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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 Oct 16. 2023

책이 밥 먹여주냐

여행과 소비


이주 치 식비를 불어판 카뮈 전집 한 권에 탕진했다.



후회는 없다 되뇌지만 어떻게 포장하려 노력해도 충동적으로 소비했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고,


장을 보러 가는 내일이면 - 50유로 지폐 한 장 건네고, 20유로 지폐 한 장 거슬러 받았기에 실질적인 차이는 없으면서도 - 괜스레 가벼이 느껴지는 지갑에 집었던 햄 한 팩을 내려놓을 게 뻔해 코가 시큰거리지만,


땡전 한 푼 못 버는 헛바람 든 공부쟁이에게 부조리에 대한 카뮈의 저항과 실존주의적 위기는 뿌리칠 수 없는 강렬한 무엇이었다.


30유로, 한화 42,681원.


월요일이면 40분 걸어가 찾는 슈퍼마켓 코하(Cora)에서는 스무 개 들이 계란 한 판이 5.5유로, 2kg 쌀이 4.5유로, 양배추 한 덩이가 2유로, 그리고 식빵 한 팩에 3유로. 다해서 15유로.


요즘의 소비행각, 정확히는 여행의 맛을 알아버린 작년 10월부터의 소비행각은 기이한 걸 넘어서 기괴하기 짝이 없다.


다시 찾아오지 않을 젊음을 즐기고, 최대한 많은 땅을 밟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여러 문화를 두루 경험하겠다는 일념 아래, 매주 주말이면 다른 나라로 떠나, 적게는 150유로, 많게는 250유로를 씀과 동시에,


돈 없다는 핑계로, 어두운 방, 스탠드 하나 장만하지 않고 일찍 잠을 청하며, 부모님과 전화만 하면 감기 걸릴까 봐 사겠다 사겠다 말만 하는 헤어드라이기를 장만하기는커녕, 샴푸 살 돈이 아까워 누군가 남기고 간 샴푸가 호스텔 샤워실 바닥을 뒹굴고 있으면, 얼른 주워 들어 조그마한 통에 옮겨 담는가 하면은, 트램에 지출해야 하는 2.1유로가 아까워 1시간 내의 거리는 무조건 걸어 다닌다.



숙박비를 아끼겠다며, 공항에서 지새운 밤도 어언 2주를 훌쩍 넘겼고,


입을 만한 수영복이 없어 지난 5월 1하나 장만한 것을 제외하고는 15개월 간 흔하디 흔한 양말 한 짝 안 사,


아무도 볼 일 없고 (본다 한들 또 어떠한가) 기능에는 문제가 없다 합리화하며, 바닥이 해져 빵꾸 난 검은 양말과, 허벅지 부분에 나 있던 10원짜리 구멍이 이젠 100원짜리로 변해버린 사각팬티를 미련하게 입고 다닌다.


식(食)은 또 어떠한가.


한 달이 멀다 하고, 아마존에서 20개들이 신라면을 주문해 끼니를 대충 때우거나, 이역만리 한국에서 아들의 건강 상태에 대해 염려하고 계신 부모님께서 무언가를 보급해 주시기 전까지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 파스타와 밥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다.



지난주의 모든 끼니는 변주라곤 없어, 라면 혹은 밥, 계란 후라이, 그리고 양배추 쌈이 다였으며, 그전 주의 모든 끼니는 쌀이 없어, 라면, 그리고 파스타, 즉 면이 다였다.


결국,


양말 한 짝으로 자그레브에서의 공항행 전철 값을 퉁치고, 샴푸 한 통으로 고작 브라쇼브에서의 맥주 한 잔을 충당하며


스탠드 한 개로 니스 호스텔에서의 하룻밤을, 파리에서의 낭만적인 저녁 식사 한 끼로 스웨덴행 왕복 항공권을, 그리고 사지 못한 외투 한 벌로 바이에른 뮌헨 경기 티켓 한 장을 대신한다.


그럼에도 변치 않은 게 있다면 책에 대한 부단한 소유욕.



밀리의 서재를 구독함에 따라 많이 줄기는 했지만, 표지가 꽤나 인상적이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작 ’해변의 카프카‘를 발견했을 때나, 오늘처럼 우연히 카뮈 전집을 집어 들게 됐을 때,


머리가 회까닥 돌아버려, 기어코 책을 사버리고 마는 성정은 민음사 전집을 사달라며 그리도 졸라대던 어린 시절과 비교해 바뀐 게 전혀 없다.


제일 중요하게도 나는 불어를 전혀 하지 못한다. 그런 내가 무려 불어로 된 철학 책을 읽어낼 수 있을까? 읽어낸다 한들 어느 정도의 시간을 쏟아야 할까? 여러 의문이 스치지만 이를 계기로 공부하겠노라는 공허한 다짐으로 애써 그 속의 부조리를 닦아낸다.


고상해 보이긴 해도 실상은 같잖기 그지없는 내 지적 탐구는 그렇게. 언제 끝마칠지도 - 사실 끝마칠 수 있을련지도 불확실한 - 모르고, 보상이라곤 없으면서 레밍처럼 공허히 달음박질할 뿐.


내 영혼은 그 어느 때보다 풍족한데, 뱃거죽은 단단히도 등에 들러붙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노라 증명이라고 하고픈듯, 읽지도 못하는 책 한 권을 덥석 집어 들고는 이제, 2023년, 여든일곱 번째로 집어들 책에 대한 여든여덟 번째 글을, 그 거창한 변명을, 주저리주저리 휘갈긴다.


22년 하고도 8일의 시간 동안 밟은 땅도 사십 개가 다 되어가고, 이십 대 들어 읽은 책도 어언 팔백 권을 넘어가며, 올해 들어 쓴 글은 아흔 편에 다다르는데,


이 놈의 경험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어찌 풀어대든, 살림에 기여하는 바가 티끌도 없어 “책이 밥 먹어주냐”하는 당연한 질문만 내게 남기고,


어디 부조리한 게 내 소비 행태뿐이겠냐는 궁색한 변명 아래, 난 그렇게 어물쩍, 스리슬쩍, 사실은 홀라당, 다시 한번 속아 넘어가 끝끝내 이주치 식비를 책 한 권에 탕진하고야 말았다.


증명해야 할 게 너무도 많은 세상에서, 나의 값진 겅험들은 하등 쓸모가 없지만, 사실 이런들. 또 그런들 어떠한가. 책이 맛있고 편안하면 아무런 문제 없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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