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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 Mar 13. 2023

찰스 다윈 연구소

Island Alone

22. 12. 25: Day 10,


동행 없는 여행자에게 휴일은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또 다른 하루. 여행의 나날들.


옆구리 시린 것도 하루 이틀이지, 막상 동상에 걸리고 나면 멀쩡했던 감각도 무뎌지기 마련이다.


그런 맥락에서, 크리스마스를 홀로 맞게 된 나는 내년에도 혼자면 비참하겠다고 걱정하기보다는 '휴일'이라는 단어 자체가 계획된 일정에 미칠 영향에 대해 염려했다. 30분 걸어 도착할 찰스 다윈 연구소가 크리스마스에도 정상적으로 운영하리라는, 인터넷으로 찾은 정보가 정확하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물론 직접 가보는 것 외에는 뾰족한 수도 없었지만...




어릴 적 내 꿈은 동물학자였다.


매일 아침, 아버지가 출근하실 때쯤이면 조르르 달려 나와 동물백과를 들이밀었고, 점과 선을 겨우 구분하는 실력으로 그려낸 말 그림은 액자에 보관돼 아직도 집 피아노 위에 올려져 있다. 지금은 다 잊어버렸지만, 한때 동물백과 전체를 달달달 외우기도 했고, 저녁이면 침대에 기대 동생과 함께 동물의 왕국을 챙겨보곤 했다.


돈 벌기는 글러먹은 직업이라는 현실을 직면하기 전까지 나는 정글과 수풀을 헤쳐나가고 오지를 탐험하며, 멸종위기에 처한 동물들을 보호하기 위해 앞장서는 동물학자를 꿈꿨다.


가장 좋아하는 동물은 눈 덮인 절벽을 가볍게 타는 설표.

가장 인상 깊게 봤던 동물은 코모도왕도마뱀.


그러나 가장 신기하다 생각한 동물은 갈라파고스 땅거북이었다.


검버섯이 피어난 듯한 얼굴에 쩍쩍 갈라진 목,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큰 등딱지, 때밀이 수건을 챙기고 싶게 만드는 발들까지, 도무지 정내미가 가지 않는 생김새였지만, 당시에는 사람보다 더 오래 사는 동물이 있다는 게 마냥 신기했었다.


영생을 얻었다 전해지는 길가메시, 불멸의 명성을 쌓은 알렉산드로스, 불로초를 찾아 나선 서복, 그리고 죽음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종교까지, 불멸/불사에 대한 인간의 열망 혹은 집착은 어린 내가 보기에도 대단했었고, 그런 내게 적어도 수천 년 동안 영생의 길을 모색해 왔던 인류보다 오래 사는 종이 있다는 사실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더불어, 영아 사망률과 조기 사망률을 감소시킴으로써 평균 수명을 늘리는 데 성공한 인류가 아직까지도 최대 수명을 늘리지는 못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면, 인류보다 더 오래 살 수 있는 거북이의 존재가 참으로 흥미로웠다.


변화무쌍한 자연의 선택을 받은 것이 인류가 아닌 거북이라니... 어쩌면 그때부터 갈라파고스는 내 마음속 어딘가에 똬리를 틀고 있지 않았나 싶다.


< 연구소로 향하는 길에 자리 잡은 찰스 다윈 흉상 >


어린 내게 갈라파고스가 땅거북의 섬이었다면, 조금 더 자라난 내게 갈라파고스는 위대한 학자의 발자취가 묻어있는 섬이었다.


만화 형식으로 구성된 책, 각종 과학 서적, 그리고 생물 영재 수업 등을 통해 이미 자주 접해왔지만 내가 진화론이라는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 것은, 중학교 1학년, 도서관에서 ‘종의 기원’을 읽고 난 후였다.


당시 나는 질풍노도의 시기 속에서 방황하며 인간 실존에 대해 고민했다. 일개 중학생이, 아니 한낱 인간이 품기에는 너무도 거대한 질문이었으나, 어린 내게 그 질문은 무엇보다도 중요했고, 책 속에서 답을 찾기를 기대하며 일 년 동안 수백 권의 책을 탐독하던 나는 끝내 ‘종의 기원’을 통해 진리에 대한 헛된 갈구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책을 통해 다윈은 절대적인 진리가 아닌 상대적인 변화에 대해 논하며 신선한 화두를 던졌다. 진리에 순응하지 않고, 적응하는, 변이의 가능성을 내포한 개체, 그리고 절대적인 가치가 아닌 상대적인 변화의 주체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은 가치가 아닌 나 자신에게 다시금 집중할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




그렇게 대학교 1학년 겨울방학, 나는 땅거북과 다윈의 유산에 이끌려 30-40대나 돼서야 방문할 수 있을 줄 알았던 갈라파고스를 찾게 되었다.


한국에서의 비행기 값이 과장 조금 보태서 왕복 500만 원 수준인 것에 비해 애틀란타 발 중남미 왕복 항공권은 150만 원 정도였기에 최적의 선택이었다.




크리스마스 아침에 도착한 찰스 다윈 연구소는 한적했다. 명칭은 연구소였으나, 관광객들이 관람할 수 있도록 케이지를 공개하고 있었기에, 가이드비 10달러를 흔쾌히 지불하고 길을 따라나섰다.


< 표지판, 입구, 지도 >


최소 60줄은 지나신 나이 지긋하신 할아버지들께서 가이드를 맡고 계셨는데, 말씀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과 갈라파고스에 대한 사랑이 묻어나서 나도 모르게 경청하게 되었다.


거북 등딱지에 적힌 숫자의 의미, 선인장의 생태, 울프 섬에 서식하는 핑크 이구아나의 발견 과정과 같은 새로운 정보도 흥미로웠지만, 무엇보다도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섬사람들의 노력이 인상 깊었다.


가이드 분께서도 한때 십만 마리 이상으로 불어나 섬의 식생을 완전히 초토화시켰다는 염소를 소탕하기 위한 작전에 참여하셨다며 무용담을 늘어놓으셨고, 더불어 최근 벌레들로 인해 핀치 새의 개체 수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며 걱정을 드러내셨다.


< 어린 거북들과, 미동도 하지 않는 성체 거북들 >


사람들의 의지 및 노력과 대비되게 내부의 시설은 열악해 보였다. 인큐베이터에 대한 설명이 적힌 표지판이 있길래 내용을 읽어보았는데, 온도 유지를 위해 헤어드라이기를 사용한다는 정보가 적혀 있었다. 충격적이었다. 전공 분야가 아니기에 함부로 예단할 수는 없지만, 헤어드라이기가 정말 최선일까 싶었다.  


관광 산업을 통해 환경을 보전하기 위한 수입을 충당해야 하나, 동시에 관광 산업으로 인해 환경이 파괴되고 있다는 잔혹한 모순을 담담히 전해주는 가이드 할아버지의 말씀에는 한 명의 관광객으로써 정말 죄송스러웠다.


별생각 없이 어릴 적 버킷리스트를 달성할 요량으로 섬을 찾은 내가 부끄러웠고, 가끔 가다 길에 버린 쓰레기를 줍는 일 외에는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는 내 처지가 너무도 무력했다.


어릴 적 꿈이 이뤄져서 기쁘기도 했으나 동시에 박물관의 에어컨과 부화기의 헤어드라이어가 주는 대비가 씁쓸한 시간이었다.


< 안장형 등갑, 정교한 AI가 그려낸 듯 한 생김새였다. >


< 해변에 떠밀려왔던 고래 사체의 뼈 뒤로 다양한 생태계 복원 프로젝트들이 설명돼 있다.>


전시된 표본들과 진행 중인 프로젝트들을 돌아본 후 박물관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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