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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브해의 재키 찬

카리브. 매거진 비치

by 노마드

그레나다 관광청은 '매거진 비치'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느긋하게 산책하거나, 수영, 스노클링, 그리고 카약을 즐기기에 완벽한 곳이라고. 한 줄 정도는 더 곁들여도 좋으리라. 진부하지만 더없이 효과적인. '그림 같은' 해변이라고. 당신이 그리던 카리브해가 여기 있노라고.


엘 코만단테의 흔적을 뒤로하고, 나는 발걸음을 돌려 해변으로 향했다. 공항을 벗어나 주차장을 따라 길을 올라가다 보면 포장되지 않은 흙길 하나가 좌측으로 이어지고 아스팔트 도로는 완만한 언덕을 감아 돌며 우측으로 빠져나간다. 우측의 언덕 맞은편에는 미국의 그레나다 침공에 희생된 쿠바인 24명을 기리는 추모비가 하얀 쿠바 국기 석탑을 중심으로 세워져 있고, 좌측으로 내려가면 식당 앞에서 청소부 하나 한가로이 낙엽을 쓸고 있는 평화로운 해변이 관광객을 맞이한다.



해가 따사롭게 내리쬐는 이른 아침, 나는 이 해변을 온전히 소유한다. 모래를 움켜쥐듯 천천히 한 발, 때로는 과감히 한 발 모래 속에 발을 파묻는다. 발등을 어루만지는 낮의 온기와, 힘을 줄 때마다 발가락 사이를 까끌거리며 스쳐가는 밤의 냉기를 느껴본다. 이리저리 폴짝 뛰어다니다 보니 모래에 여러 흔적이 남아 해변은 더 이상 깨끗하지만은 않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나는 이 해변이 온전히 나의 것만 같다.


새하얀 포말에 청록빛 윤슬이 일렁인다. 카리브해의 바다. 산호의 파편일지, 해조류의 부스러기일지, 조개껍데기의 편린일지, 그마저도 아니면 화산재의 조각일지 알 수는 없으나, 파도가 모래를 어루만지고 지나가면 모브색 잔영이 남는다. 백옥빛 피부 위를 수놓는 블러셔처럼 파도의 조각은 모래의 알갱이를 톡톡 실어 나른다.


걱정은 없고, 시간은 많다. 여유.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카리브해를 보여드린다. 가방을 씨 그레이프의 기둥에 기대어 두고, 그 가지에 걸었던 수경을 챙겨 물속으로 풍덩. 파도 너머 바닷속으로 헤엄쳐 가 가라앉는다. 물은 차갑지만 맑고, 수경 너머로 빛이 일렁인다. 이대로 잠겨 죽어도 좋을 차가운 바다와 따스한 햇살의 조화다.


가끔 지나가는 관광객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인다. 고개를 조금 갸웃거리다가도 이내 환하게 웃으며 "굿 모닝" 외쳐주는 커플들. 혼자여도, 둘이여도 카리브해는 굿 모닝이다. 나무 아래 땅을 움푹 파낸 후 넙데데한 갈색 나뭇잎을 주워 깔아준다. 모래에 몸을 뉘인 채로 가방에서 주섬주섬 노트북을 꺼내 짧지만 강렬한 삶을 살았던 아비치의 다큐멘터리를 시청한다. 끔뻑끔뻑 눈이 감겨오고 잠시 졸았던가.



고개를 빼꼼 내민 노란 대서양 유령게(Atlantic Ghost Crab)와 눈이 마주친다. 눕기 위해 파내었던 모래가 집 위를 덮친 모양이다. 유령게는 왼 집게발로 집을 보수하기 바쁘다. 장난기가 발동해 자리를 털고 일어서자, 녀석은 순식간에 구멍 속으로 달아난다. 그 위에 모래를 다시 덮어둔 지 5분, 10분쯤 지났을까.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게는, 화가 난 건지 아예 다른 구멍으로 쏙 들어가고, 30분이 지나도록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미안한 마음이 들다가도, 아까 해변가에 밀려와 있던, 잘근잘근 씹힌 노란 게딱지를 떠올리니 안에 오래 있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 싶다. 갈매기들은 여전히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그러나 언제든 도약해 덮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지점에서, 뚜벅이며 해변을 활보하고 있다.



체 게바라가 과테말라의 아티틀란 호수에서 혁명의 꿈을 내려놓을 수 있다 말했던가. 거창한 꿈 따윈 원래도 없었지만, 잡지에 나올 법한 이 해변에서의 시간은 멈추어 있고, 나는 꿈속을 거닌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와 부드럽게 뺨을 스치고, 이마에 들러붙은 모래알겡이 몇을 후 불어낸다. 바람결에 맞춰 푸르른 씨그레이프 잎사귀들은 사각거린다. 모래는 따스하고, 나는 현실과 꿈의 경계를 넘나 든다. 이 해변에는 어제도 내일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지금, 오늘 이 순간만이 더없이 선연하게 오롯이 흘러갈 뿐.



잡지 속의 그림 같은 해변이다.



해가 머리 위로 올라오고, 해변을 찾는 사람도 늘어간다. 그럼에도 아시아인은 나뿐이다. 여태껏 그레나다를 찾은 한국인 여행객이 1,000명은 될까. 그중 공항에서 95동카리브달러를 지불하지 않고, 5분 걸어 잡지 속의 해변을 찾은 사람은 몇이나 될까.


어디선가 흑인 하나가 나타나 바다를 향해 낚싯줄을 던진다. 그는 파도 너머의 고기를 낚으려 시도하나 계속 실패하고 결국 떠난다. 시계는 1시를 가리키고, 나는 마지막으로 물에 들어간다. 짐이 걱정은 되나, 별 일은 없을 것 같고, 파도가 치지 않는 먼바다로 나서 물고기를 구경한다. 뭍에 나와 괜히 조개껍데기 몇 개를 주워 챙기고, 몸을 말린 후 짐을 싼다. 네 시간이 자각도 없이 흘러갔다. 남는 건 사진과 조개껍데기뿐. 수많은 바다를 떠돌았을 조개껍데기는 이제 뭍으로 나와 대서양을 건너 내 동전지갑 속에 들어있다. 분명 나는 온전히 나의 해변이었던 이곳의 평화로움을 그리워할 것 같다.


1시간의 행군을 준비한다. 기온은 30도 중반, 숙소까지는 걸어서 1시간. 차로는 10분도 채 안 걸리는 거리지만, 배낭여행자에게 선택지는 많지 않다. 내일 아침에도 비행기를 타기 위해 걸어야 할 길이니 예습하는 셈 치며, 마지막으로 해변을 눈에 담고 길을 걷기 시작한다.



무너지지 않는 게 놀라운 토벽의 공항 주차장을 먼저 지나친다. 저 차를 탈 돈이 없어서 걷는다. 히치하이킹도 고민해 보지만, 1시간은 그렇게 멀지 않은 거리이고, 12월 대비 10% 비싸진 35달러는 아까우며, 바다, 리조트, 그리고 크루즈로만 포장된 천편일률적인 카리브해 여행보다는 이렇게 사람 냄새 묻어나는 거리를 걷는 여행이 아무래도 아직 젊은 내게는 맞다.


< 영국항공, 에어캐나다는 제대로 표기했으나 젯블루는 아니다. >


인도랄 게 없어, 아스팔트 차선 옆의 갓길을 걸어가지만, 바하마와 코스타리카 등지에서 단련된 여행 기술은 이럴 때 빛을 발한다. 이곳 그레나다는 젯블루 옆에 아메리칸 항공의 로고를 박아 넣어도 아무도 의문을 품지 않는 나라이니, 로카 티 입은 아시아인이 땡볕 아래 걷고 있어도 신경 쓰지 않겠다.



이 나라는 아직까지 일상생활에서 석탄을 사용한다. 어느 집 굴뚝에선 아직도 석탄 때는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배낭여행이 아니었다면 스쳐 지나갔을 풍경들이다.



또 어떠한 갓길에서는 하얀 염소들이 풀을 뜯고 있고,



또 어떠한 해안가에는 요트 수십 대가 계류하고 있는데, 그 대비가 무척이나 이색적이다.



그레나다의 수도, 세인트 조지스로 향하는 길의 로터리에는 카리브해 국가들의 이름이 새겨진 목판이 여행자를 맞이한다.



거리에는 과일상들이 트럭에서 파인애플과 망고 등을 팔고, 세제가 하천을 흘러내려오는 걸 보아하면 이 나라는 아직 완전히 발전하지 못했다. 오르막길 앞의 술집을 지나 숙소로 향하니 들려오는 "째키 찬." 너무 환하게 웃는 걸 보니 악의는 없는가. 얼굴 좀 탔고, 머리 좀 길었다고 재키 찬이라니. 성룡은 나보다는 잘생겼으니 넘어갈까. 평일 오후. 일들은 안 하는 건지, 카리브해의 실업률 문제가 심각하다던데... 술을 거하게 한 것 같은데, 웃으며 손을 씩 흔들어주니, 사내 몇이 "째키, 째키" 이름을 연호하고, 나는 손을 들어 흔들어주고선 그저 내가 이방인임을 더없이 실감하며 실소할 뿐이다.



숙소에 도착해 몸을 씻고, 물을 끓인다. 마늘은 이미 쉰 것인지 냄새가 고약하지만, 상하지는 않은 것 같아, 웰컴 간식으로 놔둔 땅콩과 가져온 마늘, 기름 등을 섞어 알리오 올리오를 만들어 먹고 잠시 낮잠을 청한다. 아침의 일이 꿈만 같다. 에어컨 바람은 시원하고, 고요했던 바다의 파도소리와 소란스러웠던 사내들의카리 외침이 뒤섞이며, 카리브 해의 째키 찬은 침대에 누워 꿈속으로 빠져든다.




*It is a perfect place for a relaxing walk, swimming, snorkeling or kaya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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