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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 Apr 05. 2023

원치 않았던 빗물 샤워

열대 폭우 속 바하마 출국

2023. 03. 20, Day 3:


하늘이 흐리면, 특히 여행지에서, 불안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비행기가 못 뜨거나 기차 출발이 지연되거나 한 일은 아직까지 운 좋게도 없었지만, 비 맞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하고, 화창한 날이면 연신 파아란 하늘을 향해 셔터를 눌러대는 내게 비는 그 가능성만으로도 우울한 아침을 맞이할 이유가 되곤 한다. 


어제는 그래도 화창해서 다행이었다고 긍정적으로 합리화하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비를... 젖을 대로 젖어 큼큼한 냄새를 풍길 가방과 물티슈 한 면을 빽빽하게 채울 진창의 진흙을 생각하면 몸이 절로 부르르 진저리를 쳐댄다. 




좋아하는 것만큼 싫어하는 것도 속속들이 알게 되는 법일까. 맑은 하늘도 구른 한 점 없이 맑거나, 그저 맑거나, 미세먼지로 인해 유사 맑음을 표방하는 하늘이 있듯, 내게 있어 비 내리는 흐린 하늘 역시 그저 흐린 하늘만은 아니다. 


우선은 색. 짙을수록. 우중충할수록 지독한 비를 예상해 볼 수 있다. 최악은 짙은 배경을 뒤로하고 거의 검다 싶은 구름들이 떠있는 경우인데, 경험상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풍우를 의미하므로 되도록이면 집 밖으로 나갈 생각은 하지도 않는 게 좋다.


색 외에 고려해야 할 게 있다면, 단연 바람이다. 아예 사선으로 내리거나 직선으로 내리면 우산으로 방어가 가능하지만, 변화무쌍할 경우, 엑스칼리버마냥 우산을 휘둘러대기보다는 체념한 채 운명에 순응하는 것이 마음 편하기 마련이다. 


색과 바람에 치중하다 보면 흐린 하늘을 판단함에 있어 간과되기 십상인 요소 하나: 기온이 남는다. 기온은 극단을 달릴 때 문제가 되곤 하는데, 너무 낮을 경우, 오들오들 떨며 다음날 일어나 코가 맹맹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며, 너무 높을 경우, 들러붙은 땀과 옷 위를 적신 비로 불쾌하기 그지없는 샤워를 하게 된다. 굳이 따지자면, 기온이 높아도 감기에 걸릴 가능성은 존재하기에 차라리 추운 게 낫지 않나 생각한다.  


몸에 끈적이며 들러붙는 땀은 질색이다.

 



돈 많이 벌고 다시 와야겠다는 생각만을 안겨주었던 짧은 바하마 여행을 뒤로하고 공항으로 떠나는 날 아침, 일어나 하늘을 본 나는 낮게 욕을 뇌까렸다. 


"이거 조졌네." 


비 자체는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지만, 저 멀리 바다 너머 짙은 하늘 위로 검디 검은 구름이 깔려 있었다. 호스텔 창문을 열어젖히니, 습식 사우나에 들어가기라도 한 것 마냥 후끈한 열기가 나를 덮쳐왔다. 


검은 구름을 실은 맞바람이었다. 아침 바다의 풍랑은 거칠었고, 이에 서둘러 샤워를 마친 후 호스텔을 나왔다. 


공항까지 걸어서 30분. 


첫 5분 정도는 괜찮았다. 우산으로 방어할 수 있는 수준의 비가 추적추적 내렸고, 내가 할 일이라고는 우산을 곧추세운 후 물웅덩이와 가끔 돌진해 오는 차를 피해 갓길을 걷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 법. 이내 하늘이 울리기 시작하더니 비가 쏟아져 내렸다.


전후좌우 종횡무진 공기를 가르는 바람과 뒤따르는 빗방울의 세찬 공격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갓 샤워를 마친 채 호스텔에서 나왔던 멀끔한 청년은 어디 가고 물에 젖은 생쥐 한 마리가 질척이는 신발을 질질 끌며 세월아 네월아 공항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우산을 뒤집을 듯 불어오는 바람에 결국 체념한 채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한 20분만 더 늦게 내렸으면 하는 마음이었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20분 일찍 못 일어난 내 잘못이었기에, 빗물이 눈에 들어가지 않도록 우산로 얼굴을 거의 가리다시피 한 채 한 걸음 한 걸음 더디게 앞으로 나아갔다. 


얄밉게도 빠르게 나를 스쳐 지나가는 차들. 


< 난 비가 싫다. >


한 10분이나 걸었나, 뒤에서 차 경적이 시끄럽게 울려댔고, 창문이 조금 열리더니, 안에서 아저씨 한 분이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쿨하게 내뱉는 한 마디. "Get inside. (들어와라)."


열대 폭우를 헤쳐 나가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아저씨께서는 차에 탈 것을 권유했고, 그렇게 나를 공항까지 데려다주셨다. 


5월부터 10월까지 주로 몰아치는 비가 3월 말에 쏟아지고 있기에 넌 unlucky 하지만, 어제까지 화창한 날씨를 즐겼으니 lucky 하기도 하다는 아저씨의 말씀에 난 그저 웃으며 감사하다는 말을 연신 전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도 멀어 보였던 공항은 허무하리만치 가까웠고, 그렇게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한 후 공항에 내렸다.


화장실에 가 대강의 응급처치를 마친 후, 공항 의자에 앉아 책을 읽으며 시간을 때웠다.


< 정말 감사했다. >


까다롭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미국 포트로더데일 공항의 입국 심사와 달리, 바하마에서 진행되는 사전입국심사는 간단했다. 어디서 공부하냐, 어려운 거 공부한다. 여권 달라. 끝. 


피자 두 조각으로 점심을 때운 후 비행기를 기다렸다. 


< 가장 싼 치즈 피자. 조각에 5달러였나 >


귀국편은 연착이 일상인 스피릿 항공도, 취소가 일상인 프론티어 항공도 아닌 저가 항공사 중 가장 뛰어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유명한 젯블루 항공으로 끊었기에 기대가 상당했다.


< 아무리 서비스가 우수해도, 공항의 부족한 의자를 늘리는 마법을 부릴 수는 없다. >


연착되었던 몇몇 앞선 항공기들과 다르게 내가 탄 비행기는 정시에 하늘에 떴다. 널찍하고 편안한 좌석. 무료로 제공되는 간단한 간식과 음료. 그리고 기내 무료 와이파이까지 (확실한 차별화 포인트다. 유튜브 영상을 시청하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 속도도 빨랐다.). 여타 저가항공과는 차원이 다른 질의 서비스가 제공됐기에 매우 만족스러운 비행이었다.


< 결국 다시 이용하게 됐다. >


이미 사전입국심사를 마쳤기에, 바로 공항 밖으로 나와 우버를 잡아타 미리 예약해 둔 (사전입국심사에 대해 모르고 있었기에 입국 심사를 대비해 숙소를 예약했었다. 기존 계획은 공항 3박...) 에어비앤비로 향했다.


< 짜릿한 경기 >


다음 날 열릴 WBC 결승전을 준비하는 마음가짐으로 멕시코 국가대표팀과 일본 국가대표팀의 준결승전 경기를 시청하고 (일본이 짜릿한 승리를 거뒀다.) 샤워를 하며 비의 흔적을 씻어냈다.


< 버거킹도 맛없을 수 있다. >


프랜차이즈 햄버거가 맛이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맛 없다라는 단어와 와퍼가 같이 쓰일 줄이야...)을 새롭게 알려준 버거킹 와퍼 두 개로 저녁을 해결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고대해왔던 WBC 결승전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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