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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 Sep 09. 2024

인생 첫 공항 노숙

에콰도르 키토 마리스칼 수크레 국제공항 (UIO)

*브런치북 연재로 재업로드합니다.*


처음 드는 감정은 불안이어야 할 것이라 짐작한다.


짐작만 할 뿐 확신하지 못하는 것은 첫 공항 노숙이라는 짜릿한 경험에 내가 분명 설렜었기 때문이고, 불안 따위는 존재한 적도 없는 마냥 굴어댔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불면이 없었던 걸로 판명 났지만 여하튼 그건 나중의 일이고,


어린 치기에 하루쯤은 - 그게 한 달로 늘어나고 더 늘어나겠지만 - 공항에서 자는 것도 낭만 있겠다 생각하는 나사 하나 빠진 놈. 그게 나였다.


여행지에서 내가 경험하는 불안은 기껏해야 “비행기가 연착되면 어떡하지?" 거나 "입국심사에 별 문제는 없겠지?" 정도에 그치고,


비행기가 연착된들, 입국심사에서 문제가 생긴 들, 내가 조종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일도 없기에 이젠 불안이라 명명하기도 계면쩍다고나 할까.


더불어 이 썩을 놈의 불효자식은 이미 부모님이 충분히 불안해하실텐데 구태여 자식 놈까지 불안해할 필요 없다는 요상한 논리 - 결국 대가를 치렀다 - 를 내밀며, 게 눈 감추듯 불안 감추는데 도가 터버렸다.


그래서 사실, 지금 와서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잘린 사진 같은 장면 몇 뿐이며, 불안이라 뜬구름 잡기도 민망한 소소한 걱정 몇 가지 정도가 다.


카드를 먹고 뱉기를 반복했던 공항 왼편의 ATM, 불만 환하게 켜져 있던 갈라파고스 입도 관리청 창구, 둥글게 말린 입국장의 소파와 누워 자긴 좁다는 듯 다리 하나만을 올린 채 기대 잠을 청하던 메스티소들. 수수료가 없는 ATM은 작동하지 않아 수수료를 물 수밖에 없게 만든 담당자가 천재적이라는 생각을 잠깐 했던 걸로 기억한다.




사실 ‘이거 내가 잠든 사이에 누가 훔쳐가면 어떡하나?' 잠깐 고민했다. (나도 나름 걱정이란 걸 한다.)


그러나 이미 휴대폰 줄을 캐리어와 가방에 칭칭 묶은 데다 자물쇠까지 걸었으니, 나를 통째로 훔치는 게 아닌 다음에야 (이왕이면 백마 탄 공주님께서 훔쳐가셨으면 한다) 무용한 걱정인 데다,


남에게 폐를 끼치는 걸 죽어도 싫어하는 탓에 '알람을 안 맞춰 못 일어나면 어떡하나?' 또 잠깐 고민하지만, 나의 생체시계는 기겁할 정도로 정확해 이제껏 단 한 번도 원했던 시간보다 늦게 일어난 적이 없어, 이 또한 무용한 걱정일 따름이다.


고산병의 증세와 고산병 약의 부작용이 드러내는 증세가 같다는 점을 몸소 확인해 고단하지만, 백두산보다 높이 있는 도시에서 머물며 생긴 잔병은 바다에 둥둥 떠 있는 섬으로 날아감에 따라 차차 나아질 터.


< 사진을 찍은 기억마저 없다. >


유일한 문제는 내가 어디서든 머리를 대기만 하면 곯아떨어질 수 있는 재능의 소유자라는 점이었고, 아니나 다를까 일어나 보니 잔 기억이 없었다.


그렇게 나의 첫 공항 노숙은 약간의 설렘을 채 만끽하기도 전에 마취주사 맞은 환자가 자각 없이 의식을 잃듯 끝나버렸고, 불면 따위는 없었다.


낭만을 만끽하겠다는 목표는 온 데 간데없고, 뻐근한 허리를 부여잡고 입도세를 낸 후, 과야킬에서 승객이 전부 내리는데 나만 실려 있는 요상한 경험을 한 후 잠시 졸았다 깨보니 갈라파고스였다.


정말 아무런 사건사고 없이, 끝나버렸다. 그리고, 나는 다시금 내가 어디든 머리를 대기만 하면 곯아떨어질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라는 사실만 확인했다.


공항 노숙 따윈 껌이었다며 어깨가 귀에 걸려있던 난 피부가 까질 정도의 화상을 입고, 뒤꿈치가 바위에 베여 반으로 갈라지며, 오만에 대한 나름의 대가를 치렀고,


세상사에는 늘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는 법인지, (내 오르막길은 유독 가파르고, 내리막길은 유독 긴 것 같다만, 이건 착각이라 일단 치고), 그 다음 번의 공항 노숙은 가히 최악, 아니 그저 최악.


깜빡 잠에 들어버려 공항 노숙의 참맛을 깨닫지 못한 겁 없는 여행자의 다음 노숙지는:


이름부터 어려워 마음에 안 드는 포트로더데일 (로더레일인지 로러데일인지 매번 헷갈린다) 공항, 그간 방문한 94개 공항 중 최악이었던 그곳에서 이어진다.




여행 정보:

날짜 및 시각: 22.12.21 07:29 ~ 09:48

비행편: LA1419

출발지: 에콰도르 키토 마리스칼 수크레 국제공항 (UIO)

도착지: 에콰도르 갈라파고스 산크리스토발 공항 (SCY)

경유지: 에콰도르 호세 호아킨데 올메도 국제공항 (GYE)


사진 정보: 갈라파고스 틴토레라스 섬, 팔자 좋은 이구아나


특이사항:


키토 공항 발 갈라파고스행 비행기는 과야킬에서 멈췄다 간다.


급유를 위해서 멈추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공항에 착륙해 과야킬이 목적이었던 사람들을 내려준 후, 다시 갈라파고스로 떠나는 사람을 싣고 이륙한다.


덕분에 혼자 비행기에 덩그러니 남겨져 내가 비행기를 잘못 탔나 자문하다 - 심지어 청소하는 직원들이 들어와서 간단한 쓰레기마저 치우고 가는 것 아닌가 - 에라 모르겠다 하고 “갈라파고스 오 노?”라고 물었더니 “씨.”라길래 김이 팍 새 버려 그냥 가는 대로 실려갔다.


결론: 과야킬에서 내리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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