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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라이세이 Oct 01. 2020

쏟고 나서 "그럴 줄 알았는데." 시제의 역설

저녁은 점심때 먹고 남은 동그랑땡과 함께 맥주 한 캔을 먹을 참이었다. 편의점에 가서 호기롭게 맥주를 사 와서 락앤락 용기에 담아둔 동그랑땡을 데웠다.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맥주를 따고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쟁반에 올리고 옮겼다.


옮기는 것까진 좋았다. 맥주캔은 따져 있었고, 상을 펴기는 귀찮아서 침대 위에 올리는 것이 화근이었다. 침대는 견고하지 못했고, 쟁반을 매트리스 위에 올리자마자 '흔들~'하며 맥주가 쏟아졌다. 이불이 젖었다. 맥주를 급하게 다른 곳에 옮겼더니 탄산이 화산처럼 분출되었다. 그 주변도 흥건하게 젖었다.


아뿔싸, 내 저럴 줄 알았는데...

마음의 소리가 나왔다. 이미 쏟아놓고는 괜히 과거 시제다. 그럴 줄 알았다면 그러지 말았어야지. 이불은 이미 젖었고, 바닥도 젖었다. 편한 이불이었거늘.


이불을 바꾸면서 '아냐, 이불 세탁할 때가 되었지.' 생각을 바꾼다. 시제와 시점은 내 마음대로다. 현재와 과거는 분명 다른데, 현재였던 과거의 행동이 달랐다면 지금 이러지 않았을텐데. 지금과 나중은 또 다를텐데. 그래놓고 내 마음대로 시제를 달리 말한다. 그러면 내 마음이 편한 것인지 시제의 역설을 남발한다.


이불을 바꾼다. 젖은 바닥도 닦는다. 젖은 이불은 세탁기에 넣어두고 일단 저녁을 먹는다. 반쯤 흘러버린 맥주와 동그랑땡. 맥주가 씁쓸하다. 에이 이 맥주는 다음에 안 마셔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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