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게 상책이라면서요

아이를 가지는 것도 그 중 하나일까요

by 릴리리

얼마 전 산부인과에 갔다.


요즘이야 어릴 적부터 여성 건강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하고 자궁경부암 백신도 있고 하니 십 대 때 산부인과에 가는 게 대단한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태생적으로 병원에 가기를 싫어하고 자연 면역력을 중요시 여기는 가풍에서 자라다보니 자연스레 산부인과도 멀리 했다. 감기 몸살이 나도 병원에 잘 안 갔다. 커서도 자주 가는 곳은 치과 정도였다. 가끔 위염과 위경련 때문에 내과를 가곤 했지만 그건 정말 너무너무 아파서 견딜 수 없을 때였다. 나는 아픈 걸 잘 참는다.


때문에 어디 아픈 데도 없으면서 산부인과에 간 건 꽤나 큰 결심이었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강릉에 내려올 때는 금방 아이가 생길 줄 알았다. 하지만 1년이 지나고 2년이 다 되어도 아이는 생기지 않았다. 궁금했다. 아이가 생기지 않는 원인이. 그래서 우리는 손을 잡고 산부인과에 갔다.


남자는 간단하다. 정액을 채취해 제출하기만 하면 된다. 여자는 여러 가지 검사가 필요하다. 의사는 나팔관 조영술을 해보자고 했고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나는 너무도 무지했다.


우리가 처음 갔던 병원은 장비가 없어서 좀 더 큰 병원에 예약을 잡고 갔다. 고작 검사 따위에 남편을 동행할 필요는 없으니까 혼자 갔다. 병원은 넓고 깨끗하고 쾌적했다. 진료실에서 간단하게 의사를 만나고 나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간호사가 와서 진통제 주사를 맞자고 했다. 진통제? 나팔관 조영술이란 게 그냥 단순한 검사가 아닌가? 뭐가 그리 아프길래 진통제까지 맞아가며 검사를 하는 거지? 3분 내내 웩웩거리기만 했던 위내시경 때에도 진통제 같은 건 맞지 않았다. 그런 위내시경 보다 더 괴로운 검사가 있단 말인가?(병원과 친하지 않았던 내게 가장 괴로웠던 검사라곤 위내시경 뿐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등허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주사를 기다리며 폭풍검색을 했다. 블로그와 카페에 후기가 많이 올라와 있었다. 너무 아팠다, 가장 심한 생리통보다도 더 심했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견딜 만했다, 어쩌구저쩌구. 그 중에서 ‘생리통보다 조금 심한 정도였다’는 후기를 믿기로 했다. 사람마다 느끼는 통증의 정도는 모두 다르고 나는 아픈 걸 잘 참는 편이니까.


진통제 주사를 맞고 조영실로 올라갔다. 조영실은 수술실이 있는 2층이었는데, 수술이 끝나기를 기다리는지 복도에 초조해 보이는 두 사람이 손을 붙잡고 있었다. 어쩐지 긴장감이 감도는 복도 분위기에 괜히 꿀꺽 침을 삼켰다.


조영실에 들어가 바지와 속옷을 벗고 차가운 침대 위에 다리를 벌리고 누웠다. 배가 아파도 손을 배 위에 올리시면 안돼요. 그러면 사진 다시 찍어야 됩니다. 간호사가 경고했다. 곧 의사가 들어왔다. 그는 주사기 비슷한 것을 집었다. 사실 이때부터는 눈을 감아버렸다. 다리 사이로 무언가가 들어왔다. 어쩐지 19금 소설의 한 문장 같지만 여긴 생생한 산부인과의 현장이었다. 조영제가 뱃속에 들어왔다. 동시에 아랫배에 엄청난 고통이 찾아왔다. ‘생리통보다 조금 심한 정도’이길 바랐던 내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생리통은 X발!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고 싶은 걸 참았다. 간호사가 후다닥 사진을 찍으러 갔다. 그러고는 다시 와서 침대 아래의 판을 갈아 끼우고 사진을 또 사진을 찍으러 후다닥 나갔다. 확실히 기억나지는 않는데, 그 고통 속에서도 왜 이놈의 병원은 사람을 한 명만 써서 왔다갔다 하는 시간 동안의 고통을 더 느끼게 하는가 싶어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나팔관 조영술 검사는 그렇게 충격과 공포 속에서 끝났다. 속옷과 바지를 입는데 아무 것도 가져오지 않아 간호사가 팬티라이너를 챙겨줬다. 집에 가서 보니 라이너가 피로 흥건했다. 종일 누워 있었다. 남편이 짜파게티를 끓여줬다.


잘 몰라서 겁 없이 하게 되는 것들이 있다. 내겐 나팔관 조영술이 그런 것 중 하나였다. 어쩌면 결혼도 그 중 하나였을까? 모른다는 건 걱정도 두려움도 포함한다. 나는 정말로 앞으로 몇 년 후의 일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다. 당장 내년의 일도 계획하지 않았다. 그 시절 나는 그냥 지금과는 다른 삶을 원했다. 다른 지하철역, 다른 골목, 다른 현관, 다른 계단, 다른 집, 그리고 어둔 밤 나 아닌 다른 누군가 그 집으로 퇴근해 돌아온다는 것.


생의 어떤 순간순간에, 때로는 계획하지 않는 선택을 후회했지만 그건 아주 미미해서 내 삶의 방식을 바꾸지는 못했다. 돌이켜보면 ‘그 땐 그랬지’ 수준의 감상이었고 후회는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호기심과 아쉬움일 따름이었다. 그래서 아무 것도 모른 체 했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결혼도 마찬가지다. 이 이상으로 나를 온전히 나 자신으로 있게 해주는 사람을 만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고는 망설임이 없었다.


어쩌면 아이도 그런 것 중에 하나일지도 모른다. 모르니까 할 수 있는 과감한 선택. 그런데 이미 아이가 있는 삶에 대해 모른다고 말하기에 우린 너무 오래 같이 살았고 나이가 들었다. 이제는 알기 때문에 두려워서 시작할 수 없다. 송두리째 바뀌게 될 삶, 잃게 될 혼자만의 여유, 더욱 늘어날 짜증. 물론 아이가 주는 행복감은 그 모든 불행보다 크다지만 스스로는 쉬이 발을 내딛기가 어려운 게 현실이다.


때로는 남편을 꼭 닮은 귀여운 아이가 있으면 좋겠지만, 없는 것도 또 다른 행운이 아닐까? 하느님은 우리가 질 수 있는 무게만큼의 십자가를 주신다고 했다. 내 정신은 너무도 약해빠져서 작은 고난과 역경에서 쉽게 꺾여버리기 때문에, 하느님은 가벼운 십자가를 들려주셨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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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10년 차, 아이는 없습니다만>이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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