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마드 Mar 22. 2023

WBC 결승 직관

만화에서 튀어나온 사나이 / 유니폼을 선물 받다.

2023. 03. 21, Day 4,


숙소 근처 식당에서 샌드위치로 가볍게 끼니를 때운 후 Brightline 기차역으로 향했다.


< 짭조름했다. >


40분을 걸어 도착한 Fort Lauderdale Brightline Station. 체크인까지 다섯 시간이 남아 있었기에 결승전에 관련된 정보들을 검색하며 시간을 보냈다. 미국 야구장답게 투명하지 않은 가방은 반입이 안된다는 사실(총 때문이다)을 알게 되어, 우버 시간을 조정하는 해프닝이 있긴 했지만, 직원 분이 친절하게 도와주셨고, 오래간만에 방학다운 여유를 즐겼다.


< 라운지, 정말 많이 먹었다. 야구장 가서 아무것도 안 먹었을 정도니 >


WBC를 맞아 기차 1등석(Premium)을 구매할 경우, 기차역까지, 그리고 기차역으로부터의 우버 라이드를 공짜로 이용할 수 있게 해주는 프로모션이 진행 중이었는데, 어차피 공항으로 돌아가야 하는 만큼, 웃돈을 주고 생애 처음으로 1등석을 결제했다.


왕복 76 달러, 한화 10만 원. 1시간 남짓한 거리에 쓰기에는 많이 비싼 가격표긴 했으나 우버 이용 요금만 60 달러가 나올 것을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정말 저렴하기도 했다.


프리미엄 라운지에서 맥주 네 잔, 와인 두 잔에 접시는 수도 없이 비웠으니 손해 보는 장사는 절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4시 18분 기차에 탑승했다.


< 플로리다 날씨는 늘 좋다 >


근처 호텔에 가방을 맡긴 후 우버를 잡아타고 경기장으로 향했다.


한국이 결승에 진출할 것이라는 내 망상으로 인해 결국 오게 된 마이애미.


그래도 미국과 일본의 대결이라니. 설렜다.


현존하는 최고의 야구 선수인 마이크 트라웃과 만찢남 오타니 쇼헤이의 대결을 볼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도 한몫했지만 그간 롯데 야구를 보며 뒷목을 잡아대던 내가 드디어 선진 야구를 직접 보게 되었다는 점이 아무래도 가장 크게 다가왔다. 화려한 올스타 타선을 꾸린 미국과 무패로 결승까지 올라온 탄탄한 전력의 일본이라니, 이보다 더 나을 수 없는 최상의 매치업이었다.


< 무지하게 크다 >


설렘을 안고 경기장에 입장… 층층이 쌓여 올려진 좌석들과 광활하게 펼쳐진 녹색 필드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에스컬레이터가 한 개도 아니고 두 개씩 있는 걸 보니 천조국의 위상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경기가 열린 구장은 마이애미 말린스 (Miami Marlins)가 홈구장으로 사용하는 론디포 파크 (Loan Depot Park)!


평균 관중이 리그 최저 수준에 머무르는 팀이 사용하는 구장임에도 한국 구장 중에서는 비견할 구장이 없을 정도로 방대한 크기를 자랑했다.


< 관중들 >


난간에 기대 구장을 한 번 훑어봤다. 크기는 정말 컸다.


안 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니 WBC 매장이 나왔다. TEAM USA 상품이 대다수를 차지했고 일본 관련 상품들이 조금이나마 진열되어 있었는데, 이외에 매장 내에 걸려 있는 국기라고는 베네수엘라와 도미니카 공화국이 다여서, 다시금 떨어진 한국 야구의 위상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인기에 따라 정했다기엔 멕시코와 쿠바가 없었다.)


< WBC 스토어 >


경기 시작까지 1시간이 넘게 남았음에도 야구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아무리 야구의 인기가 시들해지고 있다한들, 여전히 북미 3대 스포츠 중 하나라는 점을 입증하려는 듯 정말 많은 사람들이 경기장을 찾아왔다. 이제 노인들의 스포츠라는 지적이 무색하게, 부모님 손을 잡고 온 어린아이들이 많았고 일본 관중들 역시 대부분이 MZ 세대였다.


< 사람 진짜 많다 >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니 야구 용품 경매 매대가 있었다.


< 다양한 경매 물품들 >


수백 달러의 가격표가 붙은 친필 사인 유니폼들을 보며, 내가 사는 것과 다른 세계가 존재함을 느꼈다. 별 감흥은 없었다. (솔직히 아직은 경매라는 체계 자체가 이해하기 어렵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초과하는 돈이 오간다는 게 쉬이 와닿지 않는다.)


이후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렇게 한 10분이나 기다렸을까. 뒤쪽에서 일본어가 들려오기 시작했고, 이내 내가 앉아있던 열의 모든 좌석을 일본인들이 차지했다.


< 좌석에서 본 경기장 >


확실히 아시아인들끼리는 서로 알아보는 것일까.


와타시와 칸코쿠진데스라는 말을 꺼냄과 동시에 “We know that you’re Korean.”이라는 답변이 들려왔다.


한 손에 글러브를 끼고, 일장기와 반다나를 매고 있는 모습을 보아하니 진성 야구팬이 분명했다. 다르빗슈 유의 샌디에이고 유니폼을 입은 사람부터, 오타니 쇼헤이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 그리고 얼굴을 흰색과 빨간색으로 칠한 사람까지… 첫인상이 다들 강렬했다.


처음에는 조금 부담스러워, 좌석을 바꿀 것을 제안했다. 가장 떠들석한 둘 사이에 하필 좌석이 끼여 있던 지라, 좌석을 바꿔주면 양측에 다 좋겠다 싶어 얘기를 꺼냈고, 그렇게 좌석을 바꿔 앉았다.


상당히 외향적인 사람들이었다. Korea? Asia!라고 말하며 주먹을 부딪히도록 유도하고, 박은빈이 정말 귀엽다는 얘기를 하다가, 옆에 앉은 여자분이 솔로인데 관심 없냐는 짓궂은 질문도 던졌다.


익살스런 선수 일러스트도 준비해 왔고, 일본 1번 타자 라스 눗바의 별명인 NOOT에 맞춰 알파벳도 스케치북에 적어왔다.


한 십 분 정도 신나게 떠들었을까 (스몰 토크로 시작해 한국 야구의 몰락 원인에 대해 이야기했다. 경쟁 상대가 동정받아야 할 처지로 전락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라냈다.),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옆옆 자리에 앉아 있던 나츠가 갑자기 대뜸 입고 있던 오타니 유니폼을 벗더니, 나한테 넘겨줬다.


경기 동안 입고 일본을 열심히 응원해 보겠다는 내게 (미국, 일본 둘 중 특별한 선호는 없다. 오타니 쇼헤이를 좋아할 뿐. 아마 미국인이 옆에 앉았으면 미국을 응원하지 않았을까) 나츠는 다시 줄 필요가 없는 선물이라며 유니폼을 넘겼다.


10만 원이 넘는 유니폼을 그냥 같이 응원해 준다는 게 고마워서 준다니… 어안이 벙벙했지만, 오늘 한 번 응원에 몸을 불살라 보겠노라 다짐하며, 감사를 표한 후 유니폼을 입었다.


< 아직도 얼떨떨하다 >


이승엽, 류현진 등 일본에 어느 정도 알려진 한국 야구 선수 얘기들도 하고, 일본 라인업에 대한 설명도 들으며 얘기를 이어나가다 보니 어느새 7시였고, 경기 시작 전 행사가 진행되었다.


< 로고 및 각국 국기 >


먼저 WBC 로고가 펼쳐진 후 참여 국가들 국기가 하나둘 펼쳐졌다. 사람들로 가득 찬 관람석과 대비되는 경기장의 빈 그라운드가 국기들로 하나둘씩 메워지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이후 양국 선수들이 입장했고, 선수 소개와 더불어 미국과 일본 국기가 중앙 양옆을 장식했다.


< 이후 경기 시작 >


로고를 주위로 늘어선 국기도 인상 깊었지만, 오타니를 소개할 때의 함성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 야유를 보내거나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다른 선수들과 다르게 오타니를 소개할 때는 경기장 전체가 흔들렸다.


< 오타니 쇼헤이 소개 당시 영상 >


시구와 모든 선수 소개를 마친 후, 경기는 7시 30분 즈음 시작했다.


트라웃의 과감한 2루 슬라이딩과 함께 시작한 1회는 양 팀 모두 별다른 소득 없이 끝났다. 다만 응원은 꽤나 재밌었는데, 맨 우측에 한 명이 N, 내가 T, 그리고 중간의 모두가 O를 든 채 누우우우 웃을 힘차게 외쳤다. 결과는 맥없는 좌익수 플라이. 그래도 마냥 즐거웠다.


< 터너 홈런, 광란의 경기장 >


2회에는 양 팀 모두 점수를 내는 데 성공했다.


대회 홈런왕 트레이 터너가 솔로포를 터뜨리며 미국이 앞서갔고, 이내 뒤질세라, 4강전 역전 끝내기 안타의 주인공, 무라카미 무네타카의 홈런이 터졌다.


< 호무란! >


그리고 연이은 공격에서 눗바의 땅볼 타점으로 일본이 역전에 성공했다.


< 역전 >


이후 경기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4회에 나온 오카모토의 홈런이 이후 7회까지의 유일한 득점이었다.


< 강렬한 응원. 누가 미국인이 야구를 싫어한다 했는가 >


8회부터 일본은 일본다운 경기 운영을 하기 시작했다. 데이터상 다르빗슈가 슈와버에 약하다는 사실이 뻔히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르빗슈를 올렸고, 결과는 예상대로 홈런. 8회 1사, 카일 슈와버가 추격의 불씨를 살려냈다. 계속 파울을 쳐내며 감을 잡아가는 모습을 보니 맞을 것 같다 싶긴 했는데 진짜 맞아버릴 줄은 몰랐다.


< 슈와버 홈런 >


일본의 8회 말 공격은 심심하게 끝났고, 대망의 9회가 찾아왔다. 경기장 모든 관중의 관심은 단 하나. 야구계 유일무이 이도류인 오타니의 등판 여부였다.


불펜 문이 열리고, 오타니가 그라운드 위를 걸어 마운드로 향하자 우레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런 면에서는 뭐랄까 참 일본답다. 팬인 나로서는 좋지만.) 타자로 멀티 출루를 기록하고 팀을 위해 다시금 마운드에 오르는 오타니의 모습은 야구 만화에서 튀어나온 주인공 그 자체였다.


< 크으 >


다만 긴장이라도 한 걸까. 선두타자에게 볼넷을 내준 오타니. 그래도 실력은 어디 가지 않는 듯, 이내 영점을 잡고 2번 타자 무키 베츠를 병살로 돌려세웠다.


그리고 찾아온 마지막 승부. 모든 아구 팬이 고대해 왔던 오타니와 트라웃의 맛대결이 성사됐다. 볼, 헛스윙, 볼, 헛스윙, 그리고 또 볼. 카운트는 2-3. 풀카운트에서 오타니는 이내 힘차게 공을 뿌렸고, 슬라이더는 기가 막히게 회전해 들어갔다. 허공을 가르는 트라웃의 방망이. 포효하는 오타니, 마운드로 달려가는 선수들. 그리고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채 서로를 얼싸안던 팬들까지. 마치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했다.


나 또한 영상은 내팽개친 채 사람들 품으로 뛰어들어 승리의 즐거움을 함께 나눴다.


< 마지막 아웃카운트, 마지막 공 >


그렇게 2023 WBC는 일본의 우승으로 막을 내리게 됐다.


과거에 붙잡혀 있다고 평가받던 것이 불과 몇 년 전의 일인데, 프로야구의 인기를 위해 분골쇄신하는 각오로 리그를 개혁하고 결국 그 성과까지 이뤄낸 일본 대표팀이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고, 동시에 참 부러웠다.


한국 야구는 바뀔 수 있긴 할까…


< 다시 공항으로 >


승리의 여운에, 그리고 한국 야구의 미래에 대한 걱정을 안은 채 열차를 타고 우버를 잡아타 또 하루의 공항 노숙이 기다리고 있는 공항으로 복귀했다.


중간에 시간이 촉박해 20분 거리를 8분 만에 주파하며 고생을 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행복하기만 했던 즐거운 하루였다.







작가의 이전글 미국 유학생의 봄 방학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