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책 없는 인생

알을 깨고 나온 새는 이내 새장으로 끌려들어 간다.

by 노마드

22.12.17: Day 2,


밖이 시끄러워 나가 보니 투숙객 4명이 밑도 끝도 없는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미국 독립선언문에서 시작해 아르헨티나 정세, 학예회와 짝사랑, 심리 상담까지 대화의 주제를 종잡을 수 없었고, 중간중간에 각국 노래를 틀어대면 스리슬쩍 빠져나와 리듬에 몸을 맡기기 바쁜 카오틱 한 현장이었다. 나 역시 강남스타일을 췄다. (젊으면 BTS, 조금 나이가 있으면 강남 스타일. 웬만해서는 다 안다. 자랑스러웠다.)


1시간 정도 지났을까, 아르헨티나인 디에고가 이것도 인연인데 같이 로컬 바에 가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어차피 하루 계획 전체가 어그러진 마당에 더 나빠질 것도 없겠다는 생각에 흔쾌히 고를 외쳤다. 토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클럽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서 있었고, 마찬가지로 로컬 바도 붐볐다.


<피나 콜라다를 주문한 내게 바텐더가 한 번 믿어보라며 대신 권한 칵테일>


맥주 한 캔에 1달러. 칵테일 한 잔에 5달러. 라틴 아메리카 특유의 혼란스러우면서도 강렬한 정서가 물씬 묻어나는 장소였다. 그렇게 바텐더 특선 칵테일을 한 잔 받아 들고 군중 속으로 녹아들었다. 술이 몇 잔 오가자 스몰 톡은 딥 톡으로 바뀌었고 난 그렇게 생전 상상해보지 못했던 관점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안정을 더없이 중요시해, 사 자 직업과 공무원에 매달리는 국민들이 넘쳐나는 나라에서 나고 자라, 무직, 실직이라는 불확실성을 걷어내기 위해 인생의 4년을 학문에 할애하기로 결정한 인간으로서, 단기적인 계획마저 세우지 않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푸에르토리코 밴드 씬에서 음악을 하기 위해 차 두 대와 가족을 끌고 다짜고짜 넘어왔다는 락 기타리스트의 말마따나 “어떻게든 살아지겠지.”라는 그들의 무책임한 인생관을 처음에는 전혀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신기하기도 했다. 어떠한 연유로 이 사람들은 도대체 자신이 진정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으며, 어떻게 원하는 바를 실현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게 되었는지 내 짧은 식견으로는 도무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내 이야기는 잠시 내려놓은 채 듣고 또 들었다.


술기운에 어떠한 이야기들이 오갔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이야기의 골자는 결국 자유를 좇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각종 뮤직 비디오 등에 출연하며, 댄서로 활동하고 있다던 리오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If you want it so bad, ya gotta have it.”


버닝맨 페스티벌에 갈 수 있든 없든 그 자체는 별로 중요치 않다는 듯이 “See you there.”라며 손을 맞잡던 녀석들,


그리고 학업 때문에 어디 가는 것을 주저하게 된다는 내 투정에 모든 것을 다 끝낸 후 시간이 날 것이라는 기대는 허상이라며, “You think you’ll be good to go, if you finish all your shits?”라며 따끔하게 조언해 줬던 디에고까지.



계획한 바에 따라, 정해진 궤도에 맞춰 사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라는 점을,


아니 사실 정답 따위는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


처음으로 체감했다.



물론 주머니 사정이 곤궁한 사람들이 뇌까리는 이상이라며 그들의 인생을 폄하할 수도 있을 터이나 자신들 앞에 산적한 불확실성에도 열정을 불태우며, 곤경을 헤쳐나가겠다는 자유 의지가 내게는 너무나도 찬란하고 새로웠다.


<브이랑 엄지 척은 만국공통어다. 디에고, 헬렌, 요시, 산체스>


지금 당장 직업이 없더라도 자신에 대해 우선 아는 것이 진정으로 책임 있는 태도가 아닐까 하며 웃던 누나의 말도, 어색하게 잔을 부딪히며 어딘가 생각이 많아 보이던 요시의 태도도 (뉴욕에서 매일 일에 찌들어 산다며 한숨을 쉬던데, 어쩐지 내 미래가 겹쳐 보여 잠시간 우울했다) 다 뇌리에 남아,


자유라는 두 글자를 확실하게 내 심장에 박아 넣었다.


조금 더 자신과 가까워지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며, 미래의 안정이 확보되어 있어야 한다는 가치관이 대책 없는 인생을 살 필요는 없지만, 그럼에도 자유로운 인생을 한 번 살아 봐야겠다는 방향으로 새롭게 바뀌었다.


더불어 여행은 사람이 하는 것이라는 점을 어렴풋이 깨달은 밤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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