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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 Apr 13. 2023

말과 성당의 도시

그라나다, 니카라과

2023. 03. 23, Day 6:


승용차, 치킨 버스, 자전거, 인력거, 말까지.


온갖 교통수단이 도로를 내달리는 도시에 대한 내 첫인상은 말이 많다는 것이었다. 짐을 끌든 사람을 태우든 다양한 목적 아라 말들이 도로를 누비고 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보낸 사진들에 말들이 불쌍하다며 한 마디 하셨지만, 여기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 그런 걸 어쩌겠는가.


식민 지배 당시 스페인 그라나다의 이름을 따와 그라나다라 이름 지어진 니카라과의 도시.


스페인 그라나다를 여행해 본 내게 니카라과의 그라나다는 어딘가 낡은, 과거에 머물지도,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한 그라나다를 떠올리게 했다.


이슬람 건축의 정수로 평가되는 알함브라 궁전 대신 이름 모를 성당들만이 대로를 따라 남아 있고, 반질반질한 유럽의 돌바닥 대신 아스팔트 바닥에, 차가 지나갈 때면 흙먼지가 흩날리는.


도시에 묻어난 스페인의 잔재는 희미했고, 굳이 유사성을 찾자면, 차라리 강렬한 원색으로 건물들이 도배된 푸에르토리코 산후안 역사지구와 비슷했다.


< 코너를 돌자 마자 눈에 띈 말 한 마리 >


호스텔에 짐을 맡긴 후 간만에 성당을 찾아 기도라도 드려야겠다는 생각으로 거리를 거닐었다.


과장 조금 보태 블럭마다 들어선 성당들이 교화라는 명목 아래 중남미 곳곳에 자행되었던 기독교 포교의 위세를 짐작케 했다.


< 숙소 옆 자비의 성당 (Chruch of Mercy) >


심지어 숙소 바로 옆에도 성당이 자리하고 있었다. 1달러를 내면 종탑에 올라가 도시 전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고 들었는데 깜빡하고 못 갔다...


<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성당 (Immaculate Conception of Mary Cathedral Church) >


거리를 따라 호수 방향으로 걸어 내려가면 외벽이 샛노란색으로 칠해진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성당(성당 이름들은 전부 자의적으로 번역한 것이라 오역 가능성이 다분하다)이 나온다.


연로하신 할아버지들이 벤치에 앉아 수다를 떨거나, 신문을 읽고 있는 공원을 뒤로, 그리고 공원부터 저 멀리 호숫가까지 이어진 대로의 중심에 성당이 위치해 있다.


잠시 안을 둘러본 후 나와 방파제를 향해 걸었다.


< 뭐라고 부르기 난감한 자전거 + 인력거 + 수레 >
< 샛노란 Type 1 비틀 >
< 그라나다 방파제 (Granada Malecon), 수질이 나쁘기에 발은 담그지 않는 게 좋다. >


그렇게 걸어 도착한 방파제.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기에 물가에서 잠시간 파도를 바라봤다.


Lago Xolotan.


마나과 호수로도 불리는 거대한 솔로탄 호수. 호수가 크면 파도가 치기도 한다는 당연한 사실이 막상 실제로 접하고 나니 신기하게 다가왔다.


저너머 희미하게 눈에 잡히는 산자락만이 여기가 땅의 끝자락이 아님을 짐작케 했다.


< 루벤 다리오 작 믿음 >


호수를 뒤로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중간에 들어선 비석에 새겨진 것은 니카라과에서 국민 시인으로 추앙받는 루벤 다리오(Ruben Dario)의 시 한 수.




LA FE 믿음



En medio del abismo de la duda

lleno de oscuridad, de sombra vana

hay una estrella que reflejos mana

sublime, si, mas silenciosa, muda.


어둠으로 충만한 의심과 덧없는 그림자가 일궈낸 심연 속에

조용하고 고요한, 숭고한 마나의 별이 있다.


Ella, con su fulgor divino, escuda,

alienta y guia a la conciencia humana,

cuando el genio del mal con furia insana

golpeala feroz, con mano ruda.


격노를 품은 악의 존재가 거친 마수를 사납게 뻗칠 때면,

그녀는 그 신성한 광휘로 인간의 양심을 수호하고 격려하며 인도한다.


¿Esa estrella broto del germen puro

de la humana creacion? ¿Bajo del cielo

a iluminar el porvenir oscuro?


그 별은 인간 창조의 순수한 배아 속에서 탄생했을까?

혹은, 어두운 미래를 비추기 위해 천국에서 내려온 것일까?


¿A servir al que llora de consuelo?

No se, mas eso que a nuestra alma inflama

ya sabeis, ya sabeis, la Fe se llama.


위로를 갈구하며 눈물 흘리는 자를 위해 내려온 것일까?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 영혼을 타오르게 하는 그것이. 그대들은 이미 알고 있다. 이미 알고 있다.

믿음이라 불린다는 걸




시가 새겨진 비석을 지나 조금 더 걸으니 또 다른 성당 하나가 나타났다. 이름이 과달루페라는데 멕시코 시티의 그것과는 이름만 동일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성당 바로 옆에 학교가 있다는 것. 성당 내부에서 밖으로 낸 쇠창살 너머로 옹기종기 모여 쉬는 시간을 즐기는 학생들이 보였다.


< 과달루페 성당 (Guadalupe Church)와 학교 >zㅗ


이후 좌측 벽에 붙어있는 단상이 특이한 성모 마리아 예배당에 방문해 기도를 드렸다. 이 예배당 옆에도 학교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지역의 일부 학교들을 성당에서 운영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학교에서 환하게 웃음 지으며 손을 흔들어대는 아이에게 나 역시 손을 흔들어 인사를 건넨 후 즐겁게 다시 길을 나섰다.


< 성모 마리아 예배당 (Chapel Maria Auxiladora) >


이 외에도 알테바 성당을 방문했다.


< 알테바 성당 (Iglesia de Xalteva) >


여러 성당을 두루 둘러보며 느낀 점은 세계 어딜 가나 성당의 모습은 비슷하다는 것.


세세하게 따지면 건축 양식부터 십자가의 배치까지 다른 게 많겠지만 짧은 내 식견으로는 별다른 차이점을 못 느꼈다.


성수대의 대략적인 위치, 좌우로 구분돼 정렬된 좌석들, 그리고 가장 커다란 문과 이어진 중앙 통로까지 다 비슷하다고나 할까.


백인 예수상을 사용하는 아시아권 및 서구권과 달리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토속 신앙과의 결합으로 인해 현지인들과 유사한 피부색을 띠는 예수상을 사용했는데, 그 정도의 차이만 포착할 수 있었다.


< 말, 말, 말 >


일찍 일어난 탓인가. 무척이나 길었던 오전을 뒤로하고 체크인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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