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_10월 29일의 탄생화
승호는 이번 어린이날 선물로 그토록 갖고 싶었던 완구 세트를 받았다. 승호의 초등학교 입학 기념으로 아버지는 승호에게 기억에 남을 만한 선물로 해주어야겠다고 다짐했는데, 이 완구 세트가 가장 눈에 띄었다. 꽤 비싼 가격이었지만 그만큼 승호에게 좋은 추억거리를 만들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승호는 아버지와 함께 설명서를 읽으며 완구 세트를 조립했다. <신이 되어보기(Becoming God!)>라는 이름의 이 완구는 초등학생 몸만 한 크기의 커다란 유리 구체와 복잡한 전자 장치로 구성되어 있다. 유리 구체 안에는 매우 강하게 응축된 각종 분자들이 얼려져 있다. 이 유리 구체를 받침대 위에 세워놓고 전기 플러그를 연결한다. 자신만의 세상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면 비장한 각오와 함께 스위치의 On 버튼을 누른다.(세상을 창조할 때는 언제나 각오가 필요한 법이다.) 그러면 유리 구체 안에 강력한 전기 스파크가 튀면서 응축되어있던 분자들 간의 화학반응이 일어난다. 설명서에는 이것이 일종의 '빅뱅' 역할을 한다고 쓰여있다. 급격한 에너지의 유입 때문에 이리저리 치고받던 기체 분자들은 서서히 식으면서 저마다 새로운 결합 형태를 띠게 된다. 그중에는 단단한 고체도 있고 색이 있는 기체도 있으며 아주 작은 방울 수준의 액체도 있다. 유리 구체가 하나의 우주가 되는 것이다!
승호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유리 구체 안을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런 승호가 기특했다. 저 호기심은 차후 승호를 큰 사람으로 만들 것이었다.
승호는 매일 구체를 가지고 놀았다. 설명서를 읽으면서 자신의 우주에 필요한 조치를 하나씩 취했다. 노란색 기체의 농도가 조금씩 짙어진다는 것은 내부에 독성이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했는데, 그럴 때는 리모컨의 '중화' 스위치를 조절해 기체 농도를 맞춰주었다. 온도계에 표시되는 온도가 설명서에 적힌 적정 온도 범위를 벗어날 때는 '냉각' 버튼을 눌러 열을 조금 식혀주었다. 승호는 자신의 우주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고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겼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반년이 지나자 승호는 점차 유리 구체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들었다. 승호의 우주에선 여전히 번쩍번쩍하는 화학반응만 일어나고 있었고, 승호가 할 일은 그때마다 정해진 방식대로 조금의 조절만 해주는 것뿐이었다. 이제 갓 여덟 살이 된 승호의 관심을 계속해서 붙잡아두기에 유리 구체는 너무 단순했다. 얼마 가지 않아 승호는 유리 구체를 찾지 않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유리 구체는 승호의 방 구석으로 밀려났고, 어느새 옷장 깊숙이 처박히게 되었다.
승호의 가족이 구체의 존재를 완전히 까먹게 된 무렵, 승호의 우주에서는 조금씩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분자들의 무수한 충돌의 결과 커다란 행성들이 둥실둥실 떠다니게 되었고, 특히 한 행성에는 생명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주 원시적인 단세포동물이었지만, 이 생명체는 자신을 복제하고 복제했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승호의 우주에는 고도로 발달한 지능 생명체가 번식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행성 안에서 자신들만의 문명을 만들고 역사를 써 내려갔다. 다양한 종교가 생겨났으며, 과학도 점점 발달해갔다. 이들이 발전하는 속도는 처음 유리 구체의 스위치가 켜지고 난 후 첫 생명체가 태어날 때까지 걸린 시간에 비하면 눈에 띄게 빠른 것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무궁한 영광과 찬란한 미래를 위하여 열심히 살았다.
승호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될 무렵, 승호는 공부에 매진해야 한다며 자신의 방을 깔끔하게 청소했다. 그러던 중 자신의 옷장 깊숙한 곳에서 어렸을 때 잠깐 가지고 놀던 구체를 발견했다. 그 안에는 꽤 큼직한 알갱이들이 둥실둥실 떠있었고 아주 작은 모래알 비슷한 것들이 유유히 부유한 채로 움직이고 있었다. 승호는 비록 이 장난감이 10년도 더 된 옛날 물건이지만, 이제 막 5살이 된 자신의 동생 영미에게는 나름 즐거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대로 들고 가 영미에게 깜짝 선물을 주려던 승호는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동생에게도 새로운 세상을 탄생시키는 기쁨을 누리게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ON 스위치를 누를 때 파지직하고 빛이 났던 순간은 어린 나이에 느끼기 쉽지 않은 최고의 놀라움이기 때문이었다.
상자 안에 같이 있던 설명서를 펴보니 유리 구체를 리셋하는 방법이 맨 마지막에 나와있었다.
당신이 만든 우주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구요? 새로운 세상을 다시 한번 만들어보고 싶으시다구요? 걱정하지 마세요. 간단한 방법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리모컨 하단에 있는 <RESET> 버튼을 빠르게 두 번 눌러주세요. 강력한 전기 효과가 일면서 유리 구체 내부가 깔끔하게 청소될 겁니다! 하루 동안 구체를 햇볕에 두어 쉬게 해준 이후, 다시 ON버튼을 누르면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습니다. 아, 리모컨 조작을 할 때 전기는 항상 꽃아 두어야 한다는 거 잊지 마시구요! 그럼, 행운을 빕니다!
설명서를 읽고 승호는 이 완구 세트를 받고 좋아할 동생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 없이 <RESET> 버튼을 두 번 눌렀다.
따닥- 따닥!
_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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