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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라이세이 Sep 23. 2020

매쉬메리골드(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

겨울_1월 30일의 탄생화

저녁 8시. 내가 일터로 출근하는 시간이다. 번화가에서 살짝 벗어나면 네온사인으로 장식을 한 카페가 있다. '매쉬메리골드'. 1년 전부터 형이 운영하는 카페를 누나가 퇴근하면 저녁에 칵테일 바로 바꿔서 운영하고 있다. 1년 전 결혼까지 생각한 사람과 잘 안 되면서 폐인처럼 생활하는 동생이 불쌍했는지 일이라도 하면서 잊어보라고 누나가 추천해준 일이다. 처음에는 새벽까지 일을 해야 하는 것이 귀찮고 따분했지만, 슬슬 재미를 붙이면서 친해진 손님들도 생기고, 칵테일 만드는 기술도 늘었다. 그러다 보니 매쉬메리골드에서 칵테일 바를 운영한 지 어언 1년이 되었다. 출근을 하자마자 나는 조명을 조금 더 어둡게 하고 바에 칵테일 도구를 정리하였다. 형은 의자 정리를 도와주며 나에게 말했다.


"저기 안쪽 여성분은 카페 손님인데, 오늘 오래 있을 거래. 커피 시키신 거 아직 다 안 마셨으니까 그렇게 알아둬."

"형, 나도 그 정도는 이제 알아. 예전에야 카페 손님이랑 칵테일 바 손님이랑 헷갈렸는데, 이제는 1년이나 해서 어느 정도 구분할 줄 안다고."

"어휴, 그랬어요? 그럼 일 잘하고 동생. 아침에 가기 전에 창고에 있는 통 좀 비우고 가줘."

"알았어, 조심히 들어가. 비도 오는데."

"응응, 뭔 일 있으면 말하고."


형은 테이블에 있는 양초에 불을 붙이고 퇴근을 했다. 오늘은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길거리에도 사람들이 많이 보이지 않았다. 몇 시간 동안 구석에 있는 여성 손님과 나뿐이었다. 나는 최근에 산 소설책을 읽으며 따분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손님은 내가 있는 바(bar)로 다가왔다. 책에 빠져 손님이 코앞까지 와서야 눈치를 챘다.


"저기..."


손님은 의자에 앉으며 작게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혹시 뭐 필요한 거 있으신가요?"


나는 책을 황급히 덮으며 일어섰다.


"여기, 커피가 들어간 칵테일도 있나요?"

"아, 에스프레소 마티니라는 칵테일이 있습니다. 에스프레소랑 보드카가 들어간 칵테일인데 설탕시럽이 들어가서 부드러운 편이에요."

"그럼 그걸로 부탁할게요."


나는 에스프레소를 내리면서 얼음을 쉐이커에 담았다. 에스프레소 마티니는 보통 커피 맛이 나는 보드카인 깔루아나 에스프레소 시럽을 이용해서 만드는데, 매쉬메리골드는 카페이다 보니 커피 머신이 있어서 직접 에스프레소를 내려서 쓸 수 있다. 에스프레소 2샷과 얼음, 그리고 보드카를 넣었다. 설탕시럽을 넣으려고 할 때 손님이 말했다.


"혹시, 알코올 향이 많이 안 나게 해 주실 수 있나요? 술 냄새를 안 좋아하는 편이라서."

"음... 그럼 설탕시럽 대신 메이플 시럽을 넣고, 바닐라빈을 조금 넣어드릴까요?"

"네, 그럼 괜찮을 거 같아요.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이렇게는 처음 만들어 보는데, 어떠실지 모르겠네요."


메이플 시럽과 바닐라빈을 넣자 바닐라 라떼 같은 향기가 바 전체에 퍼졌다. 쉐이커를 닫고 몇 번 흔들어 준 뒤 쉐이커에 칵테일 스트레이너를 올려 천천히 잔에 따랐다. 거품층이 분리가 될 때까지 기다린 뒤 원두 3개를 띄웠다. 손님은 신기한 눈으로 내가 칵테일을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주문하신 에스프레소 마티니 나왔습니다. 정통 에스프레소 마티니는 아니지만 입에 맞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손님은 조심스럽게 잔을 든 뒤 한 모금 마셨다.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내게 말했다.

   

"정말 알코올 향이 안 나네요. 맛있는 메이플 바닐라라떼를 마시는 거 같아요."

"다행이네요. 다른 손님들도 이 버전의 에스프레소 마티니 주문하시면 한 번 추천해봐야겠어요."

"다른 손님들도 좋아하실 거 같아요. 물론 저처럼 알코올 향을 별로 안 좋아하는 칵테일 바 손님이 있다면 말이죠."

"아니에요. 대부분 여기 오시는 분들은 달달한 술이 좋아서 오시는 분들이에요. 손님처럼 알코올 향을 안 좋아하시는 분들도 꽤 많아요."

"아, 그렇겠네요. 저는 칵테일 바가 처음이라 잘 몰랐어요. 한 번도 안 가봐서 도통 용기가 안 나서 못 갔었어요. 여기도 카페인 줄 알고 왔는데, 카페 사장님께서 저녁에는 칵테일 바로 바뀐다고 말씀해주셔서 커피 다 마시면 한 번 마셔볼까 용기를 내본 거예요."


손님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걸 마셔보니 진작 용기를 내볼 걸 그랬네요."

 "첫 칵테일을 제가 만들어드리다니, 영광이네요. 이곳은 처음 와보셨나 봐요?"

"네, 이 근처 광고 회사에 다니고 있는데,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어요."

"조금 안쪽에 있다 보니 그냥 길을 걸어 다니는 분들은 잘 못 찾으시더라고요. 그래서 손님들이 별로 없고 따분하게 운영하고 있어요. 최근에는 단골들이 조금 생겼는데 오늘은 비가 와서 그런지 그마저도 안 오시네요. 손님이라도 계셔서 다행이에요. 앞으로 많이 와주세요."

"네, 앞으로 많이 올게요. 저도 단골 될 거 같네요. 이곳에."

"그런데, 이 메뉴를 다른 분들에게 추천할 때 뭐라고 하면 좋을까요? 메이플 바닐라 에스프레소 마티니라고 하면 직관적이긴 한데 너무 길거 같고. 처음 만든 분이 정해주시는 거 어때요?"


손님은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한참을 고민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매쉬메리골드 어때요? 찾아보니까 꽃이더라고요. 이 카페 이름이기도 하고요. 이 칵테일 색깔도 옅은 황금빛이어서 잘 어울릴 거 같아요. 그리고 꽃말이랑도 매칭이 잘 되고요."

"꽃이라는 거는 알고 있었는데, 꽃말까지는 안 찾아봤었네요. 어떤 꽃말이에요?"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이래요. 이 칵테일이 첫 맛은 쓴데, 바로 다음에 메이플 시럽의 단 맛이랑 바닐라 향이 퍼지는데, 이게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 같아요. 어때요? 매쉬메리골드."

"좋은데요? 지금 바로 메뉴판에 써넣어야겠네요."


나는 곧바로 펜을 들고 메뉴판에 새로운 칵테일을 적었다. 메뉴판을 고치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손님이 수줍게 쳐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우리 둘은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오늘은 따분하지 않은 밤이 될 것 같다.  


_제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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