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트로의 발자국
그레나다에는 여전히 엘 코만단테, 피델 카스트로의 흔적이 짙게 남아있다. 공항을 나서니 후끈한 바람이 나를 맞았고, 나는 체크인 전까지의 시간을 때울 요량으로 해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지도는 나를 잘못된 길로 이끌었고, 이윽고 낯선 풍경이 - 어딘가 현실과 유리된 듯한 - 눈에 들어왔다. 왠지 모르게 숙연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구리 동판들이 붉은 별이 떠오르는 쿠바 국기 모양의 석상을 에워싸고 있었다. 1983년,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그레나다에는 어떠한 시대의 암운이 드리웠을까. 바닷바람이 불어왔고, 나는 석주들이 둥그렇게 놓인 단 위에 걸터앉아, 이 작은 섬나라에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1983년의 쿠데타 이후 카리브의 소국 그레나다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역내 동카리브국가기구(OECS)와 바베이도스, 그리고 자메이카는 모두 미국에 지원을 요청했고, 카리브해 소앤틸레스 제도의 섬에서 월남전 이후 최대 규모의 미군 군사 작전이 진행되었다.
쿠데타의 서막: 권력 투쟁과 비극의 씨앗
1983년 9월, 그레나다 인민혁명정부는 여러 파벌로 분열돼 있었다. 부총리 버나드 코어드(Bernard Coard)의 파벌은 당시 총리 모리스 비숍에게 사임 혹은 권력의 공유를 강요했고, 비숍 총리는 거절했다. 같은 해 10월 13일, 코어드 파벌이 인민혁명군을 동원해 비숍 총리를 가택연금하며, 쿠데타의 막이 올랐다.
스페인의 언론 엘 파이스(El Pais)는 미국의 그레나다 침공 이후 11년이 지난 1994년의 기사,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을 통해 당시의 분위기를 밝힌다. '그레나다의 목소리(Grenadian Voice)'의 편집장 레슬리 피에르는 회고한다. "최종적으로 3만 명이 모였어요. 그레나다 전체 인구가 10만 명도 안 됐는데 말이죠."
국민 셋 중 하나가 쿠데타에 반대하기 위해 거리로 뛰쳐나왔으며, 비숍 총리는 시위대의 도움을 받아 감옥을 탈출했다. 10월 19일, 비숍의 지지자들은 감옥으로 몰려들었고, 처음에 총을 대응하던 간수들 역시 돌아서 무기를 내려놓고 시위대에 동참했다. 비숍 총리가 이끄는 시위대는 수도 세인트 조지(St. George's)를 행진했다.
혁명의 그림자
쿠데타의 연쇄는 대물림 된다. 1979년 야당 당대표였던 모리스 비숍은 인민혁명을 일으켜 당시 UN에서 연설 중이던 게리(Gairy) 총리를 축출했다. 게리 정부가 위협과 협박을 일삼고 부정 선거를 자행했다는 게 이유였다. 그가 근거로 내세운 명분은 사실이었다. 이후 비숍은 총리직에 올랐고 헌법을 정지시켰다. 그는 과거 연설을 통해 민주주의의 도입에 있어 시점의 중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선거는 중요할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바로 '시점'이다. 우리는 경제가 보다 안정해지고, 혁명이 보다 강건해졌을 때 선거가 실시되기를 바란다. 더 많은 인민이 실질적인 혜택을 누릴 때. 더 많은 인민이 문맹에서 벗어났을 때. 표현의 자유는 인민이 굶주리지 않고, 자신을 대변하지 못할 정도로 지쳐있지 않을 때에서야 의미를 가진다... 우리는 다수가 누려본 적 없는 인권에 대해 이야기한다. 일자리, 괜찮은 집, 한 끼 식사 같은 것들. 그간 카리브해에서는 소수가 인권을 독점해 왔다. 이제서야 처음으로 다수가 이러한 인권을 누릴 시기가 도래했다."
모리스 총리의 뉴 주얼 운동* 아래, 그레나다에는 공공 의료 체계가 도입되었고, 문맹률이 35%에서 5%로 낮아졌으며, 실업률 역시 50%에서 14%로 감소했다. 두 체제가 대립하고 양 진영이 차악이 최선이라 믿던 시대적 배경 속에, 비숍 총리는 분명 단기간에 그레나다의 발전을 이끌었다. 그럼에도 시민들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탈출한 그는 축출될 운명이었다. "나는 이미 죽은 목숨일세 (I am a dead man.)"라며 처지를 비관했던 비숍 총리의 확신에 가까운 예언은 빗나가지 않았다.
비극적인 종말: 총살, 그리고 암매장
코어드 부총리가 이끄는 인민혁명군은 비숍과 내각 장관 및 보좌관을 비롯한 관료 일곱 명을 체포했고, 4인조 총살대가 포트 루퍼트(Fort Rupert)의 안뜰에서 기관총으로 그들을 처형했다. 비숍의 죽음 후 한 병사는 그의 목을 그어 혹시 모를 후환을 방지했으며, 반지를 훔치기 위해 손가락을 잘랐다. 군은 사망자의 시신들을 칼리브니(Calivigny) 반도의 군사 기지로 옮겨 소각했으며, 유해의 정확한 위치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미국의 그레나다 침공: 냉전의 또 다른 그림자
쿠데타는 평소 피델 카스트로와 모리스 비숍의 밀월 관계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레이건 정부에게 놓칠 수 없는 명분을 제공했다. 이전부터 미국은 그레나다가 쿠바와 협력해 건설 중이었던 포인트 샐리너스(Point Salines) 공항의 활주로가 소련의 항공기를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길다며, 공항의 전용 가능성을 제기했다. 같은 해, 론 델럼스 하원의원은 공항의 용도를 검증하기 위해 모리스 비숍 총리의 초청을 받아 그레나다를 찾았고, "이 사업이 경제 발전을 목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군사적 용도가 아님"을 의회에 설명했다. 그는 "공항이 국가 안보에 군사적 위협을 가한다는 미국 정부의 주장이 터무니없으며 완전히 부당하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레나다에 피델 카스트로가 "노동자이자 군인"이라고 묘사했던 쿠바 건설 인력들이 존재했으며, 머물던 800여 명의 쿠바 인민 중 60명이 군인이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후, 레이건 대통령은 "그레나다에 있는 미국 의대생 600명에 대한 우려"와 불과 3년 전에 종식된 이란 인질극과 유사한 사태가 재발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며 침공을 정당화했다.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는 사석에서 사전 협의의 부재와 단출한 통보를 이유로 군사작전을 탐탁지 않아 했다고 전해지며, UN 총회는 108대 9의 투표로 그레나다 침공을 "국제법의 명백한 위반"이라고 규탄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미 1983년 10월 25일 조셉 맥클리프 장군과 노먼 슈워츠코프 장군을 필두로 한 미군 7300명의 미군 병력은 그레나다를 침공한 상황이었다. 월남전 이후 미군이 참여한 최초의 대규모 군사작전이었던 긴급 분노 작전(Operation Urgent Fury). 스텔리온, 코브라, 시나이트가 그레나다의 밤을 수놓았고, 엘 파이스는 한 학생의 증언을 빌어, 당시의 상황을 강렬하고도 간략하게 전한다.
"완전히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 같았어요.”
그레나다 침공 이후 미군은 월남전의 패배를 딛고 일어서, 강대국의 수렁이 된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돌입하기 전까지, 파나마 침공과 걸프 전쟁 등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일방적인 침공의 결과로 건설인부를 비롯한 쿠바인 24명이 사망했으며, 그레나다는 입헌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했다. 작금의 그레나다는 10월 25일을 침공을 기념하는 추수감사절이라는 국경일로 쉰다. 예나 지금이나 국제 정치는 본질적으로 야생이라 소국이 강대국의 등쌀에 시달리는 건,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져가는 건 여전한 것일까. 나는 단에 앉아 깊이 생각에 잠겼다.
모리스 비숍 국제공항에 착륙해,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 심사대로 가는 길의 우측 벽에는 '포인트 셀리너스 국제공항'이 1980년에서 1983년 사이 쿠바의 지원으로 건설되었음을 명시하는 동판이 존재한다. 새겨진 일자는 1998년 8월 2일. 쿠데타와 침공 이후 15년이 지난 1998년에서야 동판이 공개된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단순하다.
1998년 1월 2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역대 교황 중 최초로 쿠바를 방문했다. 역사적인 5일간의 일정을 소화하며, 그는 마지막 날 오후 아바나 혁명 광장에 모인 80만 명의 군중 앞에서 미사를 집전했다. 강론을 통해 전달된 그의 메시지는 명확했다. 그는 "맹목적인 시장경제 원칙에 따라 움직이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가 제3세계 빈국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짐을 지우고 있다"라고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며 간접적으로 미국을 겨냥했다. 이어진 출국행사*에서는 더욱 직접적으로 미국을 비난했다. 교황은 미국의 경제제재 조치가 "부당하고 윤리적으로 수락될 수 없는 것"이라고 강렬하게 비판했다.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이 방문 일정에서 "쿠바인들이 당하고 있는 물질적, 도덕적 빈곤의 고통은 무엇보다 부당한 불평등, 개인의 자유 제약, 비인간화와 개인의 낙담뿐만 아니라 이나라 외부에서 부과된 부당하고 윤리적으로 수락될 수 없는 억압적인 경제제재조치에 근원이 있다."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이에 클린턴 정부는 쿠바계 미국인들의 쿠바 방문 및 국제 송금을 용이하게 하고, 직항 편 재개를 추진했으며, 인도적 지원 확대를 개시했다. 그럼에도 의회는 기존의 입장을 고수했고, 2001년 9월의 테러 이후 부시 정부는 쿠바를 '테러 지원국'으로 규정했으며, 양국이 국교를 정상화하기까지에는 무려 17년의 세월이 더 필요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쿠바 방문이 이뤄진 지 16년이 지난 2014년 12월 17일, 프란치스코 교황의 생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쿠바와의 외교 관계 정상화를 위한 협상에 돌입했다고 밝혔다. 이어 이듬해인 2015년 7월 1일, 양국은 국교를 정상화했다. '1983년 10월 25일 여기 이 고귀한 대의를 위해 쓰러진 24명의 쿠바 국제주의자들을 기리며'라는 문구는 그리하여 2015년 10월 25일, 모리스 비숍 국제공항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석상 아래 새겨지게 되었다.
이 작은 섬나라의 한구석에 각인된 피델 카스트로의 흔적은 역사적 사건의 회고를 넘어, 냉전의 복판에서 소국이 겪어야 했던 희생과 선택, 그리고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소용돌이치던 시대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역사란 자주 잊히고, 때로는 묻히지만, 우연한 발걸음을 통해 다시 환기되고는 한다. 이제 한 때 붉었던 별 사이로 비치는 그레나다의 하늘은 더없이 푸르르다. 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간혹 별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구름을 보며, 한때 이 작은 섬나라에 드리웠던 전운을 떠올리며.
*뉴 주얼 운동(New JEWEL Movement, NJM)은 1973년 그레나다에서 결성된 좌파 정치 조직의 운동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흑인 해방 운동의 영향을 받아 사회 정의와 반제국주의를 추구했다. 이 조직은 모리스 비숍(Maurice Bishop)이 이끄는 '국민의회운동(Movement for Assemblies of the People, MAP)'과 유니슨 화이트먼(Unison Whiteman)이 이끄는 '복지, 교육, 해방을 위한 공동 노력(Joint Endeavor for Welfare, Education, and Liberation, JEWEL)'이 합병하여 탄생했다. 1979년 3월 13일, NJM은 당시 총리 에릭 게어리(Eric Gairy)가 해외에 있는 동안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인민혁명정부(People's Revolutionary Government, PRG)'를 수립했으며, 헌법을 정지시키고 의회를 해산했다. 4년 후인 1983년, NJM 내부에서 비숍과 버나드 코어드 부총리 간의 권력 갈등이 심화됨에 따라, 결국 비숍 총리는 체포 후 처형되었으며, 미국이 그레나다를 침공함에 따라 NJM 정부는 붕괴했다.
*Elections could be important, but for us the question is one of timing.... We would much rather see elections come when the economy is more stable, when the Revolution is more consolidated. When more people have in fact had benefits brought to them. When more people are literate... The right of freedom of expression can really only be relevant if people are not too hungry, or too tired to be able to express themselves
*https://www.yna.co.kr/view/AKR19980126004201009?section=news
*https://www.yna.co.kr/view/AKR19980126001000009?section=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