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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 Apr 17. 2024

아버지, 맥주 갑니다.

기념품, 델리리움 녹터눔

기념품을 사지 않는다. 유럽으로 떠나와, 자석을 사모으거나 샷 글라스를 사모으는 친구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지만,


미니멀리스트적 삶을 지향하는 어머니께서 냉장고에 덕지덕지 붙은 자석을 좋아할 리 만무하고, 집에서 고도주를 마시는 건 나뿐이란 걸 너무도 잘 안다.


(내 배로 들어갈 술을 기념품이라 사 오지 않을 정도의 양심은 있다. 아니 없나?)


의류는 비싸서 제치면, 나를 위한 기념품은 무용하다. 집이 한국의 부산인지, 법국의 메스인지, 미국의 애틀랜타인지도 모르겠는 마당에, 사간다 한들 자주 꺼내 추억에 잠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추억에 잠기기에는 미국 유학생의 삶이 너무도 바쁘다. 결국 부산 부모님 집 어딘가에 박힌 채 잊힐 거란 걸 경험적으로 안다.


돈도 없고, 있다 한들 아까우며, 이미 마흔 개 이상의 국가를 기념품 없이 여행했는데, 이제 와서 사자니 괜히 멋쩍기도 하다. 뭐 대단한 일이라고.


여행 범벅인 일상이, 일상적 여행이 삶의 목표인데 기념품을 사는 행위는 여행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목표와도 배치된다.


이러한 변명을 다 떼놓고 생각해 본들, 올 때 꽉 채워온 캐리어에서 덜어낼 것이라고는 코트와 옷가지뿐이어서 정말로 공간이 없다.


핑계 하나 더. 한 명 챙기자니 다른 사람들이 서운해할 것 같고, 결국 캐리어 하나를 이미 기념품으로 채워 실어 보낸 친구의 이야기를 생각하자면 안 사는 게 답이라고 합리화한다.



여름방학의 여행 계획을 수립하며, 어머니와 나눈 대화는 선택에 어려움을 더한다.


"엄마, 나 소렌토 간 적 있어? 나폴리랑 폼페이는 기억나는데, 소렌토는 기억에 없어서."


(잠시 집이 부산스러워진다.)


"여기 찻잔받침을 네가 골라서 소렌토에서 샀잖니."


11년 전 산 찻잔받침을 아직도 쓰는 어머니를 보자 하니, 다음 10년은 거뜬히 버틸 무언가를 사야 할 것 같아 부담스럽다. 독일에서 영양제를 사 왔으면 하는 눈치긴 하던데, 독일 가는 게 집에서 해외배송하는 것보다 비싸다. (대문자 T다.)


그래서 결론은 식(食). 저번에 사간 프랑스의 와인은 그래도 한 잔은 마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내가 거의 다 비워 양심에 찔렸다.


이번에 아버지께 드릴 선물도 술이다. 병맥주.


어머니 선물은 파리에 가서 여자인 친구들의 조언을 구하는 게 낫지 않을까...


최고의 맥주를 꼽으라 하면, 체코 프라하의 코즐로브나에서 마신 코젤, 독일 뮌헨 아우구스티너-켈러에서 마신 라거, 그리고 아일랜드 더블린 기네스 양조장에서 마신 기네스 중에서 갈팡질팡하는 나이지만, 최고의 병맥주에 대한 답은 바로 튀어나온다.


< 맥주를 마시기 위해 브뤼셀을 3번 찾았다. >


8.5% 고도수의 벨지안 스트롱 에일, 델리리움 녹터눔(Delirium Nocturnum).


밤의 환각 증세라는 끝내주는 이름의 맥주는 냉장고에 얼리다시피 보관했다 꺼내 마셨을 때 최고의 향락을 선사한다.


탄산기 적고 묵직한 것이 기네스 좋아하시는 아버지 입맛에도 맞을 것 같고, 동시에 바닐라와 초콜릿 향도 살짝 배여 있어 충분히 이색적, 이국적이라고나 할까.


알코올 주장이 강하지는 않으면서도 상쾌하게 넘어가는 게 그저 음료로 즐기기에도 좋고, 고도수의 맥주치곤 안주와 곁들어도 합이 나쁘지 않다.


그래서 어제 델리리움 녹터눔을 한 병 샀고, 캐리어에 고이 모셔두었다.


아버지 맥주 한 병 사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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