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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느리 Apr 29. 2020

다시 찾아온 할머니의 끝사랑

  

할머니가 울고 계셨다. 시끌벅적한 칠순 잔칫날. 똑같이 맞춘 분홍 한복을 입고 분주한 딸들과, 친척 어른들께 소주를 돌리느라 정신없는 아들은 못 봤지만, 손녀인 나는 할머니의 눈물을 똑똑히 봤다. 신나는 잔치, 나를 축하해주는 사람들. 할머니는 행복했지만 외로웠고, 이제는 많이 먹어버린 당신의 나이도 실감 났을 것이며, 남편도 없이 고생하며 살아온 박복했던 삶에 복받쳤을 것이다. 그렇게 터지는 눈물을 남몰래 훔치며 보낸 칠순 잔치가 지나고 5년, 할머니는 남편을 떠나보낸 후 50년 만에 멋쟁이 남자 친구가 생겼다.    



  

일흔다섯 꽃다운 나이에 남자 친구가 생겨 행복한 할머니를 보며, 나이 따위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인생의 진리가 피부로 다가왔다. 젊고 늙음에서 자유로워지니, 누가 돈을 얼마나 버는지, 누구는 몇 평에 사는지 따위의 숫자는 더욱 같잖게만 느껴졌다. 노인들의 사랑은 우정 같은 것이겠지 생각했기에,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자기야” 하는 것을 보고 내 귀를 의심하기도 했다. 얼굴 주름살 좀 펴려고 성형외과에 갔는데, 이런 주름은 어찌 못한다고 그냥 사시라는 소리를 들었다며 속상해하는 할머니를 보고, 나이가 들어도 여자는 여자이고 내 남자에게 예뻐 보이고 싶은 마음은 똑같구나 하는 생각에 찡해지기도 했다. 그래도 할머니는 행복했고, 손녀인 나뿐 아니라 할머니의 아들딸들도 우리 어머니 노년에 좋은 분 만나 참 잘 되었다며, 할머니의 영원한 행복을 기원했다.     


나는 할머니가 더는 슬프지 않고 행복하기를 바랐고, 그 행복을 할아버지가 이뤄주기를 바랐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할머니 행복해?”라는 말로 안부를 물었고, “행복하지”라고 답하는 할머니 말에 안도했다. 가족들이 전부 모인 어느 명절,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혼인신고를 하겠다며 서류를 몇 장 가지고 오셨고, 할머니는 누구보다 행복해 보이셨다. 평생을 혼자 사신 할머니의 노년에 좋은 친구이자 남편이자 의지할 수 있는 동지가 생긴 것이다. 그것도 법적으로. 할머니가 좋은 사람이라, 평생 남에게 피해 한 번 안 주고 사신 분이라 이런 좋은 일이 인생 말년에 오는 것이라며 자식들은 기뻐했다. 나도 마치 내가 사랑에 빠진 듯 행복했다. SNS에 저렇게 되고 싶다며 올라오는 어느 노부부의 손 잡은 뒷모습 사진 같이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도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할머니는 행복한 만큼 두려워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워낙 걱정이 많은 분이셨다. 우직했고 성실했으며 간도 작았다. 아파트 청소일을 수십 년 해오셨는데, 무릎 연골이 다 닳아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무리를 하여 남의 아파트 복도를 닦았다. 한 달에 한 번씩 계단 신주를 닦고 나면 한 이틀은 몸살로 앓으셨다. “아 쫌 대충대충 해!” 손녀가 핀잔을 주면 주민들이 불평을 가질 것을 걱정하셨다. 청소반장님이 자기가 담당한 한 동을 우리 할머니에게 맡겼었다는 사실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아니, 왜 자기 구역을 우리 할머니 시켜? 관리소에 전화할까 보다!” 씩씩대는 나에게, “반장님이 그래도 좋은 사람이야. 내 한 번씩 아파 일 못 나가도 넘어가 주꼬. 이해해주꼬.” 그렇게 바보같이 남의 구역까지 청소하며 할머니의 무릎은 손쓸 수 없는 지경이 되었고, 어렵게 다시 찾아온 행복이 날아가진 않을까 두려워해서일까, 할아버지와의 행복한 시간이 채 일 년도 지나기 전에 할머니는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는 폭삭 늙어버린 노인이 되어버렸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동네 산책 가고, 공원 가고, 할아버지 손 잡고 언덕 아래 닭발집 가서 소주 한 잔 부딪치던 행복이 부서졌다. 여든이 다 되어가는 연세에 뇌하고 심장도 안 좋아서 무릎 연골 수술 불가 판정도 받았다. 세 군데의 병원에서 그냥 사시라고, 수술이 잘못되면 중풍이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할머니는 무릎을 포기했다. 그리고는 점점 약해졌다. 무릎이 아파 못 걸으니 짜증이 많아지셨고, 30년 단골 한의원에서 권하는 60만 원짜리 한약을 먹으며, 이게 연골이 다시 생기게 해 줄 거라 믿으셨다. 그러면서도 당신은 이제 곧 죽을 것 같다며 부정적인 생각도 많이 하셨다.      


한 번은 집에 티비가 고장 났우리 엄마가 좋은 티비 하나를 사드렸다.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무슨 브랜드를 아시냐고, 20만 원은 더 저렴한 거로 사드리라고 핀잔을 줬는데, 할머니가 “아이고 이거 금성 꺼네. 금성 꺼! 옆집 사람들 불러서 자랑했데이.” 하는 말을 듣고 숙연해지기도 했다. 생전 처음으로 좋은 티비가 생겨 기분 좋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우리 가족을 식사에 초대하셨다. 그날따라 해물찜이 참 맛있었다. 엄마 아빠가 할아버지와 소주잔을 부딪치며 웃음꽃을 피우고 있는 사이, 나는 내 앞에 조용히 앉은 할머니의 눈에 고인 눈물을 보았다. “할머니, 울어?” 내 말에 눈물이 톡 하고 터져 흘렀다. “내 요즘, 우울증 약 먹고 있다.”가슴이 철렁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친구들을 만나 술값을 계산한 것이 속상하다고 하셨다. 소주 한 병에 4천 원인데, 그 자리에 돈을 더 잘 버는 친구 놈도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계산한 것이 화가 났다고 했다. 소주 한 병에 4천 원이라고. 나는 물처럼 마시는 커피 한 잔 값인, 그깟 푼돈 4천 원에 할머니는 꺼이꺼이 가슴을 쳤다. 할머니와 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바로 옆에 테이블에 웃음꽃 핀 엄마, 아빠 그리고 할아버지의 얼굴이 보였다.     




할머니가 울고 계셨다. 시끌벅적한 가족 식사 날, 할아버지를 만나 너무 잘 되었다며 기분 좋은 딸과 사위는 보지 못했지만, 손녀인 나는 할머니의 눈물을 똑똑히 봤다. 즐거운 식사, 기분 좋은 사람들. 할머니는 행복했지만 외로웠고, 이제는 더 많이 먹어버린 당신의 나이가 두려움으로 다가왔을 것이며, 새로운 사랑을 만나 행복하기만도 모자란 시간에 아픈 몸과 마음을 생각하며 복받쳤을 것이다. 그렇게 할머니는 터지는 눈물을 남몰래 훔치고 있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하지? 고민했다. 할머니가 행복하길 바랐고, 할아버지가 그 행복을 자식들과 손녀를 대신해서 이루어주길 바랐던 이기적인 마음이 부끄러웠다. 더는 곱지 않은 쭈글쭈글한 피부, 남편 손 잡고 걷기도 힘들어져 버린 못난 무릎, 할아버지가 친구들 만나러 나가는 뒷모습, 소줏값까지 계산했다고 하는 그 꼴 보기 싫은 미운 행동, 할머니는 외로웠다. 오랜 침묵 후 나는 그 4천 원 별거 아니라고, 할머니도 노래교실도 좀 다니시라고 말씀드렸다. 또 놀러 오겠다는 기약 없는 약속을 하며 손을 흔들 때도 할머니의 눈은 촉촉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할아버지를 만나지 않고 평생 혼자 사시는 게 덜 외롭진 않았을지. 혼자일 때보다 둘인데도 외로운 게 훨씬 더 아픈 법인데. 그렇게 나는 잠시 슬펐고 할머니는 바쁜 내 삶에서 다시 희미해졌다.




할머니를 만났다. 저렴한 동네 횟집에서 광어를 먹으며, 오랜만에 손녀딸이 놀러 와 즐겁다며 할아버지랑 할머니는 소주잔을 짠 부딪히신다. 완두콩하고 메추리알 좀 잡숴보시라며 할아버지가 옆에서 자꾸 권하신다. 할머니는 귀찮하셨지만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하셨다. 어쩌면 나이가 들어 더 절절한 이 사랑이란 놈 때 매 가끔 아플 것이고 울게도 되겠지만, 그래도 할머니는 사랑에 도전하셨고 행복이란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시다. '사랑 때문에 이렇게 아플 거면 그냥 혼자 사시지'라고 생각했던 내가 틀렸다. 할머니는 어쩌면 인생의 마지막 열정을 사랑에 쏟고 계신지도 모른다. 인생의 희로애락. 할머니에게 '애'는 슬플 哀 가 아니라 사랑 愛 이길. 나는 그녀의 이 사랑을 그리고 사랑과 함께 하는 그 빛나는 인생을, 열렬히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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