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운에 불운에 불운이 겹쳐...
22. 12. 29: Day 14,
저가 항공을 탈 일이 생기면 늘 노심초사하게 된다. 어디서 어떻게 문제가 생길지, 또 다른 추가 비용이 청구될지 감히 상상도 하기 싫기에...
그런 맥락에서, 악명이 높은 유럽 저가항공사들(Ryanair, Easyjet)만큼은 아니더라도, 코로나19 도중 파산 위기까지 겪은 아비앙카(Avianca) 항공을 타야만 했던 내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불안했다.
물론, 콜롬비아 엘 도라도 공항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지만, 본사가 있는 국가의 허브 공항에서 무엇인가 문제가 생긴다면 그 또한 우스운 일 아닌가.
이러한 우려들에도 불구하고 갈라파고스행 노선을 운영하는 항공사는 아비앙카 항공과 LATAM 항공 두 곳뿐이었고, 결국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20 달러 정도 더 저렴한 아비앙카 항공의 티켓을 끊었다.
오후 2시 출발, 저녁 6시 도착의 평범하디 평범한 항공편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하늘이 흐렸다. 어제의 산행 탓인지 몸이 쑤신 몸을 겨우 침대 밖으로 끄집어냈다.
지난밤, 찾아본 결과에 따르면 공항까지 가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였다. 공항행 버스를 잡아타거나, 택시를 이용하거나. 그렇게 항구에 도착하면 공항이 위치한 발트라(Baltra) 섬으로 이동하기 위해 페리를 이용하는 방식이었다.
일전, 호스텔 주인 내외께서 조금 더 머물다 떠나도 된다고 말씀하셨기에 기존 계획은 숙소에서 뒹굴거리다 점심을 해결한 후 공항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오후 2시 출발"이었던 비행기는 입도 며칠 전부터 오후 5시 47분 출발로 바뀌어 있었고, 점심을 먹고 셔틀을 잡아타 오후 3시쯤 공항에 도착하면 모든 것이 완벽할 터였다. 출발 시간 변경에 대해 앱으로만 고지하고 이메일 한 통 없다는 점이 의아하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내게는 좋은 일이었다. 비행시간이 뒤로 밀리니 일정에 숨이 틔였다.
버스의 경우 요금이 5달러라고 들었고, 반면 택시는 25달러였기에호스텔 주인 내외께 인사를 드린 후 버스 정류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숙소가 시내 중심에서 떨어져 있었기에 25분 정도를 걸어 입도 당시 이용했던 선착장으로 향할 계획이었다.
"아침부터 랍스터? 아니면, 볶음밥? 뭐가 됐든 디저트는 무조건 젤라토지."류의 실없는 생각을 하며, 첫 번째 골목을 돌아 나왔을 때였다. 갑자기 하늘이 우르릉거리더니 비가 쏟아져 내렸다.
랍스터를 향한 애타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비는 사정없이 쏟아졌고, 피해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대책 없이 택시를 잡아타고 Aeropuerto를 외쳤다.
잘못된 판단의 대가는 가혹했다. 40분에 25달러. 비는 쏟아져 내리는데 돈은 고대로 증발해버렸다.
부두에 다 오니, 웬수 같은 비가 언제 오기라도 했냐는 듯 그쳤고, 이내 얄궂은 태양이 고개를 내밀어 열을 뿜어댔다. 혹여 감기라도 걸릴까 맨투맨에 재킷까지 껴입었지만, 작열하는 태양 아래 곧 땀이 옷을 적시기 시작했고, 길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캐리어에 옷을 집어넣었다.
랍스터와 젤라토가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비행기 탑승까지 6시간. 도대체 무엇을 할 것인가... 외진 곳이라 그런지 아니면 휴대폰에 문제가 생긴 것인지, 데이터조차 제대로 터지지 않는 상황에 기가 막혀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숙소에 머물러야 했다는 후회가 물 밀 듯 밀려왔다.
선택지가 달리 없었다. 내리쬐는 태양 아래 계속 죽치고 앉아있을 수는 없었다. 페리를 잡아타고 공항으로 넘어가는 것이 우선이었다. 다행히 이 페리 역시 수상택시로 간주되는 모양이었고, 단돈 1달러에 발트라 섬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1달러의 기쁨이 5달러의 분노로 대체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갈라파고스에 공짜가 어디 있는가. 공항까지 셔틀 5달러. Or. 캐리어 끌고 걸어서 두 시간. 날씨가 괜찮다면 걸을 수도 있겠지만, 무작정 걷기에는 너무도 더웠고, 반면, 열린 버스 창 틈으로 솔솔 새어나오는 에어컨 바람은 거부하기에는 너무도 유혹적이었다.
차창 밖의 섬은 파종의 의무를 잊은 농부가 갈퀴로 낱알 한 톨까지 박박 긁어대기라도 한 듯 황량했다. 가뭄에 땅이 아래로 입을 쩌억 벌리고, 바싹 말라버린 나무들이 그 틈으로 몸을 뉘이려고 하고 있었으며, 질긴 덩굴들만이 그 영역을 확고히 주장하고 있었다. 중간중간 철제 울타리에 가둬진 채 키워지고 있는 무릎 높이 선인장의 모습이 기괴함을 더했다.
그렇게 도착한 갈라파고스 친환경 공항.
태어나 본 공항 중에 가장 작고 아기자기했다. 세계 최초로 친환경 공항으로 인정받았다는 광고가 여기저기 걸려 있었지만, 정작 내 눈길을 잡아끈 것은 아비앙카 항공의 카운터였다.
도대체 왜? 느긋함을 사랑하는 이 지방 사람들이 운영하는 항공사의 카운터가. 체크인까지 5시간이 남아있는데 열려 있는 것인가? 왜? 불안감이 엄습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전광판에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GPS UIO 14:00...
그리고 그 아래로 주욱 이어지는 항공편 목록들.
또 한 번 오만한 나의 편견이 만들어낸 착각이었다. 아무리 작은 공항이라고 해도 항공편이 하루에 아비앙카 한 편, 그리고 라탐 한 편, 이렇게 두 편만 운행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편견만으로 상황을 예단해버리고 마는 부정적인 습관을 고쳐야겠다고 생각하며 습관적으로 비행 편 목록을 아래로 훑었다.
한 번. 아니 두 번. 아니 세 번. 몇 번을 훑어도.
그 어디에도 17:48이라는 숫자가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내가 12월 29일이 아닌 다른 일자의 티켓을 잘못 구매한 건가? 어젯밤에 맥주를 마셨나? 분명 그냥 잤는데? 아니면 티켓을 금요일 저녁에 샀었나? 무슨 이벤트를 위한 몰래카메라도 하는 건가? 짧은 순간 별의별 생각이 스쳐 지나갔고, 카운터 앞에 늘어선 줄을 보자 그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비행기 시간은 애당초 바뀐 적이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휴대폰 앱에 여전히 덩그러니 떠 있는 0547이라는 숫자는 무엇인가.
카운터에서 비행기 편명을 대며, 이 비행기가 정말 두 시에 이륙하는 것이 맞는지 재차 확인했다.
맞단다.
앱을 보여주며,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인가 물었더니, 모르겠단다.
뭐가 됐든 이륙은 두 시가 맞다는 답변을 들었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어쩌겠는가.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화내봤자 달라질 것도, 아니 화내서 비행기 시간이 달라지면 그것도 그것대로 문제였기 때문에.
실제로 정말 다행이기도 했다. 내가 골목을 돌아 나왔을 때 비가 쏟아 내리지 않았다면, 부두에서 데이터 신호가 정상적으로 잡혀, 그곳에서 머물렀다면? 혹은 공항까지 무작정 걸어오기로 결정했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익일 새벽에 예약돼있는 항공편만 두 편이었다.
증발해 버린 25달러, 망가진 U-SIM (좌측 사진 우상단에 보이는 것처럼 공항에서도 3G만 터졌다. 덕분에 페이지 로딩에 몇 분씩 잡아먹은 것은 덤), 그리고 예상치 못한 5달러의 추가 지출까지. 불운한 상황들이 겹쳐 일어난 나비효과가 우습게도 폭풍을 막아줬다.
분노와 안도감이 뒤섞인 기묘한 상태로 체크인을 마치고 심사를 거쳤다.
이 또한 여행의 묘미겠거니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똥을 밟아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개똥을 밟아, 어떻게 약으로 써버렸으니 좋은 것 아니겠는가...
다행히도 심사 및 이륙 절차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고, 저녁 7시경 나는 또 한 번의 공항 노숙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키토 마리스칼 수크레 국제공항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