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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성찰

윤동주의 자화상을 다시 읽고

by 김느리


여행은 참 많은 것을 추억하게 한다. 에어비앤비 남의 집 침대 위 익숙하지 않은 천장을 바라보며, 혹은 좁은 호텔, 냉장고 윙윙 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는 나였다.




출국 전, 유럽으로 떠나고 싶다는 나의 욕구가 현실도피를 위함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반복되는 일상, 전쟁 같은 아침, 삼시 세 끼. 오늘은 또 뭐 해 먹을까 하는 지겨운 고민, 오늘 션이 몇 시에 자줄까 시계만 흘깃거리고, 아이가 11시 넘어 겨우 잠들고 나서, 깜깜한 거실로 나와 책 조금 읽거나 TV 채널 돌리다 꺼버리고는 가만히 있는, 참 심심한 삶.


강의로 바쁠 때는 이러한 여유와 고민도 없긴 했다. 수업 강행군을 위해 일찍 잠들고, 또 일찍 일어나 후닥닥 나가고. 바삐 운전해 강의 시작 2분 전, 강의실에 들어가 숨 고르고. 일로 인해 바쁠 때는, 한가한 사람들이나 감상에 빠진다 생각했던 것 같다.


방학이 될 때마다, 그리고 일을 그만두고 나서는 예전 유재석 X이적이 부른 '말하는 대로'라는 곡처럼, '내일 뭐하지'만 되풀이하는 것 같다.



자화상(自畵像)/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최근에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윤동주의 시. 나는 글이나 작품을 분석하고 연구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이 시를 읽으며 그와 내가 많이 닮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물 속에서 마주하는 내 모습, 그 모습이 참 미워 등 돌리게 되는 나. 나도 나의 부족함에 대해 반성하는 경우가 참 많다. 왜 더 넓은 아량을 가지지 못하는지, 왜 이 정도 그릇밖에 안 되는 건지.


윤동주가 그랬듯, 나도 나 자신이 밉고, 가끔 참 가엽고, 또다시 밉다가도, 그리워지기도 한다.

어렸던, 밝았던, 꿈이 있던 내가 그립고

게으른, 부족한, 거울 앞에 못난 내가 미워지기도 한다.

별, 바람, 하늘 그리고 나


여행을 하며 부족한 나를 맞닥뜨리는 순간이 많았다. 생각지 못했던 돈을 쓰게 되며,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겨우 기차를 타며, 잠을 쉽게 자지 않는 아이에게 짜증을 부리며 나라는 인간의 얕은 그릇을 깨닫고는 좌절하기도 했다.


그래도 꿈꿔온 여행을 이뤄낸 나 자신이 자랑스럽기도 했다.


암으로 투병했던 엄마 모시고 크로아티아에 살며, 국립공원에 가고 수많은 도시의 흥미로운 곳들에 갔다. 그리고 먼저 귀국한 엄마의 추적검사 결과는 '이상 없음'이었다.


4살 아이를 데리고 유럽에 살며 돈으로는 못 살 수많은 아름다운 추억들을 만들었다. 내 아이는 그 흔한 감기한 번 걸리지 않았고, 내가 사랑한다 하면 "I love you more than you love me." 라 답하는 사랑이 많은 다섯 살 형아가 되어있다.


새벽 7시에 출근해서 밤 10시에 퇴근하던 신랑도 육아휴직을 쓰고 유럽으로 넘어왔다. 그는 작년 재작년을 다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온전히 가족과 즐기며 보내고 있다. 청년 때처럼 예쁜 미소도 자주 보여주는 중이고.


나와 유럽을 함께 한 가족들이 행복해서 좋았다. 그들이 성장하고, 즐기는 모습이 참 좋았다.


내 가족의 웃는 얼굴이 좋다

그런데 나는?


나는 이 여정을 통해 무언가 얻었을까?


여행을 하다 보니 평범한 일상이 참으로 소중하다는 것, 내 나라 내 집이 최고로 편하다는 것, 그리고 내일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내 가족이 행복할 때 결국 나도 행복을 느끼고 있더라는 것. 희생을 하고, 나를 조금씩 잃어가는 게 그렇게 세상 슬픈 일이 아니고, 전에는 끔찍이 두려웠었던 '아줌마가 되어가는 것'이 그리 싫은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와중에 내 꿈을 잃지 말고, 품위 있게 말하고, 거울 앞에 섰을 때 너무 초라하지 않을 정도로는 꾸미는 여자가 되자고 다시 한번 다짐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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