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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 아테네, 고대 아고라에서 카페니오까지

European Nights: 엄마를 위한 천일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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Αγαπημένη μαμά,




유럽여행을 그렇게 많이 다녔으면서 의외로 그리스는 처음이야. 현재 유럽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중에서, 이탈리아는 그렇게 자주 갔으면서 말이지. 그리스에서 머무르는 동안 쏟아진 폭우에 기찻길이 잠기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버스로 우회해서 아테네에서 테살로니키까지 장장 12시간에 걸쳐 이동해야 했어. 계획에 없던 긴 시간에 걸친 이동이 피곤하긴 했지만 대신 12시간 내내 창 밖 풍경을 쳐다보면서 그리스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좀 더 오래 볼 수 있었어.






이탈리아의 땅이 비옥한 것처럼 당연히 고대 문명 발생지인 그리스도 국가의 기본적인 부를 보장하는 너른 평야가 펼쳐진 땅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의외였지. 그리스를 남북으로 질러 가는 내내 눈 앞에 펼쳐진 건 죄다 돌로 보이는 산 뿐이었거든. 국토의 75%가 산지인데다 척박한 땅이 대부분인 이 나라에서는 지금도 주된 농산물은 올리브와 포도 뿐이래. 포도와 올리브는 물이 흔치 않은 땅에도 잘 자라기 때문에 주로 농업에 적합하지 않은 스페인 남부와 그리스 등지에서 키우기 좋았던 모양이야. 게다가 올리브는 기름으로, 포도는 포도주로 만들면 보관하기 용이하고 가격도 비쌌던 턱에 그리스는 농업이 아닌 해상무역을 경제적 기반으로 삼아 발전했대. 아테네의 수호신인 아테나의 선물이 올리브였던 게 우연이 아닌거지. 국토에서 나오는 농업 생산물이 충분하지 못했던 아테네는 늘어나는 인구와 식량 문제를 지중해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하거나 포도주와 올리브유 수출 무역으로 해결했는데, 이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해상무역이 발달하게 되었대. 심지어 화폐나 동전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소유한 포도주와 올리브유의 양이 재산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었다니 웃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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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도심 어디서든 고개를 들면 신의 땅인 아크로폴리스가 보여. 그래서 이 도시를 보고 있으면 과거와 현재, 또는 신화와 현실이 함께 겹쳐 보이는건가봐. 아침 일찍 더워지기 전에 아크로폴리스 투어를 다녀온 그날 밤, 아크로폴리스 디오니소스 극장으로 콘서트를 보러 갔어. 어느 정도 허물어진 벽을 바라보니 이 곳이 진짜 2천년 전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연극을 보던 곳이란 게 실감이 났어. 다소 불편한 좌석이었지만, 오래되어 구석구석 부숴진 공간 때문에 어쩐지 이 곳에선 하프 같은 악기를 연주해야 할 것만 같이 신비로웠어. 나는 외국인 신분이라 고대 그리스에선 하층민 대접을 받느라 이런 구경은 꿈도 못 꾸었겠지만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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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로폴리스가 명실상부한 아테네의 랜드마크지만, 실질적으로 그리스 문명은 인간들의 터전인 아고라에서 모두 시작한 것이라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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ἀγορά (agorá) : 모이다, 모임





그리스어로 아고라는 사람이 모이는 곳을 뜻해. 아크로폴리스는 신에게 바쳐진 종교적 공간이지만 아고라는 사람들이 토론하고, 투표하고, 사유하고, 거래하며, 종교 의식도 치르던 다기능 공간이야. 그리스를 대표하는 민주주의, 그리스 철학 법치 등 모든 것이 이 아고라라는 공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들이지. 아고라에는 시장, 국회, 시민법정, 만남의 장, 연설대, 장로회의소 등이 모여있었어. 가장 큰 공간을 차지한 주랑은 당시 시장이자 상점이었어. 당시 외출이 자유롭지 못했던 여자들을 대신해 남자들이 장을 보면서, 사람들이랑 이야기하고, 토론하고, 배심원이 되어 재판을 하기도 했어. 토론이 일상인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민주주의와 철학, 법학, 수사학 등이 발달 할 수 밖에 없었지. 건물 앞면에 가로로 길게 늘어선 기둥들이 특징인 그리스식 공공건축물을 스토아라고 하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스토아 학파라는 이름도 바로 이 스토아에서 철학을 가르쳤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 화가인 라파엘로가 바티칸 궁전 교황의 서재에 이탈리아도 아닌 그리스 철학자들을 주인공으로 벽화를 그린데는 다 이유가 있는거지. 그가 생각하기에 서재에 그려질 그림의 배경으로는 철학과 지성, 인문주의의 상징적인 무대인 아테네가 적격이었을거야.






cq5dam.web.1280.1280.jpeg 출처: Vatican Museums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아고라에 모였다면, 현대의 그리스인들은 카페니오(Καφενείο)라고 하는 카페에 모여 시간을 보낸다고 해. 그리스인들이 모여서 떠들기 좋아하는 건 몇 천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나봐. 한국에서 커피는 사회생활의 시작점지만, 생각보다 대부분의 유럽에서 카페란 단지 커피를 마시기 위한 장소인 경우도 많거든. 우리처럼 커피를 마시면서 오랜 시간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경우는 드물고 심지어 바에 서서 빠르게 커피를 마시고 가는 경우도 많아. 그리스식 커피는 구리 또는 황동으로 만들어진 브리키에 아주 곱게 간 원두를 넣고 끓이다가 거품이 생기면 그대로 필터에 거르지 않고 바로 잔에 따라줘. 커피를 다 마시고 나면 바닥에 가라앉은 커피가루로 점을 치기도 하지. 원두 가루를 그냥 넣고 끓이기 때문에 커피 가루가 가라앉도록 천천히 마실 수 밖에 없고, 중간에 휘젓는 것도 금물이야. 그래서 그리스에서는 커피를 주문 할 때, 설탕량도 함께 얘기해야해.







화려한 과거에 대한 자부심은 뒤로하고, 그리스는 내가 유럽 내 여행을 하면서 유일하게 치안을 걱정했던 나라야. 주그리스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아테네 내 위험 지역을 따로 안내 할 정도로 일부 지역은 마약이나 강도 등의 범죄로 얼룩진 곳들이 있었어. 아테네에서 일주일 가량 머무르면서 폭우가 내렸는데 시내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버스 밖으로 물이 빠르게 차오르는 걸 보고 너무 놀랐지. 결국 이 비 때문에 우리가 타야 하는 기차는 기약 없이 취소되었고 내가 휴가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물에 잠긴 기찻길과 도로를 복구하는데 한참이 걸렸다고 해. 역사적으로 국가 운영의 기본은 치수와 치도에서 시작한다고 하는데, 단 며칠 만에 두가지 모두 엉망이 된 모습이었지. 그리스의 치안과 간접자본시설들의 수준은 그 나라의 행정력을 나타내는 지표이기도 하잖아. 여러모로 현재의 그리스가 과연 유럽 문명의 시작점으로서의 품격을 지키고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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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여행은 섬에 들어가야 비로소 시작이라는데 우리는 시간이 없어서 크루즈를 타고 바다를 즐길 생각이었거든. 섬에 들어가든 크루즈를 타든 폭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지만 지중해 바다는 포기할 수 없어서 아테네에서 트램을 타고 바닷가로 나왔어. 큰 기대가 없었는데 트램을 타고 조금만 나와도 물이 맑고 푸른 빛을 띠는 해수욕장이 너무 많았어. 섬까지 들어가지 않아도 언제든 이렇게 쉽게 예쁜 바다에 갈 수 있다니 축복 받은 삶이 아닌가 싶었지. 음식 인심도 후해서 맛있는 음식과 청량한 빛의 바다 조합이라면 몇 번이고 다시 오고 싶은 곳이었어. 음식이라면 박하기 그지 없는데다가 춥기만한 독일에서 지내던 중이라 그랬는지 더욱 비교가 되어 그리스는 말 그대로 여름 나라 그 자체였던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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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의 치안이 걱정되어서 숙소는 도심을 좀 벗어난 주거지역으로 정했더니 주변에 저렴하고 맛있는 그리스식 가정식 식당이 많았어. 우연히 들어간 식당은 단 12유로에 식당 사장인 콘스탄티노스가 그리스식 백반을 한상 차려주는데, 수저를 내려놓을 때까지 끊이지 않게 음식을 계속 가져다줘. 반찬 하나 추가할 때마다 추가 비용 파티인 유럽의 식당에선 정말 드문 일이야. 특별히 먹어보고 싶은 메뉴가 보이면 그걸 먼저 내주기도 하고, 옆 테이블에서 먹는 음식이 맛있어 보인다고 하면 그 테이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우리 대화에 참여하게 되는 그런 곳이야. 스페인에선 오렌지 과즙 들어간 환타가 유명하다면 그리스에선 레몬 과즙이 들어간 레몬 환타를 함께 마셔줘야해. 가게 앞 올리브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올리브 나무 아래 테이블에 앉아서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메뉴, '남이 차려주는 식사'는 어때?





Να προσέχεις τον εαυτό σο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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