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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 Jul 22. 2023

다큐 150편을 정주행하다.

코로나, 그리고 입대

어떠한 의미도 가지지 않았을 2020년 10월의 12일은 운명의 얄궂은 장난으로 인해 입대일이 되어버렸다.




작은 키와 어려 보이는 외모로 인해 (외국 친구들이 그렇단다. 여전히 편의점에서 술을 살 때면 신분증을 요구받는다.) 내 나이를 듣고선 화들짝 놀라는 외국 친구들.


개중 남북으로 분단돼 있는 한국의 사정을 알고 있는 녀석들이 꼭 뒤이어 물어보는 내용이 있다. 사실 한국에서도 대학생이라 말하면 꼭 뒤따르는 그 질문,


"군대는 다녀왔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하는 난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에 꼭 한 마디를 덧붙인다.


"코로나 시기에 운 좋게 잘 다녀왔습니다."


그러나 정말 내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는지를 묻는다면 답은 솔직히 모르겠다.


졸업 전부터 졸업 후 바로 입대해야겠다는 내 감을 따랐더라면 시기적으로 완벽하지 않았을까 싶으면서도, 8월에 시작하는 미국 대학에 맞춰 입대를 결심했기에 1년 간 놀고먹지 않았나 싶어 확답하기 어렵다.


여하튼 군문제(군문제라는 단어 속에 복무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이 담겨있는 것만 같다.)를 해결하기에  코로나 시기가 적기였다는 점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3주 간의 국내일주 후 미국 입국을 준비하던 내게 주한미국 대사관은 입학 기한이 경과하였으므로 입국이 불가능함을 통보했고,


이후 두어 달을 하릴없이 보냈다.


사실 1주일 전까지는 입대가 남 이야기 같았다. 가끔 아침에 일어나 통일이 되지 않았나 괜스레 뉴스를 뒤적이다가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러다 입대를 1주일 남긴 시점, 불현듯 정신이 퍼뜩 들었고, 그때부터 미친 듯이 먹었다.



입대 5일 전, 길을 걷다 마주한 미스터 장과 미세스 장이 병기돼 있던 중국집 간판은 왠지 부조리했고,



입대 4일 전은 생일이었다.



입대 3일 전 친구들과 마지막으로 야구를 하고,



그날 밤 마시고 또 마셨다.


마시고 마셔도 정신은 또렷해져만 갔고,

결국 두세 시간 정도 눈을 붙인 후 일어났다.



1차, 2차, 3차, 그리고 4, 5차까지.


일어나니 뉴욕 양키스의 경기가 진행 중이었고, 멍하니 TV를 보다 밖으로 나와 머리를 깎았다.



영문 모를 이틀을 보낸 후 입대했다.


어학병으로써 날밤을 지새우며 1153건의 첩보를 처리하고 6개월 간 분대장을 달았던 알찬 군생활이었지만, 바깥공기를 잊으려 일에 몰두하려 할수록 갈망은 강해져, 결국 코로나 블루를 피할 수 없었다.



부대 특성상 100일 전에 보내준다던 첫 휴가를 4개월이 지나서야 나갔으니 (이마저도 타 부대에 비하면 상황이 나은 편이었다)…



그렇게 다녀온 첫 휴가,


협재의  바다는 시리도록 맑았고



한라의 하늘은 차갑도록 푸르러,


온기를 찾아 떠나도록 나를 부추겼다.




그럼에도 상황은 나아질 기미를 안 보였고, 이내 격리와 단절의 시대가 도래해 6개월 간 막사에 갇혀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느리게 또 느리게 시간은 갔고,


우수 병사로 선정돼 한미연합훈련에 파견 근무를 나가면서 내 군생활은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했다.



첫날, 용산 드래곤 힐 랏지 호텔에서 먹었던 7만 원어치 스테이크를 절정으로 생활의 질이 곤두박질쳤다.


첩보를 처리하기 위해 추가 근무를 자청하며, 그간 휴일 없는 3교대 일정을 소화했던 나였지만, 생면부지인 장교들 사이에 끼여 하루 12시간, 2교대로 근무하는 일정은 적응하래야 적응할 수가 없었다.


야간조보다야 낫다지만, 휴대폰 사용이 두 시간으로 제한되던 컨테이너 박스에서의 생활은 절망적이었고,


차라리 부대 안에 갇혀있을 때가 나았지, 막상 펜스 너머 도시의 하루, 그리고 펜스 안 미군의 일상을 목격하고 내 처지와 비교하기 시작하니 한도 끝도 없이 우울해졌다.


2주일 즈음 지났을 때였나, 우연히 유튜브에서 세계테마기행을 접했다.


 

동물학자가 꿈이던 어릴 적 매일 같이 ‘동물의 왕국’을 챙겨봤던 나였지만, 본격적으로 학생 생활을 시작하며 본 다큐라곤 유명하디 유명한 수면 다큐 ‘우주의 끝을 찾아서’ 뿐이었기에 신기한 일이었다.


매일 근무가 끝나면 숙소에 돌아와 휴대폰을 내기 전까지 다큐를 계속 봤다.


작디작은 아이폰 7 화면을 통해 바라본 튀니지의 참치는 펄떡펄떡 뛰는 것이 싱싱했고, 바람칼로 베어낸 케냐 산의 절벽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은 게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절로 겸허해지는 구석이 있었으며, 부탄 사람들의 웃음에는 삶의 해학이 묻어 나왔다.


만리타향 영상을 구경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나갔다.



정신적 고통과는 별개로 맡은 바 소임은 충실히 다했기에, 마지막 날, 합창의장 코인을 받으며 훈련을 무사히 마쳤다.



기존 부대를 벗어나 새로운 장소에서 진행한 3주 간의 훈련과 낯섦에 대한 지속적인 노출에도 자유로의 갈망은 식지 않았고, 이후 여행에 대한 집착을 떨쳐내려 책을 읽었다. 읽는 속도가 원체 빠르기도 하지만 정말 많이도 읽었다.


그러나 한 번 찾아온 갈망, 아니 집착을 내려놓긴 불가능한 일이었고, 군인의 신분과 코로나로 인해 해외여행이 적어도 내년까지는 요원한 상황 속에서 난 결국 세계테마기행 정주행을 시작했다.


2021년 7월 즈음해 시작한 정주행은 이듬해 1월 초가 돼서야 끝이 났고,


수백 시간을 갈아 넣어 남은 것은  각 나라에 대한 희미한 인상뿐이었지만, 어쩌면 너무나 자명해서 남용되는 말 하나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달리 말해 "세상은 넓고 갈 곳은 많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확실히 박아 넣을 수 있었다.


다시 생각해도, 그 말 하나 심어 넣기 위해 다큐 150편을 봤다니, 인생 살며 가장 비효율적이지만 동시에 가장 효과적인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아직도 내 휴대폰 메모장에는 군생활 당시 정리한 메모가 남아있고,



이제 내 노트북에는 1주일이 멀다 하고 들여다보는 국가 목록이 있다.


스물 하나에 벌써 32개국 땅을 밟았고, 연내 8개국을 밟겠지만, 여전히 62개국이 남아있으니 갈 길이 멀고,


경비 문제 (르완다 마운틴고릴라: 1,500만 원) 혹은 시간문제 (아이슬란드: 권장 1개월), 혹은 경비 + 시간문제 (남극: 2,500만 원, 3주, 아프리카 대다수 국가)로 인해 근시일 내 가기 어려운 곳들도 존재하는 데다,


지구온난화 및 그에 따른 이상기후로 하루빨리 찾아가야 할 곳들 (그린란드, 노르웨이, 북극, 뉴질랜드, 아르헨티나) 역시 존재하기에 젊어도 시간이 많다는 느낌은 전혀 없다.


또한, 코로나와 군생활을 거치며 자유가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고,


취직, 결혼, 그리고 육아로 이어질 앞으로의 세월 속에 내 인생이 설 자리가 적다는 점을 실감하게 되자,


몸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상만 해왔던 버킷리스트를 종이에 옮겨 적었고, 그중 당장 실현 가능한 것들을 실천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1월 27일, 병역의 의무에서 잠정적으로 해방된 난


2개월 간 대강의 계획을 수립했고


3월 31일 인생 첫 배낭여행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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