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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 Oct 19. 2023

몰아沒我의 황혼

오메테페 섬, 니카라과

때 묻지 않은 시골 호수에서 바라본 노을은 아름다웠고, 천천히 노를 저으며 뭍으로 배를 모는 아버지와 잔잔히 흔들리는 배에 앉아 그물을 손질하는 아이 둘의 모습은 평화로웠다. 




페루와 볼리비아에 걸친 티티카카 호수 다음으로 중남미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니카라과 호. 한때는 민물 상어가 살았다고 하나 이제는 남획과 오폐수 방류로 현재는 멸종 위기에 이르렀다 하고, 배에서 그리고 뭍에서 바라보면 그리 큰가 싶지만은, 상어가 삶직한 호수라는 사실에서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여하튼 코치볼카(Cocibolca) 호수라고도 불리는 이 호수의 중간에는 오메테페 섬(Ometepe)이라 불리는 거대한 섬이 하나 자리한다. 


아직 섬과 뭍을 잇는 다리가 없어 하루 몇 번 오가는 페리만이 유일한 교통수단인 오메테페 섬. 나 역시 섬에 들어가기 위해 산 호르헤(San Jorge) 항에서 페리를 잡아탔다. 그리 멀어 보이지는 않는 거리지만 느리게 움직이는 페리 탓에 장장 한 시간을 배 위에서 보내고 나서야 섬의 모요갈파(Moyogalpa) 항에 도착했다. 


너비 10킬로미터, 길이 30킬로미터의 섬을 방문하는 여행객들은 보통 택시를 잡거나 ATV, 오토바이, 자전거를  대여하는데, 아직 면허가 없는 데다 자전거 대여점은 사소한 스크레치에도 비용을 청구한다는 후기가 많아 걸어 다니기로 결정했다.  


< 정겨운 시골 풍경 >


하선하자마자 보이는 대로를 따라 올라가면 읍내가 나오나 박에 1만 원이었던 내가 예약한 숙소는 왼쪽으로 꺾어 작은 시골집들을 지나 20분 거리에 위치해 있었고, 그렇게 털레털레 걸어 오두막에 도착했다.



밤이면 집 앞을 밝히는 등불을 제외하곤 어둠에 잠기는 정겨운 시골 촌동네.



달과 병아리들이 뛰어놀고, 간간이 돼지도 보이며, 영문 모를 백마도 한 마리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집 지키는 개들이 많았다. 


하필이면 맹견 두 마리가 지나가야 하는 길목을 막고 있었기에 Ayuda를 외치고 주인이 나오기를 몇 분이고 가만 서서 기다렸던 웃픈 일도 있었다.



이젠 찾아보기 힘든 정겨운 시골의 모습도 꽤나 인상적이었지만, 그럼에도 이제 와서, 니카라과를, 오메테페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찾아드는 이미지는 황홀한 저녁노을이다. 




읍내로 나가 저녁을 해결하고, 야구와 축구를 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다, 노을 져오는 하늘에 항구로 발걸음을 옮기자



휘영청 걸린 달 아래로 자줏빛 하늘이 수 놓였고, 그 아래 주홍구름을 뒤로 하루가 천천히 저물었다. 


털털거리는 배 모터음 사이로 간간이 들려오는 파도의 찰박임과, 달과 하늘, 하늘과 호수, 그리고 호수와 잘게 부서진 검은 모래의 해변이 빚어내는 황홀경 속에 잠시 방파제에 앉아 호수의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저 멀리 돌아오는 고기잡이 배 하나. 


잠시 노를 젓다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듯, 아이들을  마주 본 채 그물을 천천히 손질하는 아버지와 고개 숙인 채 그물 손질에 몰두하는 아이들. 배가 안 가는 게 못내 신경 쓰이는지 아니면 그물 손질이 지루했던 것인지 다시 노를 집어 들어 배를 모는 큰아들과 여전히 그물손질에 여념이 없는 작은 아들. 


뭍을 훑고 돌아가는 물결, 하루가 떨어져 가는 오메테페 섬에서의 황혼,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그저 흘러가며 화폭에 고아히도 녹아난 어부의 삶은 일상적으로 평범하면서도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고,


< 뭍으로 돌아오는 삼부자 >


이내 나는 말을, 그리고 다시 나를 잊었다.


그렇게 배가 뭍에, 그리고 놀이 땅에 닿기까지 가만히 앉아 내 모든 상념이 흩어져 흘러가는 모습을 가만 바라보았다.


허연 페인트 통에 담긴 물고기는 손으로 셀 수 있을 만큼 적었고, 다가온 배는 아이들이 자라남에 따라 셋이 아닌 둘의 배로 변할 것이 뻔해 보였으나, 이런들 저런들 어떠하겠냐는 듯, 배에서 내리고선 즐겁게 떠들며 뭍 뒤의 숲으로 사라지던 삼부자.


그 평화로운 모습을 관조하며 난 오래전 깨달았으나 결코 체화하는 일이 없던 명제 하나 - 더 커다란 행복이라는 허상을 좇아 헤매기보다는 자족할 수 있어야 한다는 - 를 되새겼다. 



해가 완전히 지는 모습을 바라본 후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다시 이제는 별이 하늘을 수놓았다.


선인장 아래 서 부산에 있는 친구 녀석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의 황혼을, 몰아의 경험을 말로 풀어내려 했지만, 내가 구사하는 언어의 한계는 얄팍하고도 얇아 그저 '아름다웠다.'라는 진부한 표현 하나로 그날의 저녁과 노을을 갈음했다. 




그럼에도 난 몰아의 저녁놀을 본 후로 반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가끔 여행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기억을 묻는 친구의 말에, 아니면 그저 지고 마는 메쓰의 노을을 바라보며 여전히 니카라과의 오메테페 섬에서 봤던 그 노을을 떠올리고 살포시 웃음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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