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엄마와 함께 하는 유럽여행

스무살의 꿈을 이루다

by 김느리


내가 어릴 적, 엄마는 제일 친한 친구였다. 엄마 품에 안기면 딱 머리가 엄마 허리에 닿던 시절, 올려다보면 엄마의 턱이 보였고 금방 사랑스러운 눈길이 부딪혔었다.


사춘기 그리고 스무 살을 지나며, 엄마는 소중했지만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은 못됐다. 나는 투정만 자주 부렸고, 엄마에게 의지하기만 했던 것 같다.


혼자 떠났던 첫 유럽, 나중에 엄마를 모시고 꼭 같이 와야지 다짐했지만 그 다짐은 각박한 삶과 현실이란 벽에 부딪혀 기약 없이 미뤄졌고, 결혼을 하며 엄마는 조금씩 멀어졌고 또 가까워졌다.


아이가 태어나며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순위가 바뀌는 일이 일어났다. 나는 겉으로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내 눈길과 손길은 언제나 아이를 먼저 향했다.


엄마가 폐암 3기 진단을 받고, 수술을 하고 고통스러운 항암 방사선을 겪어갈 때 내 인생의 전부는 다시 엄마가 되었다. 매일 먹을 것을 요리해서 가져다 드렸고, 건강주스를 만들고, 약초 즙을 내기도 하며 나 스스로 훌륭한 딸이라 우쭐하기도 했다.


com.daumkakao.android.brunchapp_20200106174841_2_crop.jpeg 자다르에서 안드레아의 보트를 타고


수술 후 일 년, 기력을 되찾은 엄마를 모시고, 갓 36개월을 넘긴 아이를 데리고 우리는 공기 좋은 크로아티아에서 세 달을 살았다. 참 안타까웠던 게 내 아들 안아주고 뽀뽀해주는 것은 익숙한데 엄마와는 그러지 못하는 나를 보았을 때였다. 아이 손은 매 순간 놓지 않으면서 엄마 손은 금방 놓았다. 아이를 씻기고 같이 욕조에서 놀며 낄낄댔지만, 엄마 앞에서는 벗은 몸을 가리는 나였다.


어린 시절 내 베스트 프랜드는 그렇게 멀어지고 있었나 보다.




남편이 어렵게 육아휴직을 써서 유럽으로 넘어왔고, 엄마의 귀국을 앞두고 우리 둘만의 시간이 주어졌다. 혼자 독일에 가서 택스프리를 받고, 짐을 다 끄라리고 귀국 편 비행기에 오를 수 없는 엄마를 위해 내가 동행을 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한 2박 3일 일정으로 엄마 모셔다 드리고 크로아티아 복귀하려 했지만 저렴한 비행기를 찾다 보니 우리 모녀는 5일 동안을 함께 지내게 되었다.


나와 함께가 아니면 화장실도 잘 못 찾아가는 엄마가 답답하기도 했고, 엄마와 있으면서도 마음은 크로아티아에 남은 남편과 아들이 잘 먹고살고 있는지 걱정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지만, 내가 스무 살에 했던 엄마와의 여행의 꿈 현실이 된다는 것에 감사했다.


안녕, 자다르 집

3개월 동안 우리의 보금자리였던 크로아티아 자다르 집을 떠나며 엄마는 연신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초록 대문 앞에서 똑똑 떨어지는 눈물을 훔치며 엄마는 그 여린 소녀 같은 속마음을 들켰다. 아름답던 이 곳을 떠나는 것에 대한 아쉬움. 매 순간 부쩍 크는 손주를 앞으로 두 달간 못 본다는 안타까움.


엄마는 새벽 다섯 시에 자다르 공항에 우뚝 서서 하늘을 바라보았고, 나에게 북두칠성을 보여준다며 하나 둘 별을 세고 있었다. 엄마 스무 살 때만 해도 한국도 별이 쏟아졌다며 아쉬워하며.


그렇게 우리 둘만의 여정은 시작되었다.

엄마와 함께 새벽 비행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크로아티아 살기- 3개월 만에 남편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