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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 Mar 27. 2023

멍청 비용

시간을 돈으로 사야할 이유

23. 03. 18: Day 1,


중간고사 후 미뤄놨던 여행 준비를 하느라 1시가 돼서야 잠에 들었고, 오전 8시 30분 바하마행 비행기를 잡아타기 위해 일어나니 4시 30분이었다.


머지않아, 하루 내내, 수면 부족과 그에 뒤따르는 판단력 상실의 대가를 혹독히 치를 나는 빈 속에 라면 두 개를 집어던진 채 헛구역질을 참으며 리프트(Lyft)에 올라탔다.




공항에 가는 것부터가 말썽이었다.


미국 대형 공항들이 국내선과 국제선을 구분해 터미널을 운영하지만, 저비용 항공사의 경우, 국내/국제 구분을 두지 않은 채 카운터를 공동 운영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게 문제였다. (국제선 터미널에 가면 델타(Delta), 라탐(Latam), KLM, 대한항공, AIRFRANCE 등 메이저 항공사들의 카운터가 있다.)


비몽사몽, 잠이 덜 깬 상황 속에서, 그래도 어떻게 목적지를 프런티어(Frontier) 항공사의 카운터가 위치한 터미널로 정확히 설정했다.


그러나,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국제선이라는 단어 하나가 내 정신을 사로잡고 놔주질 않았다.


국제선 터미널로 가야 한다는 강박에 비용을 추가 지불하고 터미널에 도착했다. 프런티어 항공의 카운터가 있을 리 만무했다.


미리 체크인을 해놓았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우버를 다시 잡아타고 국내선 터미널로 돌아가야 할 뻔했다.




저가 항공사답게 출발 게이트가 바뀌어 있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안 그래도 피곤한 몸에 부하를 무식하게 걸어댔다.


겨우 게이트에 도착하니, 삭신이 쑤셔왔고, 머리가 띵하니 당겼다. 도무지 정상이라고는 할 수 없는 몸 상태였다.


게이트 앞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으니 들려오는 수하물 관련 방송… 수하물 추가로 인한 비용을 지불하고 싶지 않아  달랑 배낭 하나만을 챙긴 내게, 항공사 직원은 옆에 달려 있는 물건이 있을 경우 추가 비용을 납부해야 한다는 사실을 주지 시켰다.


가뜩이나 꽉 찬 가방에, 상황을 타개할 별다른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던 나는 충동적으로 슬리퍼를 재킷 속 티셔츠 안에 집어넣었다. 그렇게 게이트를 통과했다. 막상 비행기에 타 확인한 사실은 슬리퍼를 넣을 공간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 옆에 매단 군용 슬리퍼. 이건 정말 수출해야 한다. >


비행기에 탄 후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옆자리 아주머니가 내 재킷에 우유를 쏟았고, 비행 내내 소리를 질러대는 아이 덕분에 잠은 한 숨도 못 잤다.


어찌저찌 공항에 도착한 후, 숙소 확인 등으로 인해 길었던 입국 절차를 (그냥 여행하는 것보다 유학생으로 여행하는 게 절차가 훨씬 복잡하다.) 마친 후 터미널 밖으로 나왔다.


< 투명한 바다 >


숙소까지는 걸어서 40분. 택시를 잡아타기에는 돈이 아까웠기에 땡볕 속에 걸었다.


< 뷰 원툴 >


체크인이 오후 4시였기에 짐을 맡겨놓을 요량으로 도착한 숙소. 부킹에서 가장 저렴한 숙소를 예매했기에 가격은 바하마치곤 합리적이었다.


그게 끝이었다. 평점 6.7의 숙소에는 직원도 프런트도 없었다. 전화도, 문자도 받지 않았다.


30분 정도 기다렸을까. 이내 위층에서 투숙객 한 명이 내려와, 여기서 4일 간 마무르고 있지만 호스트는 보지도 못했다며, 그냥 짐을 던져놓고 갈 곳이 있으면 갈 것을 추천했다.


6.7점의 낮은 평점이 이해가 가는 숙소였다.


숙소를 걸어 나와 클리프턴 국립공원(Clifton National Park)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닷속 동상으로 유명한 스노클링 포인트가 위치한 국립공원으로 숙소에서 도보로 2시간 30분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택시비를 내고 싶지 않았기에 걷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 걷고, 걷고, 또 걷고 >


걸어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인도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아스팔트 길을 걷고 또 걸었다. 30분 정도 걸었을까. 목이 말라 수영복 가방에서 물통을 꺼내려했다. 여러 번 손을 쑤셔 넣어봐도 나오지 않는 물통. 결국 길가에 주저앉아 가방을 털털 털어낸 내가 발견한 사실이라곤 물통을 숙소에 놔두고 왔다는 것뿐이었다…


참을 수 없는 갈증에 시달리며, 걸음을 내디뎠다. 예상 도착시각은 2시 45분. 그리고 스노클링을 즐기기 위해 국립공원에 도착해야 하는 시각은 2시 15분…


2시간 30분이 걸리는 거리를 2시간, 즉 20%가량 빠르게 주파해야 하는 처지가 어려움을 더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랫사람은 당연히 안중에도 없이 쌩쌩 달리는 차들을 조심하며 걷고 뛰기를 반복하다 보니 목이 타들어 갔다. 갈라지는 입술과 바싹 말라가는 입천장…


물이 너무 고팠다.


< 다 전기 펜스란다…>


중간에 길을 잘못 들어 (오프라인 지도가 프라이빗 리조트 쪽으로 나를 이끌었다.) 리조트 관리인에게 도움을 받기도 하고 도보로 20분이 넘는 거리를 따라 이어진 롤렉스 회장 별장 옆 펜스를 지나치며, 2시경 클리프턴 국립공원이라고 표시된 지점 근처에 이르렀다.


주차장도 하나 보이고 하는 것이 조금만 더 가면 국립공원이 지척이지 싶었다.


거의 반 정도를 뛰다시피 했기에 발바닥이 화끈거렸고, 다른 것보다 시원한 물 한 잔이 간절했다.


< 지도가 이상하긴 했다, 중간에 삐져나온 길이 막혀 있다. >


그러나 막상 지도에 표시된 지점에 도착하니 반질반질한 알루미늄 펜스로 출입구가 막혀 있었다.


유심을 구매하지 않았기에 인터넷도 되지 않는 상황…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방향을 정한 채 무작정 뛰는 것뿐이었다. 주차장을 이미 지나쳤기에 그 근처에 내가 놓친 게 있을 것이라는 가정이 합리적이었고 (아니었다. 차 한 대도 없는 주차장이었음을 난 고려했어야 했다.) 왔던 길을 다시 뛰어 돌아갔다.


아스팔트만 깔린 휑한 주차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또다시 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지도가 완전히 글러먹은 것이 아닌 이상, 분명 해안가 어딘가에 국립공원은 붙어있을 터였고, 단지 그 위치가 지도에서 표시된 것보다,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라 믿었다.


시계는 이미 2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던 그때, 앞쪽에서 차 경적이 들려왔다.


< 정말 감사했다. >


이어 창문이 열리더니, 인상 푸근하게 생긴 아저씨 한 분이 차에 탈 것을 권했다. 이미 지나치며 한 번 보기는 했지만 저 주차장과 실제 국립공원의 거리가 조금 있어, 차로 태워주기 위해 다시 돌아왔다는 그 제안이 그리 고마울 수 없었다.


냉큼 차에 타 우여곡절 끝에 국립공원에 도착했다.


도착해서 제일 먼저 확인한 것은 음료수의 유무! 다행히 오렌지 주스 등을 판매하고 있었고, 갈증을 달래기 위해 오렌지 주스 두 캔을 구매한 후 그 자리에서 벌컥벌컥 한 캔을 지웠다.


스노클링 투어는 기상 여건으로 인해 취소된 상황이었고, 2만 원 상당의 입장료를 지불한 후 내부를 관람했다.


< 바나나 홀 >


처음으로 마주한 스폿은 바나나 홀이라고 명명된 직경 10m 정도의 구멍이었는데, 구멍이었다.


< 플랜테이션 당시 집 >


이후 조금 걸어 들어가니 플랜테이션 농업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주거 구역이 나왔다. 다만, 여기도 그다지 볼 만한 것들은 없었다.


< 아름답운 바다 >


결국 바닷가 벤치에 기대 후식을 취했다. 기억에 남는 것이라고는 물을 반드시 챙겨야 한다는 점, 오렌지 주스에서 신 맛이 전혀 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 그리고 바하마에서도 플랜테이션 농업이 진행됐다는 것 정도였을까…


다만 돈으로 시간을 사야 하는 이유 하나만큼은 정말 절실히 깨달았다.


현지인들과 하릴없는 대화를 나눈 후, 때마침 내가 묵는 호스텔 바로 옆의 숙소를 잡은 다른 여행객 가족과 함께 택시를 타고 숙소로 복귀했다. 인심 좋은 운전자 아저씨께 택시 비를 6달러 정도 할인받았다는 게 유일한 위안거리…


그렇게 걷고, 뛰고, 또 걷고 또 뛰며, 젊음이 돈으로 살 수 있는 시간을 낭비할 구실이 되지 못한다는 교훈을 배웠다.


숙소에 도착해 침대에 쓰러지듯 파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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