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에 살다보니 알게 된 사실
처음 강릉에 와서 시내 곳곳을 돌아다닐 때면 오래된 가게가 많다고 생각했었다. 그도 그럴것이, 도로변에 나란히 어깨를 마주하고 있는 가게들의 간판이 하나같이 바래 있었기 때문이다.
강릉에 산지 7년차 되는 어느 날, 언제나의 길거리를 지나다 깨달았다. 오픈한지 2년 남짓한 가게의 간판이 수십년은 된 마냥 빛바래 있었다. 상점의 간판이 바랜 이유는 오래돼서가 아니었다. 햇빛 때문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높은 건물이 없기 때문이었다.
서울에선 언제나 높은 건물에 둘러싸여 있었다. 고개를 한참 들어야 꼭대기가 보이는 빌딩 사이에선 가게 간판들이 직사광선을 마주할 시간이 길지 않았다. 그들은 햇빛에 바래기 전에 간판을 내렸다. 장사가 잘 되어 이전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드문 케이스였다. 수요도 공급도 많은 서울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가게가 바뀌었다. 높은 임대료와 불경기 탓에 공실로 남아있는 곳들도 많아졌지만, 여전히 서울에선 간판이 자주 바뀌고 있다.
그에 비하면 강릉은 가게가 바뀌는 빈도가 더 적은 것 같다. 절대적인 상점 숫자가 적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계속 개발되고 있는 관광지 특성도 있는 것 같다. 전혀 아무 것도 없던 장소에 어느 날 건물을 뚝딱뚝딱 짓더니 새로운 가게가 들어서는 식이다. 서울이야 인구도 건물도 워낙 밀집되어 있다 보니, 무엇인가 없어지지 않으면 새로운 것이 들어오기가 힘들다.
‘이 가게 제발 망했으면’하는 곳이 오래오래 영업하는 걸 보면 가끔 속이 쓰릴 때도 있다. 겉만 번지르르하게 꾸며놓고 그에 걸맞지 못한 서비스와 음식을 내놓는 곳, 남의 가정 파탄낸 상간남녀가 운영하는 곳 등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전자는 맛이나 세세한 서비스보다 그저 겉모습이 중요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계속 명맥을 유지해나갈 수 있는 것일 테다. 후자는 강릉 사회가 아무리 좁아 소문이 난다고 해도 관광객들은 이 가게 사장이 뭐하는 사람인지 알 턱이 없으니 그냥 블로그 후기 광고만 보고 가서 여전히 장사가 잘 되는 것일 게다. 그렇게 부정한 짓을 저지르고도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을 보면, 언젠가는 되돌려 받겠지 생각하며 지낼 뿐이다.
체감하는 것과 실제 폐업률이 얼마나 차이가 날까 궁금해져서 통계를 찾아봤다(사실에 기반하지 않고 뇌피셜만으로 글 쓰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는 체질이라). 폐업률은 공식 통계가 없어서 2024년 1월 한경닷컴에서 행정안전부 지방인허가에서 일반음식점·휴게음식점 데이터를 가공해 분석, 기사로 쓴 것을 참고했다. 2023년 전국 폐업률은 10.0%, 서울은 12.4%로 전국에서 폐업률 1위, 강원은 8.9%로 17개 시도 중 12위였다. 참고로 폐업률 꼴찌는 제주로 7.4%였다.
체감하는 것과 실제 통계가 많이 차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해서 조금 안심했다. 지금도 강릉에는 언제 생겼는지 모를 대형 베이커리 카페와 아기자기한 상점이 문을 열고 손님을 반기고 있다. 여전히 못 가본 곳이 많다. 강릉에 놀러오는 사람이 맛집이나 가볼 만한 곳을 물어오면 당장 2박 3일 코스를 상황에 맞게 짜줄 수 있지만, 관광 코스는 늘 업데이트가 필요한 법. 많은 사람들에게 더 좋은 곳을 소개해줄 수 있도록 오늘도 열심히 가게를 알아보고 직접 가본다.
아, 그러니까 강릉에서는 간판이 좀 바랬다고 오래된 집이라고 착각하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아울러 집안에서도 햇빛은 조심해야 한다. 서울에서도 고개 위에 있는 남향 아파트에 살아 볕이 잘 들었지만 거실에 걸어둔 액자가 빛이 바래는 일은 없었는데, 강릉에 살면서는 거실에 걸어둔 사진과 그림이 빛에 바래 무슨 20세기 사진처럼 돼 버렸다. 그래도 커튼은 활짝 열어두고 산다. 이미 바랠 사진은 다 바랬고, 멀리 보이는 대관령의 모습은 커튼 뒤로 숨겨 두기엔 너무 아까운 풍경이니까.
* 건강상의 이유로 지난 주 발행을 쉬었습니다. 이번 주는 2편이 동시에 올라갈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 부탁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