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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 Oct 15. 2023

겨울맞이

자그레브의 기억

아침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흐린 창에 맺힌 일그러진 상에 따로 눈을 두지 않아도, 창틀 너머 검붉게 물든 적갈색 지붕과 그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선명하고,


아침의 적막을 깨우는 빗소리에 뒤척이다 일어나, 몸을 가볍게 헹구고, 잠시 사귄 벗에게 인사를 건넨 후, 호스텔 밖으로 걸어 나왔다.



"크로아티아에는 비가 자주 오나요?

"겨울이면, 자주 오곤 하지요."

"그렇다면 겨울이 오나 봅니다."

"그런가 보죠."



무미건조한 직원의 대답을 뒤로한 채 밖으로 나오니 비가 오고 있었다.



비가 오네.

아침부터 세차게 내리더라고. 오늘 일정 괜찮겠어?

문제 될 것 없지. 오는 대로 가면 그만이니까.



관성적으로 우산을 펼쳐 들다, 오는 대로, 그저 서서, 비를 맞으며 생각했다.


그간의 여정에서 비는 피할 수 있으면서도 결코 가릴 수는 없는 악운이었다.


그런 내가 마지막으로 비를 피했던 것도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지난 8월, 에든버러(Edinburgh)에서였고,


이후, 아조레스, 마데이라, 파리, 룩셈부르크, 독일, 덴마크를 거쳐, 다시 독일, 튀니지, 니스, 모나코, 루마니아를 지나오기까지.


때론 흐렸고, 아주 가끔은 울상이었던 하늘은. 오늘에서야 그 속내를 내비쳤다. 어제 처음으로 내일의 날씨를 확인하지 않고 잠에 들었던가.


이번의 여행은 온전히, 더할 나위 없이 실패한 여행이었다.



플리트비체(Plitviche) 국립공원을 보겠다며 떠나왔건만, 정작, 웃고 떠들었던 지난밤의 기억은, 자연 속에 파묻혔을 하루는 - 잠시 일상으로부터 떠나온 내게 - 여전히 학업의 굴레를 벗지 못했노라 주지 시키려는 듯 - 빽빽한 노트와 뻐근한 손목이 대신했고,


긴 밤을 불태워 보겠다는, 흘러가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붙잡아 보겠다는 너와 우리의 계획은, 야속하게도 감겨오는 눈과 어정쩡하게 끊기던, 떠남을 전제한 대화에 수포로 돌아갔다



저녁의 자그레브, 오후의 좁은 책상, 다시 저녁의 자그레브를 거쳐, 비가 흐드러지게도 내리는 이른 아침, 머리카락에 맺힌 빗방울을 털어내며 버스 정류장에 멈춰 서 있다.


여행으로 말미암아, 삶의 무게에 무너지지 않게 된 나는 대신 무뎌지지 않는 법을 잃어버렸다.


혼자가 편해 훌쩍 떠나다니다, 이제서야 흘러가는 인연과 시간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게 되었으나


담담히 이별을 마주하는 방법은 끝끝내 배우지 못한 듯 - 못할 듯 - 하고, 그렇게 낯선 곳을, 떠나온 사람들과, 그 모두에 깃들 추억을 찾아 다시 떠나간다.



잘 가. 고마웠어.

나도. 안전하게 여행하고.

너도 몸 잘 챙기고.

그래. 지구 어디선가 또 보자.



푸르름의 계절을 지나 겨울이다. 어느새 자연스레 여행에, 그리고 내게 스며든 수많은 이별의 흔적을 들여다보며, 자그레브의 파란 트램에 몸을 실었다.


인간의 마음은 간사하고도 영리해, 지금의 아쉬움을 내일의 기대로 덧칠하고, 다시금 모레의 행복을 덧대곤 하지만,


아침부터 퍼붓는 자그레브의 비는 쉬이 그칠 것 같지 않고, 나는 파아란 하늘을 그리며 프랑스로 돌아간다.


두 시간 후면, 파리, 내일이면 메쓰의 강의실에 멈춰 설 나는,


두 시간 후면, 자그레브, 내일이면 스플리트, 그리고 끝끝내 호주의 시드니에 멈춰 설 너와,


미국 뉴욕, 호주 멜버른, 프랑스 파리, 프랑스 파리, 튀르키예 이스탄불, 독일 하노버, 독일 함부르크, 이스라엘 텔아비브, 이스라엘 텔아비브, 벨기에 앤트워프, 덴마크 힐러로드, 한국 부산, 모로코 아가디르, 튀니지 튀니스, 스위스 제네바, 알제리 알제, 벨기에 브뤼셀, 그리고 불가리아 소피아에 이미 멈춰 선


모두의 시계를 생각하고,



쓴웃음을 들이키며, 다시 멈춰 선 일상으로 돌아간다. 오는 대로 떠나가면 그만이니까.


아침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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