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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라이세이 Sep 17. 2020

달맞이꽃(기다림)

여름_6월 21일의 탄생화

이제야 알았다. 왜 그토록 주부들이 홈쇼핑을 많이 보며, 인터넷 쇼핑을 하며, 그렇게 주문한 물건을 기다리는지를. 이것은 외로운 시간을 애타게 이겨내는 기다림이요, 단지 몇 분일지도 모르는 시간만큼을 새 물건을 어루만지는 즐거움이요, 허한 마음을 대체하는 무엇인가 이기 때문이다. 하여 무언가를 보고, 주문하고, 기다린다. 여태껏 그리 많은 물건을 택배로 받아놓고는 이제야 알았다. 이사를 하며 새롭게 비워진 공간을 채우면서부터다. 하염없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물건이 도착하면 그 물건을 새롭게 세팅하는 시간을 기대한다. 그리고 다시 새롭게 채워낼 무언가가 있기를 기다린다.

이사를 했다. 한 집을 2명에서 1층과 2층으로 나눠 살던 이전과 달리 온전히 하나의 현관문으로 들어와 혼자서 산다. 다른 말로 누군가가 현관문을 열어 내 삶의 흐름을 끊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전 집에서 많은 물건을 버렸고, 새로운 집에서 다른 물건들을 채우는 중이다. 내가 채우는 것 외에는 이곳을 침범하는 것이 없다. 골목 바로 옆이었던 탓에 창 틈으로 넘어오던 행인들의 잡담 소리도, 2층으로 올라가는 오래된 계단의 삐거덕거림도 모두 버렸다. 해서 조용하기까지 하다. 

하얀 장판에 하얀 벽지, 하얀 침대 시트에 하얀 주방. 잘못하면 병실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이 조용한 공간을 채우기 시작했다. 수납할 물건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수납함을 주문하고, 바구니를 주문하고, 책장을 주문한다. 벽에 못질을 하고 싶지 않아 냉장고에 자석으로 붙이는 선반도 주문한다. 주방용품도 주문하고, 목욕용품도 주문한다. 냉장고를 채울 식재료도 주문한다. 며칠 이내로 택배 아저씨가 연락을 한다. 물건을 들고 온다. 문 앞에 둔다. 그러면 나는 문 앞에서 안으로 물건을 들인다. 없었던 물건이 새롭게 문턱을 넘는다.

방 어디에 놓으면 좋을까, 조립은 어떻게 하면 되는 것일까, 어떤 물건이랑 조합을 하면 더 효율적일까. 새 물건과 함께 새로운 생각이 머리를 채운다. 오늘은 퇴근하고 뭐 하며 심심함을 달래지, 하는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된다. 새 물건을 뜯고, 조립하고, 어디에 둘 지를 고민하는 동안은. 그만큼의 시간이 흐르고, 그만큼의 잡념이 사라진다. 여기서 물건이 얼마나 더 오래도록 사용되는지 같은 가치를 따지는 것은 사치다. 이미 이 물건들은 잠시나마 잡념을 사라지게 하는 것으로도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 하얀 방에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도통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지금은.

기다린다. 이사한 원룸에서, 다음 물건이 도착하기를. 그 물건이 채워줄 잠깐 동안의 시간을. 그것은 메마른 땅의 소나기처럼 잠시나마 갈증을 없앤다. 나는 그 메마른 땅에 뿌리를 내린 탓에 움직이는 못하는 꽃 한 송이여, 이 하얀 방은 그 메마른 땅이요, 소나기는 주문한 물건이니. 박스에 붙은 테이프를 뜯어내면서 이 적막함을 깬다. 기다렸던 시간이다.


_에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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