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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 Apr 09. 2023

이틀 연속 공항 노숙

못 사서 고생하기

 2023. 03. 22 ~ 23: Day 5 ~ 6,


젊을 때 고생은 사서 한다는 말이 있다.


틀린 말이다. 그것도 완전히.


젊을 때 고생은, 23년 밖에 (만으로 치면 21년 하고 조금) 안 살긴 했지만, 적어도 내가 겪기론, 못 사서 하는 거다.


나라고 공항에서 자고 싶을까.


국제공항이면 으레 인근에 하나쯤은 있기 마련인 호텔들.


4성급 호텔 홀리데이 인의 꺼질 듯이 푹신한 침대에서 밤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만 지금 쓰는 돈이 나중에 쓰지 못할 돈이라 생각하면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 공항에서 잠을 청할 수밖에 없다. 1박에 150달러는 배낭여행자에게는 너무도 큰돈이기에... 언젠지 모를 다음을 기약할 뿐.


굳이 사족을 덧붙이자면, 여행이라는 이름의 외유는 적어도 미국 땅을 다시 밟았을 때, 기숙사 생활을 하며 잠시 잊고 지냈던 살인적인 집값을 상기시켜 준다. 비싼 집값에, 지친 몸을 뉘일 호스텔 이층 침대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고, 박에 10만 원부터 시작하는 에어비앤비와 20만 원부터 시작하는 호텔들만이 수없이 늘어서, 배낭여행자의 마음을 심란케 한다. 공항에서 숙소까지의 왕복 비용을 생각하면 꿈도 꿀 수 없는 선택지다.


공항에서 기다릴 것 없이 바로 출발하는 비행 편을 예약하면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이긴 하지만, 비행 스케줄이란 건 한낱 배낭여행자가 바꿀 수 없는 문제고, 결국 저렴한 항공편에 탑승하기 위해 젊은 날의 시간과 체력으로 돈을 대체해야 한다는 현실과 마주하기 마련이다.


그런 나 자신이 대견하기도 하지만, 서럽기도 하다. 기내 수하물 비용을 물지 않으려 가방 하나만을 맨 채, 공항 소파에 기대 하루를 흘려보내는 내 모습은 어딘가 비련한 구석이 있다.


< 아침 >


우버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끊은 기차에서 제공되는 간식은 다음 날 아침 허기를 달래줄 고마운 식량이 된다.




콜롬비아 출신 우버 기사님과 중남미 관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이미 노숙 경험이 있는 포트로더데일 공항에 도착했다.


살인율 1위 국가 엘살바로드 여행은 안전한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비트코인을 법정화폐로 도입하겠다는 부켈레 대통령이 갱단 소탕 작전을 벌임에 따라 수도인 산살바도르는 일부 구역을 제외하고는 매우 안전해졌고, 자신 역시 작년에 별문제 없이 여행을 다녀왔다는 게 대화의 요지였다. 과거에는 갱단에 소속되기 위한 통과 의례가 사람 한 명 살인하기였는데, 이 문제가 많이 개선되었다고...


편견일 수도 있겠지만, 중남미 국가 출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안전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접하게 된다. 콜롬비아 보고타에서는 수도 중심, 키토에서는 마리아 동상 근처 엘 파네 시오, 브라질 파벨라, 과테말라 과테말라 시티, 자메이카 킹스턴을 제외한 지역은 치안이 괜찮다는 식이다. 물론 여기서 괜찮다는 정도도 밤에 돌아다니면 위험한 건 매한가지라는 뜻은 당연히 내포하고 있다.

총이라고는 군대와 공항에서 밖에 못 봤고, 취객을 안전 귀가시켜주는 국가에서 산 나로서는, 도무지 공감할 수 없는 안전의 기준이지만, 어디까지나 그들 기준에서는 안전하다고 하니...


실제로 위험하다고 해서 사람들이 나쁘다는 느낌은 못 받았다. 어디까지나 확률의 문제, 그 확률이 너무 높다는 게 문제일 뿐인 것이다.


아무튼, 콜롬비아를 여행하게 되면 메데진과 카르타헤나를 꼭 방문해 보라는 조언을 듣고, 차에서 내렸다.




새벽 1시임에도 공항은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였다. 씻긴 씻어야 하는데 사람들이 계속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리기에, 전기 콘센트가 위치한 의자에 앉아 글을 쓰고 책을 잠시간 읽었다.


2시 30분 정도 됐을까. 더 이상 내가 위치한 터미널로 오는 여행객들이 없었고, 잽싸게 화장실에 들어가 머리를 감았다.

< 그럭저럭 잘 감겼다. >


2개월 전에 왔을 때는 분명 팔걸이가 없는 의자들이 창가 한쪽에 일렬로 배치돼 있었는데, 눕기 편한 의자들은 온 데 간 데 없고 온통 팔걸이의자들 뿐이었다. (앉아서 자면 배로 피곤하다.)


그렇다고 강렬한 형광등 빛이 수면의 질을 떨어뜨릴 게 뻔한, 한기가 몸에 스며드는 바닥에서 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불을 챙겨 온 사람들은 그냥 바닥에서 자는 모양이었으나 배낭 하나만 메고 온 나로서는 아무래도 썩 내키지 않는 선택지였다.


하는 수 없이 몇 안 되는 팔걸이 없는 의자들을 찾아 나섰다. 반대편 창가에는 그래도 팔걸이 없는 의자 몇 개가 놓여 있었다. 다만, 이미 임자가 다 정해진 의자들.


결국 한참을 고민하다 에스컬레이터 옆의 카펫 바닥에 누웠다. 소음 때문에 선택받지 못한 자리인 듯했는데, 산업용 귀마개로 귀를 막고, 재킷에서 모자를 꺼내 눈을 가린 후, 휴대폰 줄과 가방을 자물쇠로 걸어 잠근 채 다리에 가방을 베고 잤다.


일어나니 8시.


수면의 질이 확실히 떨어졌다.


사람들이 떠난 창문가의 팔걸이 없는 의자에 몸을 뉘이고 다시 잠을 청했다. 비몽사몽, 잤다 깨기를 반복하며 얕은 잠을 잤다.


< 점심, 그리고 저녁 >


이후 일어나 점심을 먹었다.


말라리아 약을 복용해야 하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지불한 20달러. 비싼 가격에 맛도 없었다. 구글 지도에 나온 평점이 3점 초반인가 2점 후반이었는데, 주인장이 잘하는 일이라고는 손님들과 수다 떠는 일뿐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평점이었다.


골고루 익지 못한 패티에 흐물거리는 양파와, 싱거운 베이컨, 그리고 딱딱한 빵... 무엇보다도 맛이 그냥 없었다. 어쩜 그렇게 모든 맛을 다 빨아들이는지. 케첩을 몇 바퀴 둘러야 희미한 케첩 맛이 났으니, 마음 같아서는 주방에 직접 들어가 소금이든 뭐든 조금이라도 치고 싶었다.


저녁은 유사 판다 익스프레스(미국 중화요리 패스트푸드 체인점)에서 사 먹었다.


역시 이쪽도 맛은 별로. 인천국제공항의 순두부찌개가 그리워지는 더부룩한 기름 덩어리였다.


< 기다림의 시간, 간만의 정시 출발, 준비 완료 >


다시 찾아온 독서와 글쓰기의 시간을 보내고, 입국 준비를 마쳤다.


온갖 정보가 난무하는 인터넷과 다르게, 항공사 카운터를 찾아가 물어본 결과 확인한 니카라과 입국 서류는 코로나19 백신 접종증명서와 여권이 다였다. 혹여나 문제가 생길까 노심초사하며 육로 입국 서류 작성에 보낸 2시간과 전전긍긍해 왔던 시간들이 무색하게도 간단한 입국 요건이었다.


백신 접종자임을 의미하는 초록색 스티커가 붙은 티켓을 제시한 후 자정을 앞두고 비행기에 탑승했다. 연착이 일상인 스피릿 항공으로서는 가히 이례적인 정시 출발이었다.


< 미국, 쿠바, 니카라과 >


비행기는 플로리다를 지나, 쿠바를 거쳐, 마나과에 도착했다.


< 입국 사전 작성 서류 >


옆자리에 앉아계신 노부부께 서툰 스페인어로 작성해야 하는 내용들을 설명해 주느라 진땀을 빼기는 했지만, 무난한 비행이었다.


< 어후... >


비행기에서 내리니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사복을 입은 공항 직원 여럿이 승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코로나19 서류를 검사하는 모양이었는데, 이미 미국에서 완료된 절차를 재차 밟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환전을 마치고 투어리스트 카드 발급 비용 10달러를 지불한 후 입국 심사장을 통과했다. 추가적인 짐 검사 절차도 있었지만, 이미 미국에서 한 번 하기도 했고, 새벽이라 직원들도 피곤한 건지, 스크린은 안 보고 서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유심은 공항에서 중남미 쪽 대표 통신사인 Claro 카운터를 찾아가 가장 저렴한 심 카드를 20달러에 구매했다. 30일 동안 12GB로, 5일 남짓한 기간 동안 머무를 내게는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양의 데이터였다.


< 마나과 공항, 우측 사진 동상들 뒤편으로 들어가면 식당가가 나온다.  >


다행히도 팔걸이가 없는 3인용 의자가 여럿 눈에 띄었고, 그중 하나에서 가방을 베개 삼아 새우잠을 잤다.


< 각종 안내 책자들. 대표 버스 터미널, 공항 전경 >


7시쯤 일어나 공항 인포에서 필요한 정보들을 찾고, 택시를 잡아탄 후 그라나다로 향했다.


공항 노숙의 여파로, 존재 여부도 잊고 지냈던 관절들이 질러대는 비명을 외면할 수는 없었으니 불가피한 지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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