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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라이세이 Sep 19. 2020

가지(진실) - 허풍쟁이 노인

여름_7월 20일의 탄생화

여행을 하며 돌아다니는 것은 언제나 들뜨는 일이지만 출장으로 돌아다니는 것은 항상 피곤하고 지친다. 여기저기 돌아다닌다는 것은 똑같은데 일을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도저히 즐거울 수가 없다. 나는 이번 아이다호 출장을 마치고 나서는 한동안 집에 머물며 휴식을 갖겠노라 다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일 있을 미팅을 잘 해결해야 했다. 걱정 속에서 잠이 오지 않아 한참을 뒤척이다가 겉옷을 챙기고 술집으로 향했다. 약간의 알코올이 나의 수면을 도와줄 것 같았다. 한 허름한 술집은 애매한 시간 때문인지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당구를 치는 정비공들, 얼큰하게 취한 대머리 아저씨와 바에 앉아 싸구려 시가를 피우는 한 노인뿐이었다. 술집이 너무 좁은 탓에 시가를 피우는 노인 옆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바텐더에게 마티니 한 잔을 주문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노인은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나를 지긋이 보면서 말했다.

"좋은 선택이네, 젊은이. 마티니는 언제나 지친 영혼을 달래주지. 이곳에서 처음 보는 얼굴인데, 외부인인가?"

나는 술 취한 노인의 오지랖으로 치부했다. 하지만 술집에 혼자 들어와서 딱히 할 일도 없고 내일 미팅 생각도 지울 겸 이 노인과 이야기를 나눠야겠다고 생각했다.

`"네, 이번에 아이다호로 출장을 왔습니다. 내일 원자력 발전소에서 미팅을 하기로 해서요."


그러자 노인이 말했다.

   "망할 원자력 발전소. 그것 때문에 이 지역에서 사냥을 할 수 있는 곳이 너무 줄어들었어. 사슴들은 다른 주로 넘어가버리고 말이야. 그리고 언제든지 무기를 만들려고 저 발전소를 만든 게 분명하네. 전쟁터를 겪어보지 않은 정치인들만 항상 전쟁을 준비하지."


바텐더는 버럭 화를 내는 노인이 익숙한 듯 무시하며 조용히 마티니를 흔들었다. 나 또한 아버지로부터 이런 이야기는 많이 들어서 흘러 넘겼다.


"어르신은 이곳에서 사냥을 하시며 지내시나 보군요."


나의 말에 노인은 어깨를 펴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나는 타고난 사냥꾼이지.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사냥을 했네. 내가 종군기자를 하면서 한동안 사냥을 하지 못해 기량이 많이 줄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타고난 것은 어쩔 수 없더군."


"종군기자를 하셨군요. 존경합니다. 그럼 어느 전쟁터를 돌아다니셨나요?"


나는 노인의 말에 조금은 호기심이 생겨서 물어보았다.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모두 참전했지.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파리 해방 전투, 스페인 혁명에도 참여했다네. 폭탄이 바로 옆에서 터져 다리에서만 90개의 파편이 나오기도 했지. 여기 보이는 이 자국 말이야."


노인은 바지를 걷으며 흉터 가득한 다리를 보여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종군기자를 하면서 미국의 스파이로서도 활약했다네. 내 친구가 정보부 쪽에서 일해서 말이야. 전쟁터와 도시에서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었지. 그리고 소련 정보부에서도 연락이 오더군. 물론 그들에게는 좋은 정보를 주지 않았어. 어떻게 보면 그들에게 협력하는 척을 하면서 오히려 정보를 빼올 생각이었지. 하지만 금세 들통나더군. 다행히 해코지는 당하지 않았지만 말이야. 하지만 지금은 반대로 미국 정보부에서 나를 감시하고 있다네. 참 아이러니한 일이지. 민병대를 만들어서 독일 놈들의 유보트를 감시하던 이 영웅을 말이야."


나는 노인이 종군기자로 일했었다고 말할 때까지만 해도 꽤 재밌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어지는 스파이 이야기에서 허풍이 굉장히 심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반쯤 무시하며 반응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노인은 이야기를 끝내고 싶어 하지 않아 했다. 


"내가 쿠바에 있을 때 피델 카스트로와 친구여서 그런지 몰라도 FBI 놈들이 계속 도청하고 있단 말이야. 참, 그놈들은 사람을 한참 잘못 보았어. 참전용사를 말이야!"


노인은 화가 난 듯 주먹으로 바를 내리쳤다. 그 바람에 노인의 잔은 바닥에 떨어져 깨지게 되었다. 바텐더는 이 또한 익숙한 듯 조용히 창고에 들어가 빗자루를 들고 왔다.


"어르신, 유리 조심하세요. 술을 마시고 피가 나면 잘 멈추지 않잖아요."


화를 참지 못하고 연신 시가를 피우던 노인은 허공을 본 채 말했다.


"피라. 피는 이미 흘려볼 때로 흘려봐서 이제 더 이상 두렵지는 않네. 브롱크스 동물원에서 곰과 술을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 시비를 거는 불량배들과 싸우는 게 내 젊을 적 취미였네. 피는 내가 살아있음을 알려주는 거지. 고통의 표현이 아니야. 오히려 삶의 축복이지. 그대도 삶이 지루하다고 느껴지면 피를 한 번 흘려보게나. 복싱이라는 좋은 수단이 있으니 말이야. 합법적으로 마음껏 피를 토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일이지."


나는 다 마신 마티니 잔을 보며 노인의 헛소리를 듣는 것이 더 이상은 아무런 영양가를 받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마침 바텐더도 노인이 깨트린 유리잔을 치우고 있어서 더 이상 추가 주문을 하지 못하니 이만 숙소로 돌아가는 편이 낫겠다 판단했다. 자리를 일어나면서 일말의 예의를 갖추며 노인에게 말했다.

   

"어르신, 재밌는 이야기 감사합니다."


노인은 시가를 마저 피며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그래, 젊은이와 이야기하는 것은 언제나 나의 행복이지. 술값은 내지 말고 가게. 이야기를 들어준 값이라고 생각하게. 그리고 고맙게 생각해서 내일 원자력 발전소 놈들을 때려준다면 더더욱 좋고."

   

"감사합니다. 하지만 마지막 부탁은 들어드리기 어렵겠군요. 그래도 한 참전용사 영웅이 원자력 발전소 때문에 사냥을 못해서 잔뜩 화나 있다고 전해드리겠습니다. 성함을 알려주시면 그 사람들에게 말해놓겠습니다. 혹시 모르죠. 보상을 해주러 와줄 지도요."


노인은 처음으로 웃으며 말했다.


"헤밍웨이. 어니스트 헤밍웨이라 전해주시오." 


_제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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