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라이세이 Sep 19. 2020

흰색양귀비(망각)

여름_7월 3일의 탄생화

"빨간 사탕을 먹으면 넌 꿈에서 깨어나 진실을 알게 될 거야. 파란 사탕을 먹으면 지금 내가 했던 말을 까맣게 잊은 채 진실이 뭔지도 모르고 살아갈 거고. 선택은 너의 몫이야. 자, 골라봐."

상지는 나에게 양 손을 내밀면서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다. 한 손에는 빨간 사탕, 다른 한 손에는 파란 사탕이 놓여있었다. 빨간색은 딸기맛, 파란색은 민트 맛이었다. 두 사탕 모두 지금 먹고 있는 가츠동과는 절대로 어울릴 수 없는 맛이었다. 나는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지 당황스러워 잠자코 상지의 얼굴을 보았다. 저녁밥 맛있게 잘 먹고 있는데 갑자기 사탕을 먹으라니. 그냥 웃어보라는 장난인가? 장난도 어느 정도의 맥락은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 그러나 에비동을 절반이나 남겨둔 상지의 표정은 단호했다. 아직 멀쩡한 새우튀김 두 마리가 밥 위에 고스란히 놓여있는데 사탕을 건네는 상지를 나는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자기 사탕은 왜?"

"일단 선택해. 나 진지하니까."

나는 상지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빨간 사탕을 집었다. 빨간 게 무슨 의미였고 파란 건 무슨 의미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애초에 귀담아듣질 않았으니. 사탕을 집자 상지는 빙그레 웃었다.      


"훌륭해. 자, 이제 한 입에 삼켜."

"아니, 밥 먹다가 갑자기 사탕을 먹으라고? 나 아직 밥 다 안 먹었어."

"지금 그게 중요해?"

너무나도 당차게 쏘아붙이는 상지의 말에 나는 갑자기 내가 잘못한 것처럼 느껴졌다.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나왔다. 하지만 상지의 눈빛을 보니, 그냥 별다른 말 없이 먹고 넘기자 싶어 손에 든 빨간 사탕을 입에 털어 넣었다. 어금니로 와그작 깨물자마자 달디 단 딸기맛 액체가 입안에 퍼졌다. 방금 전까지 먹고 있었던 가츠동의 고소한 기름과 짠 간장으로 범벅이던 입 안이 달콤한 사탕과 섞여 난장판이 되었다.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제 됐냐?"

"진실의 세계에 온 걸 환영해."

그게 무슨 소리냐고 입을 떼기도 전에 갑자기 시야가 어두워지고 빙빙 돌았다. 순간 정신이 TV 전원이 나가듯 '팟!' 하고 꺼졌다.


눈을 번쩍 떴다. 나는 누워있었다. 주위는 온통 새하얀 벽과 천장이었다. 왼 편엔 창문이 있어 따뜻한 볕이 들고 있었고, 오른쪽엔 커튼이 쳐져 있었다. 그리고 커튼 앞에 상지가 있었다. 나를 보면서 미소를 지은 채로.


"기분이 어때?"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되긴. 꿈에서 깨어난 거지."


지금까지 내가 현실이라고 생각하던 세상은 알고 보니 꿈이었다, 라는 것이 상지의 설명이었다. 상지 말에 의하면 나는 학교를 가던 도중 큰 교통사고를 당했고, 머리에 피를 엄청 흘렸다고 한다. 곧장 큰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의사는 언제 깨어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고 말했고, 그렇게 잠에 든 채로 지난 시간이 무려 3년이었다. 처음엔 일주일에 한 번씩은 친구들이 병문안을 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발길이 뜸해졌고, 지금까지 나를 찾아오는 건 상지뿐이었다. 믿을 수 없었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봐도 내가 있는 곳은 병원이었다. 환자복을 입고 있었으며, 왼팔엔 주삿바늘이 꽂혀있었다. 혼란스러웠다. 잠시 정신을 차릴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찰나,

"이게 끝이 아니야."


상지가 조용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나는 고개를 들어 상지를 봤다. 상지는 양손을 펼쳐 보였다. 한 손에는 빨간 사탕, 다른 한 손에는 파란 사탕이 놓여있었다. 상지는 나를 보고 씩 웃으며 말했다.


"빨간 사탕을 먹으면 넌 꿈에서 깨어나 진실을 알게 될 거야. 파란 사탕을 먹으면 지금 내가 했던 말을 까맣게 잊은 채 진실이 뭔지도 모르고 살아갈 거야. 지금까지처럼. 자, 골라봐."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상지는 지금 내가 꿈에서 꾼 것과 똑같은 말과 행동을 하고 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나는 침을 한 번 삼키고 다시 한번 빨간 사탕을 집어 입에 넣었다.


"진실의 세계에 온 걸 환영해."


상지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다시 한번 세상이 어두워지고 빙빙 돌더니 '팟!' 하고 꺼졌다.


나는 수백 번을 깨어났다. 깨어날 때마다 눈앞에는 상지가 있었으며, 매번 빨간 사탕과 파란 사탕을 건넸다. 끝이 보이지 않는 무한의 고리에 빠져 정신을 잃을 것 같았지만 정신은 나의 머리에서 도망가지 않았다. 차라리 그냥 정신을 잃고 쓰러졌으면 했지만 짜증 날 정도로 나의 정신력은 강했다. 유치원생이 되었다가 할아버지가 되었고, 세계 최고의 부호가 되었다가 빈민가의 거지가 되었다. 팔다리가 없는 장애인이 되었다가 올림픽 국가대표 선수가 되기도 했다. 매번 채 3분이 안 되는 시간이 꺼지고 켜지기를 반복했다. 인간이라면 가능한 모든 삶의 경우를 다 겪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고양이 애호가로 깨어나 주위에 수십 마리의 고양이를 데리고 있을 때쯤, 나는 더 이상 이렇게 끝나지 않는 꿈을 꾸기 싫다고 생각했다. 깨어났을 때 한 번만 더 상지가 내 앞에서 사탕을 건넨다면 그냥 혀를 깨물고 죽을 거라고 다짐하며 상지의 빨간 사탕을 입에 넣었다. 이번에는 상지가 눈앞에 보이지 않았다. 대신 엄마가 있었다. 엄마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땀에 젖은 내 얼굴을 수건으로 닦아주고 있었다.


"민서가 악몽을 꿨나 보네. 밤새 끙끙 앓더라. 내가 걱정돼서 잠도 못 자고 네 옆에서 이러고 있다."


엄마의 얼굴을 보니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나는 그대로 엄마의 품으로 달려들어 고개를 묻었다. 그리고는 엉엉 울며 말했다.


"정말 이상하고 무서운 꿈을 꿨어요. 계속 깨고 깨고 깨는데도 꿈 속이었어요. 현실로 못 돌아오는 줄 알았어요. 진짜 죽고 싶었어요. 너무너무 무서웠어요."

"에구, 그랬구나 우리 민서. 요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나 왜 그럴까. 근데 민서야."

"네?"

"지금은 꿈에서 깬 것 같니?"

순간 엄청난 공포감이 나를 감쌌다. 나는 설마 하는 마음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엄마의 얼굴을 보았다. 내 눈앞에는 엄마가 아닌 상지가 웃고 있었다. 이번에는 양 손 모두에 빨간 사탕을 올려놓은 채로.


_팬더


#흰색양귀비 #망각 #꽃 #꽃말 #꽃한편 #꽃단편 #네이버 #오디오클립 #팟빵 #팟캐스트 #창작 #컨텐츠 #이야기 #글쓰기 #오디오북 #프로젝트 #사이드프로젝트 #탄생화 #수필 #에세이

이전 09화 달맞이꽃(기다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