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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라이세이 Aug 10. 2019

반바지를 샀다.

반바지는 긴바지보다 편하기 때문이다.

반바지를 샀다. 어렸을 때부터 패션에는 그리 관심이 없던지라 내가 직접 옷을 사는 일은 드물었다. 패션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는 언제나 '편함'이었다. 편함은, 옷을 입었을 때 느껴지는 '착용감의 편함' 이외에도 '옷' 그 자체가 나에게 전해지는 '과정에서의 편함'도 있는데, 유독 나는 양쪽의 편함을 모두 산호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직접 스타일을 선택하여 구매하는 옷보다 엄마가 사 온 옷이라든지, 동생이 사둔 옷 중에서 사이즈가 큰 옷들을 입곤 했다. 그 습관은 여전해서 직장인이 된 지금도 옷을 사는 일에는 큰 관심이 없다.


그런 내가 반바지를 샀다. 날이 너무 더워 지금 입고 있는 긴 바지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역시나 패션 센스를 기대할 수 없는 종류의 구매 이유인데, 어쨌든 다른 일 때문에 집을 나선 김에 옷을 파는 매장에도 들른 것이다. 매장을 한 바퀴 쭉 돌면서 어떤 옷들이 있는지 살폈다. 옷들의 스타일보다 가격표에 눈이 먼저 가는 난, 아무 옷도 사지 못하고 매장을 빠져나왔다. 두 번째 매장에서는 괜찮은 가격대의 옷들이 보였다. 반바지를 사는 김에 상의도 같이 사겠다고 반바지에 상의까지 몇 벌을 들고 피팅룸으로 들어갔다. 챙긴 옷들을 입어보니 마음에 든 반바지는 편했고, 셔츠는 너무 컸다. 한 단계 낮은 사이즈로 셔츠를 입어보길 원했지만 매장에 그 사이즈는 없었다. 추가 주문을 해야 한다기에 그냥 반바지만 사기로 했다.


그렇게 반바지를 샀다. 편하게 입을 수 있는 반바지였다. 시원하게 입을 수 있는 반바지였다. 출근할 때 입지 못하는 반바지는 출근하지 않을 때 입을 용도였다. 어차피 출근은 집을 나서야만 하는 이유니까, 출근하지 않을 때 집을 나서길 수월하게 해주는 바지가 되길 원했다. 왜냐하면 반바지는 긴바지보다 편하기 때문이다. 아무런 생각 없이 반바지를 쑤욱 입고 슬리퍼를 신고 대충 집을 나선다. 이런 주말은 집에 있어봤자 하는 일이란 잠을 자는 건데, 그렇다고 내 자취방은 그리 쾌적하지도 않다. 그래서 집을 나서고 싶은데 그게 또 막상 쉽지는 않다. 그런데 반바지가 있으니 편하게 반바지를 입으며 나갈 채비를 한다. 그 반바지를 입고 집 근처 카페로 나와 시원한 음료를 시킨다. 책을 읽는다. 글을 쓴다. 집을 나서보니 오히려 집 밖이 집 안 보다 시원하다. 나 원참. 어쨌든 반바지를 샀다. 여름엔 반바지가 긴바지보다 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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