는 대다수 사람들은 아무런 이유 없이 우물에 대해 생각하며 공포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그런데 자신이 나락까지 떨어졌을 때 도와줄 사람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각박하고 비정한 사회일수록 자신 외에는 믿고 의지할 사람이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것이 각자도생의 사회다. 나오코는 2년 혹은 3년에 한 번쯤은 사람이 갑자기 없어진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누군가가 우물에 빠지는 것 같은 비극이 실제로 일어났고/일어나고 있다는 공포스러운 자각이다. 언제든 우물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신뢰를 상실했다는 뜻이며 자신은 완전히 혼자라는 뜻이다. 나오코에게는 언니가 있었는데 그녀는 고등학생 때 갑자기 목을 매 자살했다. 그녀의 시신을 제일 처음 발견한 사람도 나오코였다.      


‘언니는 뭘해도 일등을 차지하는 타입이었다고 나오코는 말했다. 공부도 일등, 운동도 일등, 인기가 있는가 하면 지도력도 있고, 친절한데도 성격도 시원시원해서 남학생들이 좋아했고, 선생님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으며, 표창장도 수없이 많은 받은 여자였다.

어떤 공립 학교에나 그런 여학생은 하나쯤 있다. 그렇지만 자기 언니라고 해서 하는 말이 아니고, 그런 걸로 성격이 나빠지거나 콧대를 세우는 사람도 아니었다.’     


‘다들 그애는 머리가 지나치게 좋았다느니 책을 지나치게 많이 읽었다느니 하고들 말했어. 책은 사실 많이 읽고 있었던 것 같아. 엄청나게 책이 많았으니까.’      


같은 핏줄이었으니 나오코 역시도 머리가 좋고 생각이 깊은 면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깊이 생각해 보면 인간의 삶의 조건이 얼마나 부조리한지를 자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게다가 나오코의 소꿉친구이자 와타나베의 유일한 친구였던 기즈키마저 17세의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나오코는 우물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에 이렇게 말한다.   

  

“너와 이렇게 꼭 붙어 있는 한 나도 절대로 빠지지 않을 테고.”      

그러자 와타나베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럼 문제는 간단하잖아. 그냥 죽 이렇게 하고만 있으면 그만일 테니까.”

“그거 – 진심이야?”

“물론 진심이지.”     


와타나베는 고립감에 떨고 있는 나오코에게 ‘내가 인생을 바쳐 너를 구해 줄게’라고 말한 것이다. 물론 그런 의도로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죽 이렇게 하고 있는 데’는 평생이 걸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구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엄청난 무게감을 갖는 일이다. 이런 말을 하기 위해서는 아주 오래 진지하게 고민한 뒤에 해야 하지만 와타나베는 그저 나오코를 안심시키기 위해 별 생각 없이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그러자 나오코는 그 즉시 그의 말에 반박한다.    


“글쎄…… 누가 누군가를 죽 영원히 지킨다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야. 안 그래? 가령 내가 자기와 결혼을 했다고 쳐봐. 그럼 자기는 회사에 다니겠지. 그럼 자기가 회사에 있는 동안엔 도대체 누가 나를 보호하고 지켜 주겠어? 출장을 가 있는 동안엔 또 누가 나를 지켜 주지? 그러니 나는 죽을 때까지 자기와 붙어다녀야잖아, 안 그래? 그런 건 대등하지 못해. 그런 건 인간 관계라고 할 수도 없겠지. 그리고 언젠가 자기는 내게 싫증을 느끼고 말 거야. ‘내 인생이란 게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 여자를 돌보는 일뿐이란 말인가’ 하고. 난 그런 건 질색이야. 그래 가지곤 내가 안고 있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까.”

“그런 일이 일생 동안 계속되는 건 아냐. 언젠가는 끝나. 그것이 끝나는 데서 우린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거야. 이제부터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그땐 어쩌면 나오코가 나를 도와 주게 될지도 모르지. 우린 손익 계산표에 맞춰서 살고 있는 건 아니잖아. 만약 나오코가 지금 당장 나를 필요로 하면 나를 이용하면 되는 거야. 안 그래? 어째서 그런 식으로 모든 일을 어렵게 생각하지? 어깨의 힘을 좀 빼라구.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으니까 그런 눈으로 사물을 보게 되는 거야. 어깨에서 힘을 좀 빼면 훨씬 몸이 가벼워지잖아.”

“왜 그렇게 말하는 거야?” 하고 그녀는 몹시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나는 뭔가 아주 잘못 말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지 말해 줘?” 하고 그녀는 꼼짝 않고 시선을 발끝의 땅에서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어깨 힘을 빼면 몸이 가벼워진다는 것쯤은 나도 알아. 그런 말은 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구. 알겠어? 내가 지금 어깨 힘을 뺀다면 나는 산산조각이 난단 말이야. 난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만 살아왔고, 지금도 그런 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어. 한 번 힘을 빼고 나면 다신 본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구. 난 산산조각이 나서 어딘가로 날아가 버리고 말 거야. 자기는 왜 그런 걸 모르는 거야, 응? 그걸 모르면서 어떻게 나를 돌봐 준다는 말을 할 수가 있어?”

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난 지금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 깊은 혼란에 빠져 있어. 어둡고 차갑고 혼란스럽고…… 어째서 그때 나와 잠자리를 함께 한 거야? 말해 줘. 왜 나를 내버려두지 못했지?”     


어차피 와타나베가 자기를 끝까지 책임지고 그를 통해 구원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나오코는 와타나베에게 다른 부탁을 한다.     


“나를 꼭 기억해 줬으면 하는 것. 내가 존재했고, 이렇게 와타나베 곁에 있었다는 사실을 언제까지라도 기억해 줄래?”

“물론 언제까지라도 기억하지”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리고 당연히 와타나베는 이 약속조차 지키지 못한다.     


기즈키는 와타나베에게도 유일한 친구였다. 와타나베는 혼자서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하는 내성적인 소년이었다. 자살하던 당일날까지도 기즈키는 아무렇지도 않게 와타나베와 당구를 쳤다. 그리고는 자신의 집 차고에 주차된 혼다 N360 안에 배기가스를 틀어놓은 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 후 와타나베는 ‘죽음은 삶의 반대편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삶이란 어차피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므로 좋은 일에도 나쁜 일에도 너무 심각해지지 않고 철저하게 거리를 두는 방식을 택하게 된 것이다. 즉 삶 속의 일정 부분에 죽음의 몫을 남겨두게 되었다. 나오코가 그에게 지금까지 누군가를 사랑한 적이 있냐고 묻자 와타나베는 없다고 대답한다.    

 

‘아마 내 마음 속에는 딱딱한 껍데기 같은 게 있어서, 그걸 뚫고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매우 제한되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제대로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9월 하순의 대학 교정에는 행복한 사람들이 가득하다. 그들의 행복해 보이는 모습을 보면서 와타나베는 왜 자신이 저들과 섞일 수 없는지를 생각해 본다. 기즈키가 죽은 그날 밤 이후 그와 세상 사이에는 어색하고 썰렁한 공기가 끼어들게 되었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기즈키의 죽음으로 나의 어도어 센스(Adore Sense)라고나 할 수 있는 기능의 일부분이 완전히, 영원히 손상되어 버린 것 같다는 느낌뿐이었다.’      


‘나는 같은 과 애들 중에서 단 한 명의 친구도 만들지 않았으며, 기숙사에서의 교제도 의례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기숙사 동료들은 내가 언제나 혼자 책을 읽고 있어서 작가가 되려는 줄 알고 있었던 모양이지만, 나는 별로 작가가 되려는 생각은 없었다. 그 무엇도 되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와타나베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다. 이 책은 줄곧 그에게 최고의 소설로 남아 있었다.     


‘나는 마음이 내키기만 하면 책꽂이에서 <위대한 개츠비>를 꺼내어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그 부분을 오랫동안 읽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었는데, 단 한 번도 실망을 맛본 적이 없었을 만큼 단 한 페이지도 시시한 페이지는 없었다. 이렇게 멋진 소설이 또 있을까 싶었다.’     


나가사와 선배와 친해진 것도 <위대한 개츠비> 때문이었다.      


‘그는 도쿄 대학 법학부의 학생으로서, 나보다 두 학년 위였다. 우리는 같은 기숙사에 살고 있어서, 자연히 서로가 얼굴만 알고 있는 그런 사이였는데, 어느 날 내가 식당의 양지 쪽에서 볕을 쬐며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있자니까, 옆에 와 앉아서 무엇을 읽느냐고 물어 왔다. <위대한 개츠비>라고 말했다. 재미있냐고 그는 물었다. 세 번째 읽고 있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재미가 있다고 했다.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는 사람이면 나와 친구가 될 수 있지”하고 그는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듯이 말했다.’    


와타나베에 의하면 나가사와는 ‘자기 같은 사람은 따라잡을 수도 없을 정도의 굉장한 독서가’다. 어느 날 나가사와는 와타나베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기숙사에서 제대로 된 건 나와 너뿐이야. 나머지는 죄다 종이 부스러기 같은 것들이거든.’     


‘그의 부친은 나고야에서 큰 병원을 경영했고, 형 역시 도쿄 대학의 의학부를 나와 그 뒤를 잇기로 되어 있었다. 참으로 더할 나위 없는 가정인 것 같았다. 용돈도 풍부하게 가지고 있었고, 더구나 풍채도 좋았다. 그래서 누구나 그에게 경의를 표했으며, 기숙사 사감마저 나가사와 선배에게만은 큰소리를 치지 못했다.’     


나가사와는 자신의 기세를 보여주기 위해 살아 있는 괄태충을 세 마리나 삼킨 적이 있었다. 노력만으로 5개 국어를 습득할 만큼 의지가 강한 인간이기도 했다.     


‘사람들을 이끌어 낙천적으로 거침없이 앞으로 나가면서도, 그 마음은 고독하게 음울한 진흙 구덩이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의 이율 배반성을 처음부터 명백히 알고 있었고, 다른 사람이 어째서 그의 그런 면을 보지 못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 나름의 지옥을 안고 살았던 것이다.’     


와타나베는 다른 사람들이 나가사와의 겉으로 드러난 완벽함만을 인지할 뿐 고뇌 속에서 뒹굴고 있는 또 다른 면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다.      


‘그렇지만 나는 그에게 한 번도 마음을 허락한 적이 없었으며, 그런 면에서 나와 그와의 관계는, 나와 기즈키와의 관계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나는 나가사와 선배가 술에 취한 채 어떤 여자에게 지독히도 심술궂게 대하는 걸 목격한 후로, 그에게만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마음을 허용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던 것이다.’     


나는 항상 개츠비가 왜 위대한지를 이해하는 사람은 친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었기 때문에 이 구절을 읽었을 때는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실제로 있었구나. 그래서 개츠비가 왜 위대하냐고 묻는다면 사람들이 이해해줄 것 같지 않아서 그저 얼버무리고 말겠지만. 어쩌면 나오코 역시 어둠에 대한 인식이 너무 깊어서 타인에게는 그저 ‘우물’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는 이 두 사람이 각자의 지옥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것도 피상적인 타인들과는 공유하기 힘든 고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가사와가 와타나베를 친구로 선택한 것도 와타나베가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와타나베는 ‘전공투’ 같은 운동에 생각 없이 휩쓸려버리는 무리와는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인다.     


나오코가 요양원에 들어가기 전에, 그녀의 스무 살 생일날 와타나베는 포도주와 케이크를 들고 나오코를 찾아간다. 비가 심하게 내리는 날이었다. 평소의 과묵한 그녀와는 달리 그 날따라 나오코는 끝도 없이 떠들어댔다. 와타나베는 나오코의 이야기가 어딘가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오코 이야기의 부자연스러움은, 그녀가 몇 가지 포인트에서 언급을 회피하듯 조심조심 이야기하는 데에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기즈키에 관한 것도 그 포인트 중 하나였는데, 나에겐 그녀가 회피하고 있는 건 그것만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하고 싶지 않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품고 있으면서도, 아무래도 상관없는 사연의 세세한 부분에 관해 언제까지나 계속해서 떠들어댔다.’      


나오코는 자기 안의 어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둠에 대해 이야기하고, 와타나베에게 구해달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몰라 본론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 언저리만 빙빙 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날 두 사람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함께 잤다. 그런 뒤 나오코는 갑자기 종적을 감춰버린다. 와타나베는 나오코의 고향 주소로 편지를 쓴다. 자신이 어떻게 하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를 만나서 차분하게 이야기해보고 싶다고 적는다. 그러면서도 그는 ‘나는 나오코에게 아무런 약속도 할 수 없고, 무엇을 요구한다거나, 입에 발린 달콤한 말들을 나열할 형편도 못 된다’고 말한다.     


나오코는 와타나베가 상냥하고 친절하기는 하지만 관계의 무거운 의무감이나 구속, 책임을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낼 만큼 헌신적인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나가사와도 와타나베에 대해 “와타나베 역시 나와 거의 같아. 친절하고 부드러운 남자지만 마음 밑바닥으로부터 누군가를 사랑할 수는 없다구. 언제나 모든 게 다 조금쯤 시들하게 여겨지고, 그리곤 다만 갈증이 있을 뿐이야. 난 그걸 알 수 있어.”라고 말했던 것이다.     


와타나베는 도쿄에 처음 상경하던 날 기차 안에서 여자친구와 잤던 일을 회상한다. 와타나베에 의하면 그 여자는 처녀였는데 고향을 떠나지 말아 달라는 그녀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그는 도쿄의 대학에 진학해버리고 말았다. 대학에 진학하는 것까지는 별 문제 없겠지만 와타나베는 그녀와의 관계 자체를 단절해버렸다. 도쿄로 가는 기차에서 그는 자신이 몹쓸 짓을 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애초부터 나오코는 와타나베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요양원에 들어간 것도 전적으로 그녀의 선택이었다. 물론 상처받기 전에 먼저 떠나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요양원에서 쓴 편지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네가 나를 미워한다면, 정말 나는 산산조각 나 버릴 거야. 나는 너처럼 자기의 껍질 속으로 쏙 들어가 무엇인가를 해나갈 수가 없어.’     


나오코가 일상을 영위해나갈 수 없는 까닭은 어둠에 대해 더 깊이, 더 분명하게, 더 많은 것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억은 그 자체만으로 한 사람의 아킬레스건이 된다. 좋지 못한 기억과 상처가 끊임없이 공포를 확대재생산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세상에 물음표를 던졌지만 해답은 듣지 못했고 답을 알지 못하는 한 끔찍한 과거는 미래에도 되풀이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답을 찾기 위해 생각에 잠긴 채로 떨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부정적인 기억이 너무 많이 쌓여 있지 않으면 사람은 위기가 닥쳐도 차분하게 대응할 수 있다. 아직 세상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바닥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정적인 경험이 반복되다 보면 눈앞의 일상에 몰두할 수조차 없게 된다. 답을 찾기 위해 그 무서운 세계 속으로 들어가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 껍질 속에 몸을 파묻고 거리를 두고서라도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는 와타나베에 비해 나오코는 훨씬 더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다.     


와타나베가 나가사와에게 삶의 이상 같은 것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나가사와는 없다고 잘라 말한다. 인생에 이상 같은 것은 필요 없다는 것이다. 나가사와는 겉보기와는 달리 허무주의자다. 그는 와타나베에게 자기 같은 인생이 싫으냐고 묻는다. 와타나베는 당신은 모든 걸 다 갖춘 사람인데 자신 따위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냐고 대답한다. 그러자 나가사와는 이번에는 자신이 부럽냐고 묻는다.      


“부럽진 않아요. ……난 너무나 내 자신에 익숙해 있으니까요. 게다가 솔직히 말해서, 도쿄 대학에도 외무성에도 흥미가 없어요. 그저 한 가지 부러운 건, 하쓰미 씨 같은 멋진 애인을 가졌다는 점이지요.”

그는 한 동안 아무 말 없이 식사를 했다.

“이봐, 와타나베” 하고 식사가 끝나자 나가사와 선배는 나에게 말했다. “……나와 너는 이 기숙사를 나와 10년 또는 20년이 지나서도, 또 어딘가에서 만나게 될 것만 같아. 그리고 어떤 형태로든 서로 관련을 가질 것만 같고.”     


그러면서 나가사와는 와타나베에게 “너는 내가 지금껏 만난 인간 중에서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야”라고 말한다. 와타나베는 출세에 연연하는 속물들과는 달리 훨씬 더 인간적인 것을 소망하고 있다. 나가사와가 이 순간 유유상종이라는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면 다른 인간들과는 다시 볼 일이 없더라도 와타나베와는 계속 인연이 닿아 있을 거라고 느꼈던 듯하다. 나가사와는 외무고시에 합격한 뒤 외교관이 되었고 하루키는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와타나베는 딱 거기까지였다. 책을 좋아하는 사색가고 나름대로 상냥한 인간이기는 하지만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삶에 큰 부침 없이 살아온 청년에 불과했다. 그런 그가 책임의 깊은 무게감이나 삶의 끝도 없는 어둠에 대해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와타나베는 나오코가 머물고 있는 산속의 요양원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나오코의 룸메이트인 레이코 여사가 연주하는 ‘노르웨이 숲’을 듣기도 한다. 와타나베는 요양원에서 버드나무가 등장하는 꿈을 꾼다.    

 

‘산길 양 옆으로 버드나무가 줄줄이 서 있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버드나무들이었다. 제법 강한 바람이 불고 있었는데도 버들가지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왜 그럴까 하고 자세히 보니 버들가지 하나하나마다 작은 새가 앉아 있었다. 그 무게로 버들가지가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막대기를 들고 가까이에 있는 가지를 두들겨 봤다. 새를 쫓아 버들가지고 흔들리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새들은 날아가지 않았다. 날아가는 대신 새들은 새 모양을 한 금속이 되어, 텅텅 소리를 내면서 땅 위로 떨어졌다.’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버드나무는 생명력이 없는 상태다. 금속으로 된 뻣뻣한 새 역시 이미 죽음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나오코를 상징한다. 나오코가 생명력을 가질 수 없는 것은 그녀 안의 어둠이 너무 깊기 때문이다.      


나오코는 이날 자살한 자신의 언니에 대해 와타나베에게 처음으로 털어놓았다.     


‘대부분의 일은 자기 혼자서 처리해버리는 사람이었어. 누구에게 의논하거나 도움을 청하는 일이 거의 없었지. 특별히 자존심이 강해서 그런 건 아니야. 그저 그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그랬던 것 같아, 아마.’   


‘난 언니에게 자주자주 상담했고, 언니는 언니대로 매우 친절하게 많은 걸 내게 가르쳐줬지만 정작 자신의 문제는 누구에게도 의논을 안 했어. 혼자서 처리했지. 화내는 일도 없고, 기분 나빠하는 일도 없었어.’    

 

나오코의 언니는 겉으로는 빈틈없이 처세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타인의 가능성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죽는 순간까지도 아무한테도 의지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녀는 철저하게 혼자였던 것이다. 나오코도 이 점에서는 언니와 같았다. 와타나베가 내민 손을 잡고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느니(사실 결말은 뻔할 수밖에 없었다. 와타나베는 그 정도로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 아니다) 죽음을 택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영원히 회복되지 않을지도 몰라. 그래도 날 기다리겠어? 10년이고 20년이고 날 기다릴 수 있어?”

“나오코는 너무 겁을 먹고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어둠이라든가, 고통스러운 꿈, 죽은 사람의 힘 따위에 말야. 나오코가 해야 할 일은 그걸 잊는 일이야. 그걸 잊게 되면 나오코는 거뜬히 회복될 수 있어.”


이 대답은 전형적인 책임회피에 불과하다. 그는 끝끝내 계속 기다리겠고는 말하지 않는다. 거짓말보다야 백배 낫지만 모든 게 나오코가 너무 겁을 먹고 있기 때문이라며 상대의 태도를 탓하는 것으로 말을 돌려버린다. 이런 말은 우울증 환자에게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말이기도 하다. 그의 말대로 나오코가 애초에 어둠이나 죽음에 대해 잊어버릴 수 있었다면 문제가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근본적인 원인은 생각해 보지도 않은 채 자기 편할 대로 대답한 것이다. 물론 이 대답의 진짜 의미는 ‘나는 너를 기다릴 자신이 없다’이다.  

    

미도리가 와타나베에게 사랑을 고백했을 때 와타나베는 자신에게는 이미 애인이 있고 그 사람과의 관계는 인간으로서의 책임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미도리는 자신은 ‘살아 있는 피가 흐르는, 생기 넘치는 여자’라며 그를 빼앗으려고 한다.     


“나, 약간 억지스러운 데가 있긴 하지만 정직하고 좋은 애고, 일 잘하고, 얼굴도 이렇게 예쁘고, 가슴도 멋있고, 요리도 잘하고, 아버지의 유산도 신탁 예금을 해뒀고…… 너무나 싸게 넘어간다고 생각하지 않아? 자기가 갖지 않으면 그 동안 난 어딘가로 가버릴 거야.”     


와타나베는 바로 마음이 흔들린다. 너무 흔들린 나머지 감히 누구도 자신의 감정을 막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까지 한다.     


소설 속의 나오코는 이 정도면 되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녀는 계속해서 자신은 누구에게도 더는 어지럽혀지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래도 하루키는 나오코와 기즈키와 하쓰미라는, 그의 삶을 스쳐 지나갔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은 친구들을 이 소설을 통해 불멸의 존재로 만들었다. 어떤 의미에서 나오코는 신뢰할 만한 사람을 택한 것이다. 와타나베는 삶을 함께 해줄 사람은 못 되지만 나오코라는 애절하고 아름다운 존재가 있었다는 사실을 글로 남기기는 했다. 어쩌면 그녀를 책임지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도리를 다하려 한 것인지도 모른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녀가 죽음 대신 와타나베와 함께 살기를 택했다면 두 사람은 파경을 맞았을 것이고 그녀의 이야기는 글로 남겨지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오코는 현명한 사람이었으니 이런 결과를 생전에 예측했을 것이다.   


누군가 우물 속에서 한을 품고 죽었다 해도, 쓸쓸한 영혼이 혼자 어둠 속에 떨고 있다 해도 목소리를 빌려 그의 말을 전해주려 한다면 그 사람은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혹시 나오코가 죽어서도 우물 속에서 혼자 떨고 있었다면 그녀에 대한 글이 읽히는 순간 혼자 있게 될 가능성도 조금은 줄어들게 될 것이다. 누군가는 그 우물을 찾아 나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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