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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 Apr 07. 2024

귀머거리, 머저리, 인종차별

야간열차의 순수악 (1)

“저 새끼는 피부도 혼혈 잡종처럼 생긴 게 하는 짓도 영락이 없네.” 허여다 못해 뻘건 혈관이 그 저열한 속처럼 들여다 보이는 백인 녀석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내저었고, 남인도 출신의 친구 녀석은 일일이 반응할 것도 없다는 듯 휴대폰에 저장된 노래 목록을 훑었다. 반쯤 잠들었던 다른 친구 녀석도 잠시 일어나 한숨을 푹 내쉬고는 다시 팔에 머리를 파묻었다.


부활절 방학을 맞아 4개국을 4일 만에 주파한 우리는 몹시도 지쳐 있었다.


< 낭트는 금빛이었다. >


목요일 오후 프랑스 북동부 로렌의 주도 메스를 떠나 낭트행 기차에 올라탔고, 도시를 잠시 둘러본 후 다시 파리로 떠났으며, 다시 파리에서 보베 공항으로 이동했다.


대구 공항이 부산에 있다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이, 파리에서 차로 1시간 30분 거리에 떨어져 있음에도 파리를 주장하는 작태가 괘씸했으나 곤궁한 지갑 사정을 생각하면 감지덕지였다.


그 밤 날아 체코 프라하에 도착했고, 다음 날은 오스트리아 빈으로, 그다음 날은 다시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넘어가 이제 스위스행 야간열차에 오른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건 숙면이었다.


기차에 올라타기 위해 역 주변을 뛰어다녀 이미 피곤했고, 불과 몇 시간 전 세체니 온천을 찾아 온몸이 노곤했기에, 누워 잠을 청할 수 있는 야간열차를 기대했으나, 막상 올라탄 열차의 여건은 열악했다.



열차의 내부는 태풍 온 뒤 매미 우는 날처럼 후텁지근했고, 온갖 오취가 뒤섞여 숨을 들이마시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야속하게도 창문마저 열리지 않아, 오후 온천에서 입었던 덜 마른 수영복 바지로의 환복을 - 좁디좁은 지린내 나는 열차 화장실에서 - 강요했다.


완전히 누울 수 없어 10시간을 좌석에 얹혀가야 하는 불편함은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어 납득했고, 코가 마비되어 감에 따라 냄새 문제도 나아졌다. 귀마개로 뒷자리서 떠드는 여자 아이들의 대화를 차단했고, 검표원에게 요청해 객실의 불을 껐다.


그럼에도 더위는 피할 길이 없어, 일요일 저녁 부다페스트 켈레티 역에서 떠나 리히텐슈타인과 접경해 있는 스위스 부크스 역행 야간열차에 탑승한 네 사람의 인형은 흡사 한여름 녹아내린 아이스크림처럼 허물어질 대로 허물어져 실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옆 자리에서 떠들어 대던 중년 남성에 비하면 이 모든 것은 약과였다.


녀석의 말에 그 누구도 대꾸하지 않았던 건, 으레 차별적 발언을 내뱉고는 이내 무안해져 왜 웃지 않냐 타박 주는 녀석에게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저 반박할 기력조차 잃어버렸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그의 말이 그리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말 생긴 게 하는 짓도 영락이 없었다. 피부니 잡종이니의 문제는 논하지 않겠다. 그건 잘못됐으니까. 다만 그의 행태와 몰골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많다.


외양으로 상대를 재단하는 우를 범하고 싶지는 않지만 - 실제로 여행 도중 가장 환하게 웃어주었던 이들의 행색은 대개 남루했다 - 그는 입은 대로, 생긴 대로 행동했다.


비닐과 구별도 되지 않는 이리저리 구겨진 재킷과 다린 적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청바지를 입은 노인의 모습은 추레했다.


얼룩진 파란 셔츠와 조금 구부려진 안경테, 파뿌리 속 듬성듬성 연 씨처럼 박힌 검고 기름진 실타래들, 그리고 검버섯으로 뒤덮인 그의 모습은 더러움을 넘어 기괴한 구석까지 있었고, 칸을 가득 메운 오취의 근원이 그의 노취라는 점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모든 좌석이 예약되어 있음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몰랐다면 본인의 좌석은 어떻게 찾았으며, 진정 몰랐다면 무임승차를 한 것이니 그것도 그것대로 문제다. 신경이나 쓰련가 싶지만) 좌석 4개를 본인의 소유물 마냥 취급하는 작태도 가증스러웠다. 반대편 좌석에 발을 올리고, 벗은 양말은 그 옆 좌석에 보란 듯 던져 놓았으며, 간이책상 위는 온갖 형체모를 쓰레기로 덮어놓았다.


그의 발과 그 부산물이 점유한 좌석 중 하나에 친구의 이름이 적힌 종이가 끼워져 있었다. 노인이 구사하는 언어는 46개국을 여행한 나조차도 들어본 적이 없는 언어였고, 영어로 비켜달라 요구해도, 명패와 우리 자신을 번갈아가며 가리켜도 씨알도 먹혀들지 않아 다른 좌석에 앉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었다.


실로 플로리다에서 나고 자란 허여멀건 녀석의 말에는 인종차별적 요소를 제외하곤 틀린 게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고 잠을 청하려 할 무렵 그의 휴대폰이 소음을 내뿜기 시작했다.


간이 칸막이 뒤편 옆 칸의 사람 몇이 고개 돌려 쳐다볼 정도로 무식하게 큰 틱톡 릴스의 소음에 나는 귀마개 위에 헤드폰을 덧댔다.


따가운 눈총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손가락을 꾸준히도 놀렸고, 바로 옆자리의 우리들은 2초 단위로 바뀌는 소음에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저건 그냥 순수악이야.” 남인도 출신 친구 하나가 상황을 요약했다.


“귀머거리거나 머저리겠지.” 백인 녀석이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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