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이 둘, 폭포로

코스타리카, Los Chorros Park

by 노마드

2023. 1. 2: Day 18,


숙소 근처에 할 일이 없나 찾아보던 중, 장대한 폭포가 있는 계곡을 발견했고, 호스텔에서 만난 레나와 의기투합해 계곡으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우울했던 새해 첫 날의 기억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라도 외출은 필수였다.


< 버스로는 중간 지점까지 30분 걸렸다. >


차로는 23분 거리였지만, 우버 요금이 결코 싸지는 않았기에 일단 차량 이동은 제외.


남은 선택지는 대중교통을 알아보거나 걷는 것이었는데, 평소 걷는 걸 좋아하는 나와 달리, 틈만 나면 담배를 찾는 레나는 걷는 덴 젬병이었고, 나 역시 30도에 육박하는 더위 아래 왕복 6시간을 걷고픈 마음은 없었기에 걷는 것 역시 자연스레 제외됐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안도 정보 부족이라는 나름의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버스 시간표 등을 인터넷에서 쉽게 확인해 볼 수 있는 여타 유명 여행지와 달리, 알라후엘라는 여행자들이 공항에서 가깝고 숙박비가 수도 대비 저렴하다는 이유로 하루 머무는 지역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기에, 참조할 수 있는 정보가 전무했다.


결국 루이스의 의견에 따라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루이스는 근처 버스터미널에 가서 중간 지점에서 내린 후 1시간 30분 정도 걷는 것을 추천했고, 그렇게 우린 파스타로 간단히 아침을 때운 후 길을 나섰다.


< 버스. 이때까지만 해도 설렜다. >


버스 정류장에서 30분 정도를 걸어 산의 초입에 도착하니 산면에 거대한 팻말이 걸려 있었다.


노란색과 빨간색이 가득한 게 좋은 내용은 아닌 듯했고, 빗나가지 않는 불길한 예감. 큼지막히 붉은 글씨로 적혀 있는 CERRADO (닫힘).


보아하니 계곡 시설의 유지/보수를 위해 (유지/보수할 게 있나?) 무기한으로 계곡 영업을 중지한다는 내용이었다.


대다수의 정보가 늦어도 일주일 내로는 고시되는 한국, 미국, 유럽 등과 달리 중남미의 행정 체계가 그리 빠릿빠릿하지 않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우선은 가벼운 등산을 (가볍지 않았다) 하는 느낌으로 일단은 갈 때까지 가보자고 마음을 모았다.


< 뜬금없다… >


1시간을 더 걸었다.


길은 놀라우리만치 평범했고, 누군가의 별장으로 추정되는 야자나무 거리 옆을 잠시 스쳐 지났을 뿐, 그 어떠한 풍경도 없었다.


< 찻길 >


반면, 산의 경사는 살벌했고, 차들이 질주해 내려오는 도로는 위험했다. 인도가 없었기에 뾰족한 수가 없기도 했으나 차를 피해 멈춰 서거나 반대편 차선으로 이동하느라 시간이 예상보다 많이 소요됐다. 더불어, 레나가 체력적으로 힘들어해 중간중간 쉴 수밖에 없었다.


< 산 >


터덜터덜 움직이지 않는 발을 끌고 결국 도착한 계곡 입구.


기부금을 낼 수 있을 뿐, 따로 운영비는 받지 않았고, 작은 오두막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이내 오두막에서 개 두 마리가 뛰쳐나와 물기라도 할 것처럼 사납게 짖어댔고, 이후 아저씨 한 분이 뛰쳐나오셔서 길을 안내해 주셨다.


< 밀림 >


산 중턱에 벤치가 있어 잠시 앉아 쉬어가려 했으나, 득달같이 신발 위로 올라오는 개미 떼로 인해 포기.


영화 해리포터 속 금지된 숲으로 넘어갈 때처럼 야트막한 언덕을 타고 내려가 하얀 펜스를 열어젖힌 후 울창한 밀림을 다시 걷고 또 걸었다.


도착하면 바로 장엄한 폭포가 나를 맞이하고 있을 것이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비탈길을 따라 30분 여를 더 내려가자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이내 거세게 맥동하는 하얀 물줄기가 눈에 잡혔다.


< 폭포, 좌측 하단 작은 물줄기에서 몸을 씻어내면 그만한 게 또 없었다. >


천공을 배회하는 독수리. 울창한 삼림 그리고 저 위에서 세차게 쏟아져 내리는 새하얀 물줄기가 청명한 하늘과 대비를 이뤘다. 찰박이는 바람이 귓가를 간질였다.


가히 압도적인 경관.


5,000만 한국인 중에 이 외진 곳을 찾은 사람이 나 말고 있을까 생각도 하고, 산호세에 표류하게 돼 어찌해서 결국 생각해보지도 못한 장소에 발을 디뎠다 생각하니 기분이 어딘가 묘했지만, 우선은 배가 너무 고팠기에 냇가 근처에 수건을 깔고 앉아 챙겨 온 과자와 사과를 먹었다.


< 또 다른 물줄기들 >


왼쪽으로 돌아 들어가 물에 잠시 몸을 맡겼다. 더할 나위 없이 상쾌했다.


< 이게 유지/보수 중이었던 다리이지 싶다. >


잠시 나름의 모험을 떠났다가


< 돌탑. 몇 년 만에 만든 것인지 기억도 안 난다. >


안쪽의 또 다른 폭포 앞에서 돌탑을 쌓아 올리는 소소한 재미도 누렸다.


< 한없이 자유롭다 >


온전히 살아있음을 실감하게 되는 순간들.


모든 계획이 어그러졌음에도 또다시 어딘가로 떠난 내게 여행은 늘 그래왔듯, 전혀 예상치 못한 새로운 경험을 선물했다.



두세 시간 정도를 폭포에서 보낸 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인 정류장에서 버스를 잡아타고 숙소로 향했다.


인터넷에 시간표가 없고, 버스 정류장에도 시간표가 없기에, 어설픈 스페인어와 구글 번역기를 동원해 버스에 올랐다.


멈추도록 정해진 정류장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정류장에서는 멈추지도 않고, 반면, 손을 흔드는 사람이 있다면 길가 어디서라도 멈추는 좋게 말해서 독특한 버스 시스템.


달리 말하면, 스페인어가 안 된다면 타고 내리는 게 불가능한 버스라고나 할까.


내국인, 외국인 요금도 다르게 받던데, 아마 여행자라서 차별한 게 아닐까 싶다. 많이 피곤하기도 했고, 1시간 30분 편도에 3,000원 수준이었으니 딱히 따질 생이 들지 않았다.


다행히 숙소 근처의 버스 정류장이 종점이어서 별문제 없이 돌아가긴 했지만, 약간은 아찔한 경험이었다.




버스에 몸을 싣고


< 해가 진다. >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로 향하는 길에 끈질기게 말을 걸어오는 노숙자를 떨쳐내느라 고생이 많았지만, 무사히 넘어갔고,


침대에 누워 하루를 되짚어 보니 마주했던 자연과 잠을 청할 도시의 경관이 사뭇 달라, 그 대비에 대해 생각하다 잠에 들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