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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 Mar 25. 2024

책 1,000권을 읽고

1259일 1000권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책은 최고의 친구였다고 말하면 반쯤은 거짓말이고 (물론 반은 진실이다), 지금 와서 굳이 이유를 찾자면, 고등학교 진학 전까지 집 TV로 야구를 볼 수 없었다. (기숙사 입소 후 매일은 아니고 거의 매일 2시간 이상 야구를 봤다는 점을 고려하면 부모님이 옳으셨다)


중학교에 입학해 워크맨을 사고 라디오 중계를 들었으나, 슬프게도 야구는 144경기러 연중 221일은 경기가 없으니 책 읽을 시간이 원체 많았다.


당시 내 독서의 깊이는 소금쟁이 딛고 간 수면처럼 얕고 다분히 과시적이었다. 니체, 데카르트, 칸트, 카뮈 등 유명한 철학자의 책과 민음사 문학전집을 독파했다. 그 시절 나만의 유치찬란한 멋이었다. 좋아하기는 추리 소설과 뚜렷한 결말 없는 일본 소설을 좋아했다.


그리 졸업해 한국 최고라 일컫는 고등학교에 덜컥 진학했건만, 양서는 웬걸, 도서관이 코딱지만 했다. ‘입시에 방해된다는 그 암묵적 옹졸함과 묵시적 합의에 대한 반항으로 도서관을 가지 않았다.’ 따위의 거창한 이유는 없고, 그저 야구를 너무도 많이 봐 책과의 관계가 소원했다.


그럼에도 어린 시절 하루죙일 (아버지 가라사대) 책에 파묻혀 있다 온 아파트에 실종 아동 방송을 틀게 했던 아이의 책 사랑은 어디 가지 않았고, 2020년 10월 입대 후 훈련소에서 나는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때 세운 무모한 목표가 20대 1,000권, 죽기 전까지 10,000권.



그렇게 오늘 1000번째 책을 읽어 치웠다. 그리 먹어 치워댔는데…배설되지도, 남아있지도 않으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다.


1,000권을 읽으면서 알고 얻게 된 것 몇 가지는 안타깝게도, 성공한 사람이 책을 많이 읽은 것과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 성공한 것은 다르다는 것, 행동하지 않으면 변화할 수 없다는 것, 생각하기에 존재한다는 것 따위의 의미와 여러 처세술, 쓸데없는 기묘한 상상력 및 잡학, 질문 및 사색에 대한 과도한 심력 낭비 등이겠다.


나라는 아집 덩어리의 관성은 실로 무섭고, 동시에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은 너무도 달라, 내가 무지하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그리고 인정하기까지 너무도 많은 시간이 -1,000권의 시간-이 걸렸고, 겸손은 아직도 요원하다.


나의 인생은 흩뿌려진 독서와 여행으로 점철돼 가는데, 저만치 친구들 달려가는 모습 보니 같은 인간이라 조바심도 나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상당히 있고, 향후 취향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세심히 봐주었으면 한다는 얕은 생각도 깃든 결과물이 오늘의 이 한없이 가벼운 글이다.



여하튼 난 응어리 진 화산보다는 포슬포슬한 계란찜에 가까운 인간이라 부풀어 오르기만 할 뿐 터지지 않고, 그런 내게 책과 여행은 스윽 휘저어 열기를 식혀주는 숟가락과 같다.


삶에 간혹 데이면, 책을 집어 들고 답을 찾거나, 책 속으로 도망쳐왔다. 훈련소에서 36권을, 코로나 블루가 한창이던 21년의 9월에 47권을, 유학이란 결정에 회의하던 22년의 8월에 69권을, 심적으로 고난했던 23년의 11월에 73권을 읽었고, 이번 달에도 어쩌다 보니 58권을 읽었다.


그렇게 습관적으로 책을 읽고, 여행을 다니다 보니 나의 세상은 까마득하게 넓어져 더욱 알 수 없게 되어버렸고, 술에 취하면 그립다 전화해 대는 친구 녀석의 말마따나 아무리 고민하고 읽어대도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본질적으로 나는 누구이며 존재한다는 것은 어떠한 함의를 가지는지 등을 도무지 알 길이 없다는 사실만 재차 확인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몇 가지는 확실히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어디론가 훌쩍 떠나기를 좋아하는 인간이다.


저녁이면 야구를 보고 밥상을 차리는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찾는 인간이다.


고독을 즐기지만 동시에 푹 빠져 살기에는 사람에 목말라 있는 인간이다.


사실 이미 알던 것들이다. 깨닫는데, 시간이 오래도 걸렸을 뿐. 새삼스레 알던 것들을 깨닫기 위해 책을 그리도 읽은 것 같다.


늘 그렇지만 고민이 여전히 많고, 생각은 더 많다. 그렇기에, 진부하지만, 읽고, 읽고, 또 읽겠다. 쓰고, 쓰고, 또 쓰겠다. 나라는 사람이 나로서 오롯이 설 수 있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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