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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라이세이 Sep 21. 2020

부처꽃(사랑의 슬픔) - 현이 아빠에게 쓰는 편지

가을_10월 11일의 탄생화



부여시에 있는 오래된 무덤을 조사하던 R 교수는 발굴하던 도중 꽃 항아리에 담긴 편지를 발견하게 된다. 조선 초중기에 쓰인 것 같은 편지는 양반가 부녀자가 쓴 듯했다. 한글 구어체로 쓰인, 약간 훼손은 되었지만 일부분이긴 해도 해석하기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아래는 R 교수가 번역한 전문이다.


현이 아빠에게 쓰는 편지.


당신이 떠난 지도 벌써 스무해가 지났습니다. 언제나 곁에 있을 거라던 우리의 약속은 결국 이뤄지지 못했군요. 아직도 쓸쓸히 이불보에 몸을 맡기면 창으로 비춰오는 달빛에 당신 목소리가 들립니다. 현이 아빠, 우리 아이들 현이, 명이, 숙이 모두 건강하게 잘 있어요. 현이는 벌써 자식이 셋이랍니다. 당신이 할아버지가 되었어요. 분명 당신이 옆에 있었다면 닿으면 깨질까 손자 손녀들을 아끼고 보듬어주었을 거예요. 아이들이 웃는 모습을 보는데 오늘따라 현이 아빠 모습이 보이더라고요. 명이와 숙이는 모두 산 넘어 마을로 시집을 갔답니다. 집은 여전히 따사로워요. 햇빛은 이전과 같이 집 앞뜰을 비춰주고 있어요. 날이 좋은 날이면 닭들이 병아리를 이끌고 마당에 나와 거닌답니다. 어미 곁을 맴도는 병아리들과 가족을 지키려 주변을 경계하는 장끼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우리 가족의 옛 모습이 떠올랐어요. 요즘 따라 현이 아빠가 너무나도 그립네요. 현이 아빠가 떠난 후로 시간이 날 때마다 산에 올라 돌부처님께 항상 기도하고 있어요. 사랑을 하면 슬픔과 고통이 동시에 온다고 석존께서 말씀하셨다는데 정말 부처님의 말씀은 틀린 것이 없는 거 같아요. 현이 아빠. 전 괜찮으니 극락에서 부처님 곁을 지켜주세요. 그러다가 가끔 저와 아이들이 보고 싶거든 흩날리는 꽃잎에 담겨 와주세요. 넉넉한 가을바람에 실려 와주세요. 포근한 눈송이에 내려와주세요. 


편지는 이후에도 이어지지만 바랜 부분이 있어서 육안으로는 더 이상 해석하기 어려웠다. R 교수는 복원팀에 편지를 전달하고 연구소를 나섰다. 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데 차가 너무 밀리기 시작했다. 내비게이션에는 차량 사고를 알리는 알림이 왔다. 누군가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못 돌아가게 되었군. R 교수는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오늘 하루 종일 바라본 현이 아빠에게 쓰는 편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현이 아빠는 어쩌다가 그렇게 일찍 가족들을 떠났을까. 현이 엄마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에 잠기다 R 교수는 방향을 돌려 우회 도로를 타기로 했다.


집 근처에 다다르고 신호에 멈춰 섰다. 이전에 못 보던 꽃집이 새로 생겼다. R 교수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차에서 내려 꽃다발을 품에 안고 돌아왔다. 다른 손에는 꽃집 옆 빵집에서 파는 케이크가 들려있었다. R 교수는 집으로 향한다.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현이와 현이 엄마에게로. 현이 아빠가 바란 대로. 


_제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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