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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 Aug 30. 2023

인생 첫 배낭여행

파주 출판도시, 헤이리 문화마을

김정은이 멱을 딴 돼지마냥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대며 나를 쫓아왔고, 뒤따르는 군인들의 총화를 피해 푹푹 발이 꺼지는 진창에서 힘겹게 몸을 옮기며, 갈대밭을 지나고 펜스를 넘다 다리에 총을 맞으며 쓰러졌더니 침대였다.


처음으로 집을 오롯이 홀로 떠나 낯선 타지에서 맞는 밤은, 


초등학교 5학년 로욜라 매리마운트 대학의 이층 침대에서 맞았던, 고등학교 입학 후 모현읍의 기숙사 침대에 누워 룸메이트와 이야기를 나누며 맞았던, 그리고 껌뻑이는 비상등 빛이 그리고 거슬렸던 막사에서 맞았던 밤들과는 


고독이 주는 공포를 뼈 마디마디까지 깊숙이 새길 수 있다는 점에서 

내게 한 명의 어른으로 거듭나기를 강요했다는 점에서

사뭇 달랐다. 


악몽에 질려, 달아나듯 헤이리 문화마을로 가는 버스를 잡아탔다. 




파주. 


북녘과 접한 땅으로 유명하지만, 

신분 자체는 여전히 군인이었던 내 입장에선 그리 달가울 리가 없는 사실이었기에

통일이니 분계선이니 나발이니 다 집어치우고 


문화마을을 살짝 맛본 후

나름의 독서기행을 다니는 게 목표라면 목표.


그간 부산에서 부모님과 생활하며 먹을 일이 없던 파스타를 다시 한번, 이번에는 두 그릇 먹어치우고 한길책박물관으로 향했다. 



길을 타고 올라가 몇천 원 정도의 입장료를 낸 후 내부를 둘러봤다.


다양한 버전의 성경을 전시하는 공간, 엽서를 전시하는 공간 등이 마련돼 있었다.

오히려 책보다는 책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들의 박물관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나무로 치면 줄기가 아닌 곁가지 같은 분위기를 줬다.


< 그렇다. 책 >


가장 중요한 예술의 형태로써 집 다음 책이 중요하다는 윌리엄 모리스의 말. 일단 머리를 베고 누워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알아들었다. 



돈키호테, 호안 미로, 로미오와 줄리엣까지. 일관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전시였지만, 배치 자체가 깔끔하고 하얀 벽에 깔끔하게 단색으로 페인트칠을 한 공간 자체는 사람을 붙잡아두는 마력이 있었다.



이어 착시 박물관 비슷한 무엇을 찾아 눈을 혹사시켰다. 



옛날물건박물관을 찾아 근현대 한국의 모습도 구경했다. 중간에 부모님께 카톡으로 사진을 보내 드리니 좋아하셨던 기억이 난다. 


여하튼, 헤이리 마을은 출판도시보다는 이색 데이트 혹은 가족 소풍에 적합한 공간이었다. 커피를 마시지도 않는 내가 들어갈 리가 없는 가드너스라는 카페도 있고, 여럿이서 즐길거리는 많지만 혼자 온다면 감탄사를 공유할 누군가가 없어 옆구리가 시리기 마련인...


어린아이를 끼고 있는 부부든 아니면 커플이든 사방이 죄다 커플이었고, 혼자 여행하는 사람이라곤 나 혼자였다. 출판도시라는 이름에 혹해 첫날 목적지를 잘못 설정한 게 틀림이 없었다. 


시린 옆구리와는 별개로, 가방 하나 짊어지고 여행하는 것 자체에 별다른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을, 옆에 누가 없다는 사실이 신경은 쓰이지만 그럭저럭 혼자 빨빨거리며 잘 돌아다닐 수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 것은 분명 커다란 수확이었다고 생각한다. 


박물관들을 대충 다 돌아보고, 내가 향한 곳은 팝업 스토어.


원체 관심이 없어 - 저런 류의 상품 진열하는 곳을 팝업 스토어라고 부르는 건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고 - 부산에서 본 적도 없으니 뭔가 싶어 들어가 구경만 하고 나왔다.

  


티라미수도 하나 먹어주고 다시 서점으로 향했다. 



서점과 북카페를 겸하는 작은 공간이었는데, 대형 서점과 달리 작은 동네 책방 느낌으로 책마다 고심의 흔적이 묻어나 책을 즐겨 읽는 입장에서 즐거웠다.


 
첫 독서기행을 맞아 내가 선택한 책은 벤자민 그레이엄의 증권분석. 

 

시류에 휩쓸려 한창 주식에 관심이 많던 시기기도 했고, 무엇보다 저 두꺼운 책을 휴대폰이 늘 함께하는 집에서 집중력 있게 읽어낼 가능성이 전무하다는 점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기에, 덥석 집어왔다.

 

아니나 다를까 한 시간 즈음 읽고 나니 꾸벅 졸고 있는 자신을 발견.

 

책은 잘 쓰였지만 번역이 어렵게 돼있다 결론 내리고 책을 덮은 후 숙소로 돌아갔다. 

 

몸이 피로했던 건지 정신이 고독에 건지 누우니 잠이 왔고, 악몽 없이 깼다. 




같이 다닐 사람이 없어서기도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적어도 여행은, 혼자 다니는 게 편해졌다.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볍게 발걸음을 돌릴 수 있다는 게 첫 번째고, 부딪힐 일이 없다는 게 두 번째 정도 되려나.


어찌 보면 낯선 곳에 나 자신을 내던졌을 때, 몰랐던 나를 마주하고, 시련과 역경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혼자 떠나는 배낭여행의 의의가 있기에, 그것 역시 여행을 통해 발전하는 방식 중 하나기에, 혼자 떠난 것일지도 모른다.




다음 날은 본격적으로 출판마을을 찾아 독서기행을 시작했다. 



김영사에 가 핫초코를 한 잔 마시며, 책 발간에 대해 얘기하는 편집부의 이야기를 듣고,



열화당책박물관에도 잠시 들렀다. 



고서들뿐만 아니라 지도에 관련된 전시가 열리고 있었는데, 지도의 중요성에 대한 큐레이터, 박물관지기 분의 말씀이 인상 깊었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지나 



지혜의 숲에 들러 책향기를 맡고



근처에서 일차적으로 끼니를 해결한 후 



다시 한번 한 끼를 더 먹어치웠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2박 3일의 파주 독서기행, 그리고 3박 4일의 첫 배낭여행,



북녘으로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서울로 넘어갔다.



소전서림에 들러 다시금 책을 읽고, 



집에 돌아와서는 신축된 국회도서관에 들러 책을 왕창 빌려 읽었다.



군에서 나온 후 첫 달은 책에 소홀했다. 


결국 홀로 떠나와 확인하게 된 사실이라고는 

내가 잘 아는 나와 내가 알지 못하는 내가 

혼란 스러이 뒤섞인 모습이 나라는 점.


책을 좋아하고 책장에 파묻혀 앉아 있는 나, 그리고 낯선 곳에서 겁에 질린 나의 모습이 겹쳐 나라는 사람을 이룬다는 점.


나도 알지 못하는 나를 알아가고, 적응하는 것.

진부하지만, 자신을 오롯이 마주하게 되는,

외로움을 고독으로 바꾸는 법을 득하는, 

혼자만의 시간을 향유하는 것.


그럼에도 3박 4일의 상경은 충분치 않았고,

1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돌아봐서야 하나 확신하게 되는 것이 있다면, 

한 번의 배낭여행, 그것도 국내로의 안온한 배낭여행이,

8살 미국 땅을 처음 밟았을 때 뿌리내린 떠남의 씨앗을 자극해,

여행이라는 양분을 갈구하도록 나를 이끌었다는 점인 것 같다.


"아직 가봐야 할 곳이 너무도 많다." 


너무도 당연해, 3년 간의 입시 생활과 2년 간의 코로나 속에 잊고 지냈던 사실을

일깨워, 방랑벽을 자극해, 또다시 떠나가도록 종용했다는, 나도 모르는 새에 충동질했다는 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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