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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걸음

움베르토 에코

by 노마드

마지못해 하는 합의조차 찾아보기 힘든 시대다. 모두 자신만이 옳으니 설득이 설 자리가 없다. 규율마저 정치적이라 매도되는 사회에서, 남용은 관행으로 굳었고, 폭력도 머지않았다.


속된 말로, 캐삭빵이 없는 사회다. 모두 나서서 시원하게 까뒤집어, "나 무죄요!" 주장한들, 이미 귀를 막아 들릴 수도 없고, 까뒤집을 만큼 깨끗하기 어려우니 "저놈 유죄요!"라는 면피성 주장에 힘만 실린다.


덜 고인 놈이나 더 고인 놈이나 똑같이 썩어 고여 있다. 남용의 규율만이 유효한 이곳에서, 새로운 물 콸콸 쏟아지는 일이 두려우리라. 이쪽이나 저쪽이나 켕기는 것만 수두룩 빽빽한지. 가만히 있는 국민만 경화해,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갈라 쳐지고 놀아나는 판국이다. 가만히 있던 게 죄라 매도하니, 회색 지대는 없고, 수챗물만 한가득이다.


머지않아 잿물 시뻘게지고, 그 누구도 설득할 필요조차 없는 때가 오면, 소시민 하나가 '나 무죄요!'라 외치며 스러져도 아무도 듣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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