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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 Jul 23. 2023

제대, 인생 첫 배낭여행 준비

독서 기행을 준비하다

어머니 무릎을 베고 전래동화를 듣던 영유아기를 지나,


부모님 몰래 새벽에 책을 읽다 시력이 1.5에서 0.1로 수직 낙하했던 초등학교 시절을 거쳐,


시험 기간에 방문을 잠그고 추리소설을 몰래 읽던 중학교 생활을 마무리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사르트르의 말마따나



어린 내가 세계를 알게 된 것은 책 덕분이었다.


1분에 대여섯 페이지를 휙휙 넘길 수 있는 속독 실력에 기대 연간 최소 200권 많게는 400권의 책을 독파했으며, 못해도 하루에 한두 시간을 꾸준히 독서에 투자했다.




열 살 무렵 골수 롯데팬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잡은 야구공과 99.9 MHz에 라디오를 맞추면 흘러나오던 이성득 해설위원의 목소리에 정신이 팔려 가끔은 독서에 소홀해지기도 했으나,


어디까지나 시즌은 144경기였고, 빌어먹을 자이언츠는 늘 이기는 경기보다 지는 경기가 많았으며, 매일같이 야구를 했던 것도 아니었기에 적당한 균형을 잡아가며 책을 읽었다.


학교에서 본 노을은 아름다웠지만, 일상은 각박해, 가끔 야구를 챙겨보는 것 외에는 별다른 취미생활을 즐기지 못했다.


덕진 다리, 콩쥐와 팥쥐, 여우누이 등 전래동화를 읽던 어린 나날에는 마냥 엄마와 보내는 시간이 좋았고,


삼국지를 십수 번 돌려 읽고, 성경을 완독하며, 로마인 이야기, 타라 덩컨 등을 읽었던 초등학교 시절엔 책을 씹고 뜯고 맛보는 즐거움을 깨달았다.


사춘기가 쎄게 왔던 중학교 시절에는 점심을 건너뛰며, 도서관에 숨어 무라카미 하루키, 제프리 디버, 그리고 스티브 라르손 작 책들을 읽으며 취향을 개발하는 한편,


수준에 맞지도 않는 버거운 책들을 소화하는 지적 우월감에 취해


버트랜드 러셀이 편찬한 서양사를 읽다 체하고, 민음사 전집을 아무 이유 없이 100권 읽었으며,


이해도 못하면서 신학대전, 방법서설, 팡세, 법의 정신, 인간불평등기원론, 레비아탄, 유토피아 등의 고전과, 론으로 끝나는 책들: 자유론, 국부론, 자본론, 그리고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철학자들: 하이데거, 사르트르, 니체, 헤겔, 칸트의 책을 자랑하려 읽었다.


그런 와중에도 과학적 소양이 부족한 것 같아 칼 세이건의 책을 시작으로 리처드 도킨스, 다윈 등에 손을 대다 양자역학에 손을 씨게 데었다.


돌이켜 보면, 제대로 이해했던 책은 E.H.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와 카뮈의 이방인이 다.



그렇게 오로지 입시 결과만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라도 하듯 작디작았던 고등학교 도서관을 거쳐 독서보다 재밌는 게 없었던 훈련소에서 다시 독서를 시작했다.


코로나 아래 복무 중이라는 현실을 잊기엔 책만 한 게 또 없었고, 쥐꼬리만 한 월급만 주는 국방부는 그래도 매년 독서지원금은 10만 원씩 챙겨줘, 읽는 만큼 책을 사다가는 살림이 거덜 나겠다는 집구석과 달리 책을 몇 권 살 수 있었다.


(이해는 한다. 매년 책을 100권씩 읽어내는 자식에게 책을 사읽는 습관을 심어주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거기다 35일의 격리가 겹쳐, 책을 원 없이 읽었다.



총 253권, 92,406쪽을 읽고 전역했다.


전역 당시까지는 미복귀 장기 출타 제도가 남아있어 소위 말하는 조기전역이 가능했고, 실제 행정적으로 전역이 처리되어 해외여행이 가능한 4월 11일까지는 약 두 개월이 남아 있었기에 당장 나가서 무엇을 할지가 고민이었다.


4월에 바로 해외로 떠난다 가정하면, 단기간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라 생각되었고, 군생활을 하며 돈을 모았기에 지갑이 얇지도 않았다.


좋아하는 야구는 4월이 다 돼서야 개막할 예정이었으며, 그마저도 코로나로 인해 관중을 받지 않을 것으로 짐작되었기에 (다행히, 그리고 불행히 유행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돼 결국 관중을 받았지만...),


돌고 돌아 내가 찾은 해답은 국내여행.


입대 전 3주일 친구와 함께, 그리고 어릴 적 한 달이 멀다 하고 부모님 손에 이끌려 떠났던 국내여행이고, 안 가본 지역이 거의 없긴 하나 그럼에도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에 향후 배낭여행을 위한 예행연습 삼아 훌쩍 떠나기로 결정했다.


가서 나쁠 게 없다는 생각에 여행을 결정했으니 참으로 무모한 결정이었다 싶으면서도 막상 결정을 내린 후에는 J답게 계획을 수립했다.



여행의 컨셉은 독서 기행.


어릴 적 어머니가 황순원 문학촌과 박경리 문학관을 다녀오신 후 며칠간 감회에 잠겨 있던 게 기억이 나, 나 역시 한 번 다녀오면 어떨까 싶었다.


처음엔 북스테이를 알아봤으나 여행보다는 휴식의 성격이 짙어 해외 유명/이색 서점을 찾아 떠날 미래를 그리며 다른 대체지를 물색했고,


그러다 눈에 들어온 곳이 파주였다.


헤이리 예술마을과 프로방스 마을로 관광지도 적당히 있고, 가장 중요하게도 출판 도시가 위치해 있어 제격이었다.


막상 출판사를 돌아다니다 보면 책 읽을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 서울 내에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도 미리 찾아 전후로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서울 친구들과 약속을 잡고, 개막전 티켓을 예매하고, 숙소를 예약하며, 계획을 세우다 보니 다가온 상경의 날


다만 별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국내 여행이라면 질릴 만큼 다녔고, 여행지로 바로 이동하는 것이 아닌 고등학교 시절에도 가끔 홀로 들렀던 서울에서 먼저 시작하는 일정이었기 때문일까...


그렇게 인생 첫 배낭여행, 첫 독서기행의 날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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